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2화
Golden Age
4. 황금이 녹아내린 땅(2)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아무도 응하질 않아?”
러시아 연방 문화부 장관 로만 페시코프가 소속 공무원과 모스크바 아트페어 조직위원회를 문책했다.
개중에는 선전식이나 다름없는 행사에 누가 참여하겠냐고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로만 페시코프의 심기를 거슬러 홍차를 마시고 싶은 이는 없었다.
“대통령께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하냔 말이야!”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꾸짖자 모스크바 아트페어 조직위원회의 위원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건을 조절해 다시 제안하겠습니다.”
“어떤 조건.”
위원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연방 문화부가 미술가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더 이상 수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수료 면제, 100만 유로 지급 등은 분명 파격적인 조건이었으나.
그들이 초청한 미술가들은 10만, 100만 유로를 더 얹어준다고 해서 입장을 바꿀 이들이 아니었다.
첫 번째 후보였던 앙리 마르소는 프랑스 최고 부자로 손꼽혔고.
두 번째 후보 고훈은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면서도 부와 명예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 후보였던 프란시스코 미로는 스페인 제일가는 예술인이면서 정치적인 일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쯧쯧.”
위원장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은.”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세상에 미술가가 그놈들뿐이냐고. 그놈들이 안 온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야 할 거 아냐!”
사람들이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장관의 말대로 후보는 많았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 일본의 하라 요시토모, 한국의 고수열, 장미래 또한 앙리 마르소, 고훈에 준하는 대가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고 돌아온 답은 하나같이 거절이었다.
“왜 말이 없어?”
“고수열은 활동을 접었다며 거절해 왔습니다.”
“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러시아를 강력히 비판한 장미래는 너무 웃겨서 답장을 못 보내겠다는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고.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항상 대척점에 있었던 영국의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재 국가의 선전 행위에 어울릴 마음이 없다는 날선 비판을 보내왔다.
박애주의자 하라 요시토모는 정중한 문장을 보냈으나 그 내용은 분명한 거절이었다.
상황을 대강 눈치챈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대통령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자꾸만 떠올랐다.
이번엔 본인 차례임을 직감한 로만 페시코프 장관은 어떻게든 모스크바 아트페어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어야 했다.
전쟁 전부터 반전 시위를 벌이고, 지금도 우크라이나에게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을 묵살하여 대통령의 위대함을 알려야만 했다.
로만 페시코프 장관은 거듭된 수면장애와 불안증세를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명 초청하자면 누구야.”
“예?”
“한 명이면 돼. 지금 제일 영향력 있는 한 사람.”
로만 페시코프 장관은 여러 사람에게 돌아갈 예산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1,000만 유로에 근접하는 예산을 모조리 제시하면 누구라도 거절하기 힘들 거라는 계산이었다.
문화부 소속 공무원과 아트페어 조직위원들도 장관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곧 의견을 내놓았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적격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 둘을 제외할 순 없습니다.”
인지도와 영향력도 특출하나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이미지가 중요했다.
어디에도 협력하지 않는 고고한 예술가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가 협력한다면 분명 러시아 국민들도 생각을 달리할 터였다.
전 세계를 해바라기로 물든 고훈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화와 사랑을 전파한 그가 협력한다면 우크라이나 침략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붙잡아.”
장관이 지시를 내렸으나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둘 모두 돈에 좌지우지될 사람이 아니었기에 1,000만 유로를 준다고 하여 과연 그들이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참가할지 의문이었다.
“장관님.”
그때 아트페어 조직위원 중 유리 아킨페프란 남자가 나섰다.
장관의 날카로운 시선에 위축된 그는 침을 삼켰다.
“뭐야.”
“외람된 말이지만 앙리 마르소와 고훈은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어쩌자고. 반대를 할 거면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야!”
“있습니다. 방법.”
로만 페시코프 장관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훈은 얼마 전 덴하흐에서 문화재를 원산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과 각국 관계자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하고요.”
“……계속해 봐.”
“현재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 한국 문화재 5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중에 일부를 반환해 준다는 조건이라면 분명 넘어올 겁니다.”
유리 아킨페프는 애초에 앙리 마르소를 섭외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누군가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제시해야 하는데.
앙리 마르소는 본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남자였다.
혹시 남몰래 원하는 게 있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반면 고훈은 최근 행보를 통해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알려져 있었다.
유리 아킨페프는 장관을 거듭 설득했다.
“골동품 몇 점으로 1,000만 유로를 아낄 수 있고 고훈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불순한 생각을 하는 놈들을 와해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겠죠.”
고개를 들고 고민하던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확인차 물었다.
“장담할 수 있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트페어를 실패하여 모조리 숙청당할 바에야 뭐라도 해보는 게 나았다.
