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27화 (42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3화

Golden Age

4. 황금이 녹아내린 땅(3)

장미래와 통화를 마친 고훈이 졸린 눈을 비비며 기사를 검색했다.

[러시아, “고훈 환영한다.”]

[모스크바 아트페어, “최고의 미술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러시아 문화부, “러한 문화 교류 재개의 시작.”]

“뭐지.”

며칠 전 분명 거절 의사를 전했거늘 무슨 일인지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것처럼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댓글이 속속들이 달렸다.

└이거 진짜임?

└염병도 정도껏 하자. 고훈이 저딴 델 왜 감ㅋㅋㅋㅋ

└참여하려는 작가들 없으니까 거짓말하는 게 분명함. 자국민들이라도 속이려고.

└아니 들킬 게 너무 뻔한 거짓말아님?

└고훈이 그런 사실 없다고 말하면 원래는 참여하려고 했는데 조건이 맞지 않았다고 할 속셈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훈이 이름값이 있으니까.

다행인지 러시아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전 세계를 해바라기로 물들였던 고훈이 설마 러시아의 전쟁 정당화 작업에 일조하리라 생각하는 이도 없었다.

“왜 이런 걸.”

다만 고훈은 러시아가 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울렸다.

방태호에게서 온 전화라 고훈은 급히 받았다.

“네.”

-깨어 있었어?

“미래 이모 전화 받고요. 러시아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보셨어요?”

-방금. 너무 걱정하지 마. 확인해 보니 믿는 사람 없더라. 오늘 당장 기자회견 가질 거고 WAPA 통해서 러시아에도 항의할게.

걱정하는 마음이 목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새벽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할 만도 한데 어떻게 대응할지도 마련해 두니 믿음직스러웠다.

“네. 걱정 안 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응. 놀랐을 텐데 푹 쉬어. 오늘은 집에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럴게요.”

통화를 마친 고훈이 물을 마시러 방을 나섰다.

* * *

[방태호, “거절 의사 전달했다.”]

[WAPA, “러시아는 미술가를 이용한 정치선전을 중단해야 한다.”]

방태호는 발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사건 당일 모스크바 아트페어 조직위원회와 나눈 이메일을 공개하여, 고훈이 거절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음을 알렸고.

셰바송 씨몽을 통해서 WAPA(세계 예술 진흥 협회)에 협조를 요청해 러시아의 거짓 주장을 규탄하도록 했다.

미술계와 미술 애호가들은 고훈을 향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안도했으며, 동시에 러시아의 만행을 비판했다.

“다행이긴 한데 이해가 안 돼.”

차시현이 침대에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말했다.

“증거가 뻔히 있잖아. 왜 그런 거짓말을 해?”

“태호 아저씨는 러시아 사람들만이라도 속이려고 한 것 같다던데.”

“검열 때문에 못 보니까?”

“응.”

스타링크 사업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신 장치가 없다면 사용할 수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국민들이 해외 보도 자료를 접할 수 없도록 자국 내 인터넷만 활용하도록 했으며.

사이트 접속 차단, 특정 단어 검색 불가 등 강력한 검열 정책을 시행했다.

때문에 고훈이 어떻게 반박하든 러시아인들이 알 수 없을 거라 추측되었다.

“그래도 좀 이상해.”

“뭐가?”

“아트페어에 네 그림이 걸릴 리 없잖아. 그럼 러시아 사람들한테도 결국 들킬 테고.”

“그러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닐까?”

고훈이 침대 방향으로 의자를 돌렸다.

“그 사람들 입장에선 어떻게든 네가 참가하길 바랄 거 아니야. 돈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문화재 돌려준다고 하는 거고.”

차시현의 말대로였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건 조건만은 마음에 걸렸다.

최근 <델프트의 여인>과 관련해서 문화재를 반환해야 한다고 말했고 진심으로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랐기에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 될 일이야.”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문화재를 돌려줬으면 해도 그런 방식은 납득할 수 없어.”

“……다 돌려준다면?”

“어?”

“러시아에 우리나라 문화재가 5,346점 있다며. 그거 다 돌려준다고 하면?”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러시아가 보유한 문화재는 역사적, 예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물품이 많았다.

특히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구하기 힘든 문화재가 많았는데,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북한이 러시아에 선물한 물품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거였어.”

차시현이 자세를 고쳐잡고 앉았다.

“처음엔 생각도 안 했잖아. 100만 유로를 주든 1,000만 유로를 주든 갈 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조건만 손 보면 고민하게 되잖아.”

“그렇게 나올 리가 없잖아.”

러시아가 고훈을 초청하고자 한국 문화재 전부를 돌려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하면?”

차시현이 다시 물었다.

