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8화
Golden Age
3. 대화(2)
2038년 6월 2일.
전 세계 미술계 유력 인사들이 초청을 받아 네덜란드 덴하흐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을 찾았다.
“고수열 경 아니십니까.”
영국의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이 고수열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베이컨 경.”
악수를 나누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얼굴 뵙기가 힘들어서 걱정했는데 안심했습니다. 여전하십니다.”
“내 너무 반가워서 힘이 좀 들어간 모양입니다.”
“더 반가웠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하하핫!”
두 사람은 농담과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누가 온 모양입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미술관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고수열과 프랜시스 베이컨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눈에 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네덜란드 내무부 장관 시흐리트 하리였다.
“하핫. 고훈 작가에게 훈장을 준다더니 오늘이었나 보군요.”
“훈이는 질색을 하던데.”
“질색이요?”
“부담스러워서 그런가 봅니다. 상 같은 걸 꺼리는 아이라.”
“그래서 베니스 비엔날레 이후로 미술제에 참여하지 않았군요. 이번 모스크바 아트페어에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고수열이 작게 웃었다.
대규모 미술제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공공예술을 하고, 개인전을 여는 데 집중하는 손자를 지지했기에 별달리 덧붙일 말이 없었다.
“내무부장관까지 오고. 아무래도 오늘 고훈 작가가 델프트의 여인과 관련해서 뭔가를 발표할 것 같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넌지시 물었다.
<델프트의 여인>을 조사하던 고훈이 네덜란드로 향한 지도 2주가 넘었다.
미술계는 오늘 고훈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델프트의 여인>의 진위 여부를 발표하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예. 재밌을 거라고 합디다. 한데 이 녀석이 제 할애비한테도 숨기니 알 수가 있나요.”
“그러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 맞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건 잘된 일입니다만 이거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겠습니다. 프랑스가 놓칠 리 없을 텐데.”
“흐음.”
루브르 박물관이 <델프트의 여인>을 사실상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인정한 지금.
그를 둘러싼 진위 여부 논쟁은 고훈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갈등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는데.
고훈이라는 강력한 발언권자가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인정하지 않은 탓에 양국 모두 사태를 관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데 오늘 고훈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인정한다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정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내빈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지정된 좌석에 자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 시작하나 봅니다.”
“또 인사 나눕시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인사를 나눈 고수열이 본인 자리를 찾았다.
“사람을 이렇게 불러 모은 걸 보니 고 교수가 뭔가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듣자 하니 루브르가 콘트라스트 검증 결과를 마우리츠하이스에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아마 진품이지 않겠습니까.”
행사가 시작되기 전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델프트의 여인>에 관련한 대화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루이 갈렌은 안 보이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오겠나.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마 집에서 보고 있겠지.”
“그도 그렇구만. 아무튼 참 부럽네. 대체 보상금을 얼마나 받을지 모르겠어.”
이미 프랑스 문화부에서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 심의 과정에 올리기도 했으니.
모두 <델프트의 여인>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흐음.”
고수열이 강단에 오르는 손자를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고훈이 인사하자 모든 이가 박수로 화답했다.
“저는 최근 한 달간 루이 갈렌 씨가 델프트시에 주재한 잡화점에서 발견한 작품 델프트의 여인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자 조사를 이어나갔고 얼마 전 그 답을 찾았습니다.”
답을 찾았단 말에 미술계 인사들이 반색했다.
“이 과정에서 함께해 주신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과 도움을 주신 벤자민 데이비스 교수, 요니 크라머르 씨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세미나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이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과 고훈에 의해 공식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슴 설레며 결과를 기다리는 이들을 지나쳐 고수열과 눈이 마주쳤다.
고수열은 손자를 응원하고자 고개를 끄덕였고 고훈은 이내 입을 열었다.
“루이 갈렌 씨가 발견한 델프트의 여인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 아닌 모작임이 밝혀졌습니다.”
고훈의 발언에 좌중이 술렁였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발쳤다.
“지금부터 델프트의 여인을 어떻게 검증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앙 스크린에 고훈이 요약한 내용이 비쳐졌다.
“루브르 박물관과 협력해 조사한 결과 델프트의 여인에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는 모두 17세기 무렵에 사용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모델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닮은 점, 화풍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유사했기에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고훈이 PPT 화면을 넘겼다.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속눈썹이 <델프트의 여인>에서도 발견되었단 증거 사진이 비교되어 있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속눈썹이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기에 델프트의 여인이 누구의 작품이든 17세기에 그려진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보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활동할 당시 그는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몇몇 후원자만을 상대했죠. 때문에 17세기에 그의 작품을 모방할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고훈이 여지를 남겼다.
