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9화
Golden Age
3. 대화(3)
“말도 안 돼!”
자택에서 온라인 중계를 지켜보던 루이 갈렌이 소리쳤다.
<델프트의 여인>이 마리아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이어야 했다.
수백, 수천만 유로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어야 했다.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 나아가 전 세계가 탐낼 만큼 역사적인 문화예술품이어야 했다.
“뭔가 잘못 됐어. 잘못 됐다고!”
흥분한 루이 갈렌은 쥐고 있던 와인잔을 거칠게 내려놓고선 고훈과 마이리츠하이스 미술관의 분석 자료를 살폈다.
<델프트의 여인>과 <햇빛이 드는 창가>의 콘트라스트 결과가 완벽히 일치하며 <햇빛이 드는 창가>가 명백히 마리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내용이었다.
분명 확인했건만 믿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럴 순 없지. 그래. 조작. 조작이야. 이 빌어먹을 놈들이 내 작품을 모함하는 거라고. 원본도 없는 주제에 무슨!”
순간 루이 갈렌의 시야에 <델프트의 여인> 콘트라스트 검사 결과지가 들어왔다.
검증인란에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루브르?”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루브르가 내 허락도 없이 저걸 보냈다고?”
욕심에 눈이 먼 루이 갈렌으로서는 루브르 박물관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고훈이 모두 한통속처럼 보였다.
루이 갈렌은 <모나리자>의 비밀을 발견한 장본인이자 <델프트의 여인> 매입가를 정하기로 내정된 앙드레 페니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예. 대표님. 루이 갈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고훈이 제시한 근거는 날조되었습니다.”
-날조요?
“날조입니다. 애초에 루브르 박물관이 콘트라스트 결과를 마우리츠하이스에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일이라면 씨몽 협회장과 롤랑 관장이 장관님 동의를 구하고 진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더 용건이 없으면 끊겠습니다.
“자, 잠시만.”
루이 갈렌이 앙드레 페니코를 애타게 불렀으나 통화는 두절되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안내음만 반복될 뿐 연결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루이 갈렌이 탁자를 내려치는 바람에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샤토 르 팽 뽀므롤이 흔들렸다.
루이 갈렌은 다급히 잡으려 했으나 병은 이미 쏟아져 와인을 토해내고 있었다.
* * *
<델프트의 여인> 진위여부 검증 결과 발표회로 시작된 행사는 어느덧 <햇빛이 드는 창가> 감상회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온라인 중계를 지켜보던 미술 애호가들에게 더 이상 <델프트의 여인>을 누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햇빛이 드는 창가>에 가득한 그리움과 원망, 애정을 느끼며.
마리아 베르메르가 어떤 심경으로 그림을 그렸는지에 집중했다.
└슬프다 ㅠ
└그러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에 채워넣을 수 있는 게 빛밖에 없었다는 거 아니야.
└근데 그걸 표현할 기술은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거라니까.
└훈이가 그림 보는 시선이 따뜻해서 좋다. 별 생각 없이 봤을 것 같은데 설명 들으니까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짐.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음. 훈이가 마리아 베르메르를 이해하듯이 우리도 훈이랑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함. 그게 예술임.
└창문 하나 그려진 그림 하나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걸까.
└ㅋㅋㅋㅋㅋ빛 저렇게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님. 창문 하나 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절대 아니야.
└ㄹㅇ 저렇게 그리려면 얼마나 힘든데.
└아닠ㅋㅋㅋㅋ 난 저걸 한 달 만에 밝혀냈다는 게 넘 신기한데?
└다들 훈이가 사비 들여서라도 검증 이어간다고 했을 때 뭔가 있으니까 하겠지 했는데 진짜 대어 낚아 왔음.
└근데 이제 델프트의 여인은 어떻게 됨?
└그러게?
└마리아 베르메르가 아버지 작품을 이어서 그린 거니까 그 가치는 있지.
└ㅇㅇ 근데 프랑스에서 국보로 지정할 정도는 아닌 듯.
└[링크] [프랑스 문화부, “델프트의 여인은 심의 중”]
└저게 무슨 말임?
└무슨 말이긴ㅋㅋㅋㅋㅋㅋ 자기들은 원래 국보로 지정할 생각 없었다는 거지ㅋㅋㅋㅋㅋㅋ
└저러다가 그냥 심의 통과 못 했다고 발표할 듯
└어엌ㅋㅋㅋㅋㅋ
└프랑스가 생각이 있으면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품도 아닌데 네덜란드랑 분쟁 겪으면서까지 국보로 지정하진 않겠지.
└난 좀 그렇다. 마리아 베르메르도 잘 그리는데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품 아니라고 갑자기 가치가 낮아지는 게.
└어쩔 수 없지. 화가 명성이 작품 가격을 정하니까.
└ㄴㄴ 네덜란드한테는 엄청 귀중한 작품임.
└<햇빛이 드는 창가>처럼 마리아 베르메르 고유 작품이면 몰라도 아버지 작품 오마쥬한 거라 어마어마한 가치는 없다는 거임. 분명 가치 있는 작품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하고 관련 있으니까.
└그럼 루이 갈렌이 로또 맞은 건 변함없네?
└ㅋㅋㅋㅋㅋㅋㅋ?
└[링크] [네덜란드 정부, 문화재 부당거래 혐의로 루이 갈렌 고발]
└읭?
└문화재인 걸 알면서도 사실을 은폐하고 부당한 거래를 했으니까 고발 엔딩이지ㅋㅋㅋ
└프랑스가 자국민 고발했는데 가만있어? 국보로 지정하려고까지 했잖아.
