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25화 (42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1화

Golden Age

4. 황금이 녹아내린 땅(1)

레나 자고예프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빨간 눈썹 아래 빛나는 하늘색 눈이 닫힐 때, 그녀가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알아요.”

체념한 목소리다.

“이번 모스크바 아트페어는 이름만 국제 행사고 사실은 국내 여론을 응집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러시아가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러시아의 승전을 자축하는 그림을 내놓고, 그것이 성황리에 판매되면서 자국민들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이 정당한 일이었다고 알리려는 수작이다.

“그러니 이런 걸 보내면 나도 아버지도 무사하지 못하겠죠.”

자고예프가 <키예프에서 키이우>를 천으로 덮었다.

괴로워하는 표정과 처음으로 국제 행사에 초청받았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겹쳐서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내게도 제안이 왔어요.”

자고예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0만 유로를 줄 테니 작품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판매 수수료도 받지 않겠다고.”

다른 때라면 고민하지 않고 응했을 조건이다.

“물론 거절했고요. 당신 생각대로 해주지 않겠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그러진 못했네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히.”

“네. 그러니 자고예프 씨도 그럴 수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히틀러 수염을 단 러시아 대통령 그림을 전시해 통렬히 비판하고 싶을 거다.

그러지 못해 예술가로서의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그것을 자책하고 있을 자고예프를 위로하고 싶다.

그러지 않다고.

“참가하지 않는 것도 저항이에요. 도망치는 일도 한심한 일도 아니에요.”

자고예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 한 마디 말로 저 분함이 어찌 가실까.

화가로서는 자기 꿈을 펼칠 기회를 상실했으며, 러시아인으로서는 자국의 현 상황에 통탄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적어도 본인만은 탓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건넨 말이다.

자고예프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동안 가만히 분을 삭이는 듯했다.

“Ебанат.”1)

나지막이 읊조린 러시아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이니 굽어 살피시옵소서라든가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같은 뜻이리라.

자고예프가 숨을 한번 크게 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었어요?”

“네?”

“Ебанат?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

자고예프가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힘들 때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힘내자 같은?”

좋은 말이다.

“또 기회가 올 거예요. 자고예프 씨라면 분명 그럴 거예요.”

“고마워요.”

웃어 보이고는 작업실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날 불러세웠다.

“2주 만에 만났는데 벌써 가요?”

그런가.

하지만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커피 마실래요?”

“일할 때 아니면 안 마셔서.”

“그럼.”

자고예프가 자기 작업실을 둘러봤다.

“빔프로젝터 샀는데.”

“멋지네요.”

대화가 끊겼다.

왠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했다.

“과제 멋지더라고요. 벽지 업체에 보여줬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기뻐할 줄 알았는데 자기 일 아닌듯 고개를 끄덕인다.

뭘 해야 좋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지만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색하기도 하고 눈치없이 계속 있으면 작업이나 공부하는 데 방해도 되니 아쉽지만 가봐야겠다.

“그럼.”

“저기.”

밖으로 나서려고 하는데 자고예프가 또 날 불러세웠다.

“붓이 망가졌는데.”

“……?”

“작업하다가 깜빡하고 졸아서. 그대로 굳어서.”

“큰일이잖아요. 어디 있어요?”

자고예프가 붓통을 마구 뒤졌다.

내게 붓이 망가졌다고 할 정도면 아끼는 물건일 텐데, 그걸 어디 두었는지도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모스크바 아트페어 일로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여기.”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니에요. 잘 보세요. 여기가 뻣뻣하잖아요.”

봐도 잘 모르겠어서 좀 더 살피니 3유로 정도 하는 저가형 브랜드에서 나온 물건이다.

이 정도면 물감 제거제로 닦아내기보단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자고예프의 태도로 보아 아끼는 붓 같다.

“클리너 있어요?”

“아니요.”

작업실에 클리너도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정신이 없었나 보다.

그래도 함께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다.

“그럼 사러 갈까요?”

자고예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클리너만 사러 나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게 되었다.

자고예프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가려던 차, 문득 앙리를 만나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파리로 돌아온 지 꽤 되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소원했고, 도움도 받았으니 인사도 하고 미셸과 베르나데트도 볼 겸 집으로 찾아갔다.

“훈아.”

“잘 지냈죠? 베르도 잘 있었어?”

“응!”

베르가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는 말을 제법 알아듣고 간단한 대답도 하니 시간이 참 빠르다.

“들어와.”

응접실 테이블에 선물로 산 과일 바구니를 올려두었다.

“자두네?”

앙리와 미셸이 미라벨 자두를 좋아해서 가져왔는데 표정을 보니 잘 고른 듯하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고마워요.”

“고맙긴. 잘 먹을게.”

미셸이 고용인을 불러서 자두를 씻어달라고 부탁했다.

“앙리는요?”

“미술관에 있을 거야.”

“이 시간에요?”

시계를 보니 밤 8시가 넘었다.

“요새 바쁘거든.”

“무슨 일 해요?”

“반환할 품목 확인해야 하니까. 2주째 그러고 있어.”

“아.”

하긴 워낙 중요한 일인 만큼 직접 확인하는 게 맞겠다.

서류더미에 파묻힌 앙리라.

그런 희귀한 장면을 놓칠 순 없다. 당장 내일이라도 구경 가야겠다.