“아빠가 그랬어. 거래를 할 때는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걸 제시해야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독재자가 자기 정권 유지하려고 뭘 못 하겠어? 전쟁도 일으켰는데.”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시현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본인 정권을 위해 전쟁까지 벌인 미친 인간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나도 모든 문화재를 돌려주진 않을 것 같아. 근데 엄청 중요한 걸 준다든가 그럴 순 있잖아.”

“…….”

“에르미타시 박물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그림도 있고. 그런 것도 돌려보내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의 작품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그것을 되찾기 위해 폭력과 타협할 순 없었다.

“거절해야지.”

고훈이 단호히 답했다.

“넌 거절했는데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가 제시한 문화재 보고 마음이 바뀌면?”

고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사람 마음 몰라. 네가 한 말에 책임지라고 할 수도 있고, 눈 한 번 딱 감고 해달라고 할 수도 있어. 프랑스 사람들이 델프트의 여인 국보로 지정하자고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고. 그때가 와도 지금처럼 바로 대답할 수 있어?”

“하지만.”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정말로.”

차시현이 친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렸을 적부터 정‧재계 인사들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쟁취했는지 보면서 커왔던지라 이번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고훈이 상처 입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한 마음이 차시현의 얼굴에 그대로 들어났기에 고훈은 피식 웃었다.

“그래. 고마워.”

* * *

[러시아 문화부, 국보급 문화재 반환 고려 중]

6일, 러시아 연방 문화부가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을 대한민국에 반환할 계획을 발표했다.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은 상감 기법으로 병 표면에 용을 휘감아 새긴 고려청자다.1)

비색과 조형, 세공 기술이 탁월하고 보관 상태가 뛰어나 1962년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고 있다.

러시아 문화부가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을 반환한다면 국보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러시아 문화부는 고훈의 거절 의사를 재차 밝혔음에도 이에 관한 다른 입장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얘네들 진짜 뭐 하냨ㅋㅋㅋ

└훈이가 안 나간다고 하잖아.

└제정신이 아니네. 대체 뭔 생각으로 저러지?

└근데 저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기사 엄청 나오네.

└ㅇㅇ 애초에 비슷한 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니까. 관리 상태는 저게 더 나아 보임.

└그럼 받는 게 좋지 않나?

└좋기야 하지. 근데 돌려 받고 싶으면 모스크바 아트페어 나오라잖아.

└그거 나가는 게 그리 힘든 일이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잡으려고 여는 축제임. 세계 여론이 안 좋으니까 훈이 같은 작가 초청해서 문제 없다고 국민들 속이려는 거라고.

└씨알도 안 먹힐 말 하는 거 보면 모르겠냐. 한국하고라도 수교 다시 하고 싶다는 말이지.

└훈이가 나갈 리 없음.

└근데 어차피 러시아가 뭘 하든 우리랑 크게 상관없지 않나? 우리는 그냥 문화재 돌려받으면 되잖아.

└?

└신박하게 미친놈일세

└어그로임. 무시해.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국보급 문화재라며.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준다고 할 때 받는 게 맞잖아.

└그래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전범국 정치선전에 어울리라고?

└손해는 감수해야지. 고훈도 앙리 마르소한테 문화재 돌려주라고 했다며. 앙리 마르소가 손해 본 건 생각 안 함?

└쟤가 말은 이상하게 해도 이해는 된다. 우리나라가 유출된 문화재가 너무 많고 소실된 것도 많아서 저런 거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하긴 함.

└얘들이 미친 거야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거야?

└생각이 다른 거겠지. 근데 진짜 이해 안 된다.

차시현의 우려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가 국보급 문화재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을 공개하면서 대한민국 내부에서 조금씩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

먼 유럽 국가의 일보다 문화재 보존과 환수에 더 큰 가치를 둔 이들이 있는 탓이었다.

“고훈 작가와 가깝지 않으십니까. 해송 선생과도 막역하시고. 그러니 어떻게 말이라도 전해주십사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문화재 환수 재단 이사가 장미래를 찾아왔다.

“돌아가세요.”

장미래가 단호히 거절했다.

“작가님도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아시잖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그럴 생각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으나 이미 그녀의 눈은 경멸로 가득했다.

재단이 정말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앞에 두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최근 문화재 환수 재단의 행태는 여러 이권이 개입되어 보였다.

재단의 성과,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따진 것이었다.

장미래가 완고히 나서자 재단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만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화재 환수 재단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장미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이러할진대 고훈은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텐데.’

장미래가 기사를 찾았다.

러시아가 또 다른 국보급 문화재를 반환할 계획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 * *

1)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OO년(미상)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청자상감운룡문매병(작성자:미상)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 www.museum.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한국-고려 시대 물품.

출토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장품번호 본관13688

첨부한 청자상감운룡문매병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반 고흐 황금시대>에서 언급하는 청자상감운룡문매병의 외형 이해를 돕기 위한 시각 자료일 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물품과는 다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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