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7화
Golden Age
3. 대화(1)
“끝!”
델프트시 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 만에 힐손 크라머르가 요니 크라머르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와 한스 박사,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직원 둘이 있었는데도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낸 사람은 차시현이었다.
녀석이 후련하다는 듯 기록 보관소 바닥에 들어누웠다.
“고생했어. 글도 못 읽으면서 어떻게 찾았대?”
“이제 읽을 수 있어.”
“뭘?”
“네덜란드 글.”
차시현이 자신있게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학업 성취도가 높았고 영어와 불어도 빨리 익혔다곤 하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응.”
“그럼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1943년에 델프트 공대 교수들이 직권을 발휘해서 나치 충성 서약에 반대한 학생들에게 교과 이수 자격을 주었대.”1)
“뜻은 맞는데. 한국말이잖아.”
“발음은 몰라.”
“아.”
단기 속성이라 그런 듯싶다.
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록을 이해하고자 사전을 찾아보며 독해 능력만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럼 적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재는 천재다.
나도 언어에는 자신있지만 고작 일주일 만에 새로운 언어를 쓰고 이해하진 못한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직원들에게 잔업을 주문한 한스 박사가 다가왔다.
“박사님도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최근 10년간 이렇게 즐거운 적은 없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했는데도 한스 박사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했다.
“점심은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정말요?”
“그럼요. 어서 가시죠. 차 씨도 가시죠. 오늘은 여쭤볼 게 많습니다.”
한스 박사가 웃으며 말하자 차시현이 따라 웃었다.
이해하고 웃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한스 박사와 함께 지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았다.
영화관 근처 번화가에 있는 중식당이었는데 규모가 제법 크다.
“내가 주문할래.”
자리를 잡고 앉자 차시현이 의욕을 냈다.
그동안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 무슨 음식을 파느냐 같은 기본적인 일상회화도 되지 않았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무슨 음식을 먹을지 고민한 끝에 힘차게 메뉴판을 내려놓는다.
“안 되겠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데 갈까?”
“음식은 어떻게 주문해?”
“어?”
“그보다 여기 적힌 단어 다 처음 봐. 이건 뭐야?”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은 이해하면서 막창야채볶음이란 단어는 모르는 걸 보니 단기 속성 공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다.
파리로 돌아가면 학생들이 기본 지식을 천천히 익힐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조정해야지 싶다.
“막창이랑 야채를 볶은 요리래.”
“어……. 이건?”
“두부랑 소고기가 들어간 것 같은데. 전분 들어간 중국 요리 같아.”
“그럼 볶음 먹을래. 막창 야채 볶음.”
“그래. 적어 봐.”
“……맵게 해달라고는 어떻게 써?”
“alsjeblieft pittig.”
“야채 추가해달라는 말은?”
“그냥 주문해 줄까?”
“응.”
직접 주문하기를 포기한 차시현이 고글 번역 기능을 탓했다.
“왜 네덜란드어는 안 되는 거야.”
번역, 통역 기능이 워낙 발달해서 지금은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는 한국말로 말해도 매우 자연스럽게 곧장 통역이 되는데.
네덜란드어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고셀링크 이사님께 크라머르 씨 가계도를 보내면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셋이나요.”
음식을 주문하고 한스 박사가 반가운 말을 꺼냈다.
“셋이나요?”
“하나는 콘트라스트 검증이 끝났단 소식입니다.”
가장 기다렸던 소식이다.
“어땠어요?”
“작가님이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중 4작품이 근소한 차이로 다른 결과를 보였습니다. 햇빛이 드는 창가와 델프트의 여인을 포함해서요.”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크라머르 잡화점 창고에서 발견한 <햇빛이 드는 창가>와 <델프트의 여인>이 같은 콘트라스트 결과값을 보였단 것은.
<델프트의 여인> 또한 마리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델프트의 여인은 어떻게.”
다만 <델프트의 여인>은 어떻게 검사했는지 의문이다.
사진만으로는 힘들 거라 예상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그게 두 번째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에 파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델프트의 여인은 보낼 수 없지만 검증을 함께하자는 내용이었고 콘트라스트 검증 결과지가 첨부되어 있었죠.”
“네?”
“셰바송 씨몽 협회장이 힘을 쓴 모양입니다. 작가님의 안부를 물으셨다고 하더군요.”
“씨몽 회장이.”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고문서 틈바구니에 끼어 그럴 여유가 없었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면 이해해 주리라 믿었으나 먼저 자료를 보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놀랐어요.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작가님과 마르소 작가 덕분이죠. 정말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쑥스럽다.
“다함께 노력했는 걸요.”
나와 앙리의 행동으로 인해 여론이 형성되었어도 문화부 장관을 설득하기가 쉽진 않았을 거다.
<델프트의 여인>의 콘트라스트 검증을 끝내고도 이렇게 빨리 보내온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네덜란드로 오기 전부터 윗선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을 터.
씨몽 협회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해 둬야겠다.
“마지막으로.”