“씨몽 협회장하고는 어때요?”

“그대로야. 이쯤 되면 서로 화해했으면 좋겠는데 앙리는 일 핑계 대고 셰바송 씨는 민망해하는 것 같고.”

<델프트의 여인>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서먹서먹한 것 같다.

프랑스 예술계를 개혁한 동지이자 오랜 친구 사이가 그렇게 되니 마음이 안 좋다.

“괜찮아질 거예요.”

“내 생각도 그래. 30년을 함께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미셸이 베르나데트한테 자두를 작게 잘라 먹여주었다.

미라벨은 여러 자두 품종 중에서도 유독 단맛이 강한데, 베르나데트도 엄마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아주 좋아한다.

눈을 휘둥그레 뜨곤 두 팔을 붕붕 휘두른다.

“아무튼 정말 고생했어.”

미셸이 <델프트의 여인>과 관련되었던 일을 언급했다.

“이상하게 흐를 수 있었는데 네 덕에 잘 풀렸어. 도리어 내가 더 고맙더라.”

미셸은 프랑스가 저지를 뻔한 잘못을 돌이켜 세워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거의 한 달이나 걸렸으니까. 작품 활동하기에도 바쁠 텐데. 그러고 보니 개인전 안 연 지 꽤 되지 않았어?”

“네. 계속 그리고는 있는데 조금 더 모아보려고요.”

“네 신작 보고 싶다고 난리더라.”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서두르면 안 하니만 못 한다고 생각한다.

시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작품을 충분히 쌓아서 밀도 높은 전시회를 갖고 싶다.

그런 말을 전하니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도 그런 생각이더라구.”

앙리도 중간중간 한 작품씩 공개했지만 전시회는 3년째 열지 않았다.

그동안은 자화상으로 가득했지만 다음 전시회는 베르나데트로 가득할 걸 상상하니 팬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그럼 슬슬 일어날게요.”

“더 있다 가도 되는데. 조금 있으면 앙리도 올 테고.”

“아니에요. 시간도 늦었고. 베르도 봤으니 다음에 올게요.”

“그래. 언제든지 놀러와. 베르, 인사해야지.”

얼굴이 자두로 범벅이 된 베르가 손을 흔들었다.

* * *

다음 날.

앙리가 고생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아침 일찍 미술관을 찾았다.

“왜 왔어.”

“생각보다 재밌진 않네요.”

“뭐?”

2주 동안 고생한 탓에 눈 밑에 그늘이 져 있다.

“Ебанат.”

“뭐라는 거야.”

“힘내자라는 말이래요.”

앙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볼일 없으면 나가.”

“쉬엄쉬엄 해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케일 주스 가져왔어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는다.

신경 쓰지 않고 케일 주스를 테이블에 꺼내놓자 들은 체도 안 하는 것 같던 앙리가 미간을 꾹꾹 꼬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일 주스를 쭉 빨아마시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니 역시 피곤했던 모양이다.

“어때요?”

“83점 나왔어. 너, 이거 뭔지 알아보겠어? 조선 물건이라던데.”

앙리가 테이블 스크린을 켜고 문화재 이미지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케일 주스 위로 빛바랜 불상이 보인다.

“금동불상 같네요.”

“1888년에 샤를르 바라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가져왔대.”

“바라 탐사단이 가져간 건 기메 박물관에 있어야 하지 않아요?”

1888년 프랑스인 샤를르 바라가 꾸린 탐사단은 조선에서 여러 유물을 입수했다.

1892년에 바라 탐사단은 프랑스의 국립 박물관인 기메 박물관에 입수 물품을 이관했는데 그걸 마르소 가문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몰라.”

“기록이 없어요?”

“뜬금없이 영국 소더비 경매로 나와서 구입했다더군. 1908년에.”

“아.”

금동불상은 WH배움 미술관에서 여럿 봤는데 확실히 그와 유사하다.

다만 이쪽에 관련한 지식은 거의 없어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등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반환하는 기준은 뭐예요?”

이 금동불상에 한해서 마르소 가문의 잘못은 없어 보인다.

샤를르 바라가 어떻게 가져갔는지도 확실치 않고, 무슨 경위로 소더비 경매에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의심스러우니 보내는 거야.”

불법 취득이 명백한 물품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것도 포함한다라.

뒷이야기가 없도록 철저하게 다루는 듯하다.

그럼에도 118,000여 점 중 83점만 나왔다는 건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담아주려고 손을 드니 앙리가 날 노려보았다.

물 수도 있으니 참도록 하자.

“어제 집에 다녀갔다며.”

“네. 인사하러요. 고마워요.”

“너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니야.”

“그래도요.”

앙리가 케일 주스를 비웠다.

“돌아가. 바빠.”

“그럴게요. 무리하지 말아요.”

일어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다른 소식은 없어?”

“무슨 소식이요?”

“뭐 있잖아.”

딱히 생각나는 일은 없다.

“아, 모스크바 아트페어 초청받았는데 거절했어요.”

“그딴 걸 왜 나가. 그런 거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될 텐데 자꾸 말을 돌린다.

“혹시 씨몽 협회장 궁금한 거예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런가 보다.

“만나게 되면 안부 전해줄게요.”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니 꼭 전해줘야겠다.

* * *

1)사람을 욕할 때 사용하는 말. 한국 시발놈과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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