“위와 같은 이유로 델프트의 여인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추론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죠.”
중앙 스크린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델프트의 여인>을 나란히 비추었다.
“동일 인물로 추측되는 이 여인은 두 작품 사이에서 약 10년 정도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사망한 연도 부근에 그려졌다는 뜻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 여인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에게 특별한 존재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인과 베르메르가 밀월 관계는 아니었는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아내를 목숨을 걸고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르메르 부부는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15명의 자식을 두었고요. 그 때문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사실 장녀 마리아 베르메르 또는 후원자의 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고 이는 이번 검증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중앙 스크린에서 <델프트의 여인>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가 채웠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배경이 사실 녹색 커튼이었단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여기에 주목했고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에서 녹색 커튼이 있는 방을 주목했습니다.”
내빈들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이 방에는 값비싼 테이블보가 놓여 있습니다. 소녀의 복장으로 봤을 때 베르메르 가문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사용한 방임을 알 수 있었죠. 한데 얼마 전 이 그림이 누군가에 의해 수정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고훈이 큐피트를 발견한 드레스덴 미술관 관장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수정된 시기는 그림이 완성된 이후 수십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 일이 가능했던 사람은 베르메르 사후 그의 작품을 관리했던 그의 가족이었죠.”
고훈이 물로 목을 축였다.
“누가 왜 이 벽에서 큐피트를 사라지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이 장소를 다룬 또 다른 작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델프트의 여인>에 이어 또 다른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순간이었다.
회장이 또다시 술렁였고.
이제 사실을 밝힐 차례였다.
고훈은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요니 크라머르를 보며 말했다.
“델프트의 여인을 보관하고 있던 크라머르 잡화점에서 발견했고. 우리는 이 작품을 햇빛이 드는 창가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마우리츠미술관 직원 둘이 마리아 베르메르의 <햇빛이 드는 창가>를 무대 위로 옮겼다.
중앙 스크린에 비친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과 정확하게 동일한 공간이었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술계에 종사해 온 이들이기에 방을 가득 채운 빛과 그 기법을 이해한 덕이었다.
“이 작품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유일한 제자이자 장녀 마리아 베르메르의 작품입니다.”
PPT가 넘어갔다.
그림 하단에 마리아란 이름이 적혀 있는 점, <델프트의 여인>, <햇빛이 드는 창가> 등 몇몇 그림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과 미묘하게 콘트라스트 결과 값이 다른 점이 설명되어 있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사망하고 그의 가족은 막대한 빚을 짊어졌습니다. 당시 기록에도 남아 있듯 아내와 딸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판매하고자 노력했죠.”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설명을 들을수록 딸 마리아 베르메르가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수정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팔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바가 사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델프트의 여인이 딸의 모방작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모방작이라고 해야 할지. 헌정작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판매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을 익히려고 했던 걸 수도 있죠.”
“델프트의 여인이 마리아의 작품이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앞서 델프트의 여인과 햇빛이 드는 창가 등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질문에 답변한 고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조사팀은 이 두 작품이 마리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증거를 여럿 발견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크라머르 잡화점에 있었습니다.”
고훈이 델프트시 기록 보관소에서 찾은 크라머르 가문의 가계도를 보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장녀 마리아 베르메르는 1674년, 델프트에서 실크 상인의 아들이었던 힐손 크라머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힐손 크라머르는 요니 크라머르 씨의 13대조임이 밝혀졌죠.”
모든 단서가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세미나실에 참석한 전원이 요니 크라머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극도로 긴장한 요니 크라머르는 비닐봉투를 입에 대고 숨을 가쁘게 내쉬고 들이마시길 반복했다.
“이제 이 그림이 달리 보이실 겁니다.”
고훈의 목소리에 청중들이 시선을 옮겼다.
무대 위의 <햇빛이 드는 창가>는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유했던 시절은 과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28,829길더라는 막대한 빚만 남았죠.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이 방처럼요.”
고훈은 뒤돌아 <햇빛이 드는 창가>를 살폈다.
“아마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다정했던 아버지가 그리웠을 겁니다. 붓 잡는 법을 알려주고 물감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빛을 보는 시야를 전해준 아버지를요.”
고훈이 다시 청중을 향해 섰다.
“마리아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은 그녀가 화가로서 남긴 유일한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린 것도 아닌.
그러므로 작품을 팔려던 것도 아닌 오직 화가 본인의 의지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었다.
과장되지도 격앙되지도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해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서, 아버지가 살아 계셨단 증거로, 마리아 베르메르 본인이 그 계승자라는 의미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곳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을 가득 채웠습니다.”
고훈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
세미나실을 찾은 이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나누곤 마침내 입을 뗐다.
“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