“네.”
“저희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은 이번 일의 결과 발표를 작가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데 맡아주시겠습니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작가님이 안 계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델프트의 여인>과 <햇빛이 드는 창가>에 관련한 검증 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은 이 일의 성과가 내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럴 순 없어요. 함께 연구했으니 단체명으로 발표하는 게 맞아요.”
“파리에서는 이미 검증팀이 해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급히 나서느라 공식 단체는 없었고요.”
“그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이름이라도.”
“그럴 순 없죠. 작가님의 연구 성과를 저희가 어떻게 가져가겠습니까. 그러다간 욕만 먹을 겁니다.”
“…….”
“이미 문화부에서 작가님을 위해 준비한 일이 있습니다.”
“네?”
“무슨 얘긴데?”
대화 도중에 차시현이 어떤 상황인지 물었다.
대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 인상을 쓴다.
“뭘 고민해? 그럴 거면 여태 고생은 왜 했는데.”
“그래도.”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아. 솔직히 처음부터 다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저번에 말했잖아. 모두 함께 노력한 결과라고.”
“누군가는 대표로 나서야 하는 거 아니야? 돈을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뭘 신경 쓰는지 모르겠어.”
그런가.
성과 발표회에서는 꼭 루브르 박물관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등 이번 일에 도움을 준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하하하! 이거 와인이라도 한 잔씩 마셔야겠습니다.”
연구 성과 발표를 맡겠다고 하니 한스 박사가 자기 일인양 기뻐했다.
마침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고 한스 박사는 매장에서 가장 추천하는 와인을 한 병 더 주문했다.
“그럼 많이들 드세요.”
“박사님도요.”
중식은 오랜만이라 기대가 되면서도 네덜란드에서 접하니만큼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어디.”
주문한 춘권은 겉이 바삭해서 씹을 때마다 귀를 자극했고, 안에 든 새우 살은 탱글탱글했다.
귀와 입 모두 만족스럽다.
함께 딸려 나온 소스에 찍어 먹으니 풍미가 확 살아나서 한스 박사와 차시현에게 하나씩 먹어볼 것을 권했다.
한스 박사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좋아했는데, 차시현은 본인이 주문한 음식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 반응이 없다.
“안 먹어?”
“…….”
“왜? 다른 거 시킬까?”
“아니. 그냥 막창에 브로콜리는 대체 왜 넣었을까 고민하고 있었어.”
차시현이 입을 쭉 내밀며 브로콜리를 골라냈다.
* * *
[네덜란드, 고훈에게 훈장 수여 결정]
네덜란드 의회가 26일(현지시간) 예술가 겸 파리 보자르 대학 교수 고훈에게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을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루드 쿤더스 네덜란드 정부 대변인은 고훈이 네덜란드의 보석을 찾아다 주었다며 네덜란드를 대표해 감사 인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고훈이 받게 될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은 민간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으로서 타국 예술인으로서는 처음 주어진다.
공식 발표회를 일주일 앞두고.
마리아 베르메르에 관련해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던 차에 생각지도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훈장이요?”
깜짝 놀라 되물으니 한스 박사가 크게 웃었다.
“저번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문화부에서 준비하는 일이 있다고.”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네덜란드가 작가님께 그만큼 고마워한다는 게 중요하죠.”
“자꾸 이러면 부담스러운데.”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히 받으시면 됩니다.”
대학 교수직을 맡으면서 느낀 게 있는데 감투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작업 시간이 줄어든다.
되도록 여기저기에 적을 두지 않고 싶거늘.
고맙다는 인사를 거절할 수도 없어서 난감하다.
“제가 뭐 달리 할 건 없죠?”
“그럼요. 다음 주 성과 발표식과 함께 진행하려는데 괜찮으신 걸로 전하겠습니다.”
“정말 다른 일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정말입니다. 어디까지나 감사 인사니까요. 여러모로 도움이 되실 겁니다.”
“도움이요?”
“예를 들어 네덜란드 항공사, 해운사 등을 이용하실 때 최우선으로 탑승하실 수 있고.”
먼저 온 사람이 먼저 타야지.
새치기할 순 없는 법이다.
“네덜란드에 있는 국립 시설은 모두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돈은 나도 있다.
“참. 예를 들어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면 소개도 해드립니다. 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 수훈자가 탑승하셨다고요. 성함이랑.”
“필요없어요.”
“예?”
그러지 않아도 어딜 가든 주목받아서 곤란할 때가 많은데 아주 광고를 해준단다.
“필요없어요.”
“그 네덜란드 병원에서 진료받으실 때 혜택도 있는데.”
“돈은 많아요.”
한스 박사가 몸을 뒤로 빼더니 고개를 젓는다.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네덜란드는 작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
앞으로 네덜란드를 찾을 때는 앙리에게 전용기를 빌려야겠다.
* * *
1)나치는 그들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는 대학생들이 델프트 공과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에 교수들이 나서서 충성 서약을 거부한 학생들을 보호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