└상황이 달라졌지.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품이라면 돈 생각에 뻔뻔하게 굴겠지만 이 상황에서 루이 갈렌 감싸면 어떻게 될까?
└수백 억 갑부될 수 있다고 상상하다가 범죄자 됐네
└근데 이거 언제 끝나? 3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남았을걸? 네덜란드가 훈이한테 훈장 수여한다고 했음.
└훈장?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이라고 민간에 주어지는 최고 훈장임.
└헐 그럼 막 국빈 대우 받고 그런 거임?
└ㅇㅇ
<델프트의 여인> 검증 과정을 설명하고 마리아 베르메르를 알리기 위한 행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3시간에 걸친 긴 설명회 동안 프랑스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발빠르게 나섰고 미술 애호가들은 그런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네덜란드 내무부장관 시흐리트 하리가 마이크 앞에 섰다.
“오늘 우리는 그동안 네덜란드가 잊고 있었던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시흐리트 하리 장관이 고훈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고훈 교수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영 그녀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네덜란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훈 교수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시흐리트 하리 장관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네덜란드는 신과 네덜란드 왕, 오라녜나사우 왕자, 룩셈부르크 대공 그리고 네덜란드 의회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되찾아 준 예술가, 교수, 쇼콜라티에 갤러리 이사 고훈께 존경을 표합니다.”
고훈이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앞으로 나섰다.
“감사합니다.”
시흐리트 하리 장관이 다시금 인사했고 고훈은 민망한 듯 쓰게 웃었다.
“2038년 6월 2일. 시흐리트 하리내무부장관이 네덜란드 정부를 대리해 고훈 교수께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을 수훈합니다.”
시흐리트 하리 장관이 고훈의 가슴 주머니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다.
발표회에 참석한 모든 이가 기쁜 마음으로 축하했으며 고훈은 멋쩍게 웃으며 감사패를 들어 보였다.
시흐리트 하리 장관이 자리를 피해주고.
고훈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3시간이나 떠들고 내려왔는데 또 뭔가를 얘기하라고 하시니까 좀 민망하네요.”
청중들이 작게 웃었다.
고훈이 설명회 도중에도 간간히 목소리가 잠겨 물을 찾은지라 그의 표정이 썩 내키지 않은 이유를 목이 아프기 때문으로 여겼다.
“짧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청중도 중계를 지켜보는 시청자도 고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놓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여기 덴하흐.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있는 곳이죠. 영어로는 헤이그라고 하고요.”
“이런 벌써부터 길어지겠군.”
고수열이 기나긴 연실을 앞두고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내뱉었다.
발표회에 참석한 이들은 그에 크게 공감해 소리내어 웃었고 고훈도 민망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위기가 수습되고.
고훈은 이번 일을 겪으며 느낀 생각을 풀어냈다.
“우리나라. 한국인이 덴하흐를 처음 방문한 기록이 있어요. 1907년 6월 24일에서 25일 사이였는데 이런 기록이 왜 남아 있는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신가요?”
고수열과 김지우를 제외하고 초빙객 중에서 고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조선, 대한제국은 자국이 어떤 상황인지 알리고자 특사를 파견했어요. 일제에 강제 병합되기 직전이었거든요.”
세미나실을 찾은 많은 이가 조선과 일본 제국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훈이 꺼낸 말이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그때 특사로 온 이위종이란 분이 윌리엄 스테드란 분하고 나눈 인터뷰가 있어요. 잠시 읽어드릴게요.”
고훈이 미리 준비한 메모지를 꺼냈다.
“스테드가 이위종에게 묻습니다. 왜 만국평화회의에 파문을 만들려고 합니까. 이위종이 대답합니다.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
고수열이 눈을 감았다.
김지우는 차분히 고훈의 모습을 눈과 귀에 담았다.
“스테드가 말합니다. 만국평화회의는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조약을 맺었다고요. 이위종이 말합니다. 조약이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것이라면 1905년에 조선과 일제가 체결한 조약은 조약이라고 할 수 없다고요.”
고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읽었다.
“스테드가 말합니다. 하지만 일본에겐 힘이 있습니다. 이위종은 대답합니다.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이라면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를 말해도 무슨 소용입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법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왜 말하지 않습니까.”
고훈이 메모지를 내려놓고 정면을 보았다.
“우리나라는 개화기에 일본과 여러 나라에 의해 문화재를 강탈당했습니다.”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오스트리아인, 스페인인, 체코인, 헝가리인 등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찾아온 듯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는 그의 첫 번째 조국이기도 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유럽은 오래 전부터 부당하게 취득된 문화예술품을 원산국에 돌려주자고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 끝에.
사람들은 고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고 그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 니클린 교수는 아직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모든 분쟁은 문화제국주의에서 비롯된다고요.”
누군가 박수를 보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동의하여 결국 세미나실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최근 프랑스에서 아주 바람직한 일이 시행되었죠. 앙리 마르소가 본인 소유의 문화예술품 중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된 것을 본국에 반환한다고 정한 일이요.”
고훈이 씩 웃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프랑스와 같은 일이 널리 공감을 얻길 바랍니다. 서로의 아픔을 달래고 앞으로 더 나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요.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이 연설을 마치자 김지우가 벌떡 일어나 머리 위로 손뼉을 쳤다.
고훈은 싸우지 않는 법을 알았다.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려는 프랑스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정 운동을 언급하며 그와 함께 동조해 달라고 호소했다.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자고 말했던 이들은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면서도 한없이 부끄러웠고.
프랑스는 앙리 마르소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미술 애호가들은 고훈이 남긴 말을 깊이 새겼다.
긴 싸움이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