유리 아킨페프는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맡겨주시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책상을 내려쳤다.
“책임지고 해. 차관,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 관장한테 연락 넣어.”
“네.”
국립동양박물관에게 협조하라고 지시를 넣은 장관이 유리 아킨페프를 노려보았다.
“실수 없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유리 아킨페프가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 * *
한국대학교 미술대학장직과 한국 예술인 조합장직을 내려놓고 자유의 몸이 된 장미래는 매일이 즐거웠다.
작년만 해도 만성 피로에 찌들어 작품 활동을 할 의지조차 없었는데,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다니거나 그도 아니면 침대에서 늘어져 있다 보니 창작욕이 샘솟았다.
“흐흐흥흐흥흥.”
장미래는 꽃잎을 바짝 말리고 가루를 내어 만든 안료를 물에 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부우웅- 부우웅-
핸드폰이 진동했지만 그녀는 겨우 찾은 평화를 빼앗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급한 일이면 다시 연락하겠지.
작업이 끝나면 확인해 보지 뭐 같은 생각으로 꽃잎 가루를 풀어냈다.
부우웅- 부우웅-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장미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이미 콧노래는 멈춰 있었다.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차 길게 이어진 진동이 마침내 멈추고 장미래는 다시 콧노래를 불렀다.
“안 받아요. 안 받아.”
부우웅- 부웅-
장미래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한국 예술인 조합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는 백설기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장미래가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데 전화도 안 받아!
“똥 쌌다!”
-……시원해?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사 봤어?
“난 그런 거 몰라요. 맨날 개떡 같은 얘기만 나오는데 스트레스 받게 왜 봐.”
-빨리 봐봐. 빨리.
“왜?”
-러시아 문화부라고 검색하면 돼.
장미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전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일이 떠올랐다.
“나한테 뭐라 그래?”
-그게 아니라 문화재를 돌려준다던데?
장미래가 눈을 깜빡였다.
좋은 일이긴 하나 뜬금없었다.
“갑자기?”
장미래가 스마트폰으로 러시아 문화부를 검색했다.
‘러시아 연방 문화부, 고훈에게 감사 인사 전해’란 제목의 기사가 2시간 전에 올라와 있었다.
“엥?”
러시아와 고훈이라니 접점이 전혀 없는 조합이었다.
장미래는 의뭉스러운 마음으로 기사에 접속했고 곧 미간을 찌푸렸다.
러시아 연방 문화부가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된 고훈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양국간 교류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한국 문화재 11점을 반환한다는 내용이었다.
“뭔 소리야. 훈이가 거길 왜 가. 이놈들 미친 거 아니야?”
장미래가 기사를 다 읽기도 전에 러시아 정부를 욕했다.
유명한 미술가들에게 연락을 돌린 건 알고 있었지만 고훈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을 경계했다.
그런 아이가 러시아의 정치선전에 어울릴 리 없었다.
-난리도 아니야. 상감청자랑 고려청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사실이냐고 묻더라고.
상감청자와 고려청자는 역사적 사료로서 중요한 문화재였다.
“아니. 나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문화재 반환은 분명 반길 일이나 고훈 개인에게는 좋지 못한 일이었다.
최근 있었던 <델프트의 여인> 관련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부담이 컸다.
그동안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활동했던 일이 모두 허사가 될 수 있었다.
-내 생각도 그런데 혹시 문화재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얘기하지 않았을까?
백설기의 추측에 장미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안 돼.”
-이번에 문화재 반환하자는 담론이 훈이 덕분에 시작되었잖아. 책임감 같은 거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
“…….”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책임감이 강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논란에서도 소신을 지켜온 아이였다.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금 얼마나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는 뻔했다.
장미래 본인 역시 그러했으니.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고훈이 설사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도 고수열과 방태호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장미래는 뭔가 일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설기야, 끊어 봐.”
-훈이하고 얘기해 보게?
“어. 나중에 연락할게.”
장미래가 서둘러 통화를 끊고 고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흐르고 고훈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응답했다.
-이모?
“훈아, 너 모스크바 아트페어 나가?”
-…….
대답이 없자 장미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똑바로 말해. 진짜야? 진짜 나가기로 했어?”
-새벽부터 무슨 말이에요. 거길 왜 나가요.
“아니야?”
-몇 시지. 지금 5시 40분이에요. 이따가 얘기해요.
“러시아 문화부가 아트페어에 참가해서 너한테 고맙다고 하던데?”
-……제가요?
“응. 혹시 문화재 돌려준다는 것 때문에 그래?”
-문화재?
“러시아 국립동양박물관에 있는 문화재 반환한다고.”
-돌려준대요?
“어?”
-좋긴 한데. 왜요?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