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20화 (42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6화

Golden Age

2. 햇빛이 드는 창가(6)

“정말입니까!”

“이에? 그게 저.”

“몇 점! 몇 점이나!”

흥분한 한스 박사가 요니 크라머르를 흔들며 물었다.

공중에 던져 놓은 티슈처럼 나풀거리는 요니 크라머르가 가여워 한스 박사를 말렸지만 마음이 조급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크라머르 씨, 작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그게. 별로 보여드릴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한스 박사가 다급히 나섰다.

“어……. 그럼 창고로. 근데 정말 별 거 아니에요.”

크라머르가 가치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델프트의 여인>처럼 밖에다 진열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크라머르가 그림에 조예가 있었더라면 <델프트의 여인>를 그렇게 대충 놓지도 않았을 터.

크라머르는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직접 확인해야 한다.

“거기 문턱 조심하세요. 걸려 넘어지기 쉽거든요. 악!”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요니 크라머르를 따라 창고로 들어섰다.

한스 박사는 작동 중인 제습기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라서 걱정했는데 곰팡이 냄새도 나지 않고. 아주 좋네요.”

그는 기분 좋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을 찾을지도 모르니 들뜰 만하나.

설령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 없더라도 한스 박사는 개의치 않을 거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또 다른 화가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중년 남자의 해맑고 들뜬 미소에서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다는 게 믿어지십니까?”

한스 박사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요.”

“지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를 연구한 사람은 많지만 그 가족까지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거다.

오히려 내가 고마운 일이다.

“이제 쓸데없는 것만 연구한다고 구박한 놈들을…….”

“네?”

“아, 아닙니다. 하하하!”

약간의 명예욕은 연구 동기로 작용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말자.

“아, 여기 있네요.”

요니 크라머르가 천으로 덮인 캔버스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오래 보관한 작품이라 기대를 품게 된다.

“걷어 봐도?”

“네. 여기. 정말 별거 아닐 거예요.”

요니 크라머르가 한스 박사에게 그림을 넘겨 주었다.

그는 긴장을 풀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선 천천히 천을 벗겨냈다.

“……음?”

요하네스 베르메르나 마리아 베르메르를 기대하던 나와 한스 박사로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델프트의 전경을 표현한 그림인데 오래된 작품처럼 보이긴 하나 그 외에는 특징이 없다.

풍경화를 배우는 학생이 그린 느낌이다.

“어디.”

한스 박사가 그림을 자세히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서명을 찾을 수 없었다.

“이건 마리아 베르메르의 습작이라고 봐야겠죠?”

“글쎄요.”

마리아 베르메르도 처음부터 잘 그리진 않았을 테지만 화풍이 전혀 다르다.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메르에게서 배웠다면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진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배우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속단하면 안 되겠죠.”

내 생각을 전하자 한스 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시는 게 아닌가 봐요.”

전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크라머르가 나와 한스 박사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다른 작품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요니 크라머르가 또 다른 그림을 꺼냈다.

“으헥히!”

먼지가 날려서 재채기를 하는 걸 보니 대체적으로 모두 오래 보관한 작품 같다.

“……어떠세요?”

요니 크라머르가 또 한 점을 꺼내 주었지만 이 역시 앞선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작가 같지는 않고 베르메르 부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19세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서명은 있지만 처음 보는 이름이다.

“다른 건.”

“네. 잠시만요.”

그렇게 요니 크라머르는 세 점의 작품을 더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모두 확인한 나와 한스 박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점 모두 제각각이고, 서명이 없는 그림도 있으며 있더라도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베르메르 부녀와는 접점도 없어 보인다.

“어. 뭐, 뭔가 잘못됐나요?”

“아니요. 전혀요.”

크라머르가 걱정스레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받는 건 이쪽인데 자꾸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강하게 부정하고 말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스 박사가 물었다.

“크라머르 가문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작품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작가도 전부 달라 보이고.”

“그렇죠.”

“박사님은?”

“연구해 볼 가치는 있지만 이번 일과 관련된 작품은 아닌 듯싶습니다.”

역시.

베르메르 부녀를 연상시키는 다른 작품이 있더라면 일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어떡하죠. 보여드릴 만한 건 다 꺼냈는데.”

“흠.”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에요.”

“아니에요. 큰 도움을 받고 있어요. 정말로.”

깐깐한 사람이거나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면 협조를 대가로 큰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거다.

영업 시간에 이렇게까지 도와주니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베르메르 부녀의 작품을 찾긴 힘들 듯싶다.

크라머르 가문 가계도를 확인해서 검증을 이어가야겠다.

“저것도 그림 아니야?”

쪼그려앉은 채 창고 바닥에 늘어놓은 그림들을 살피던 차시현이 찬장 위를 가리켰다.

“크라머르 씨, 저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저것도 그림이긴 한데 보여드릴 만한 건 아니어서. 지금 내려드릴게요.”

차시현의 말을 전달해 주자 요니 크라머르가 벽에 기대어 놓은 사다리를 집으며 대답했다.

이젠 보여달라고 하기가 미안할 지경인데 싫은 내색 보이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돌아가기 전에 보답을 확실히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손님도 없어서 청소 말곤 할 일도 없거든요. 찾으시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저께 봤을 때도 느꼈지만 사람이 참 순하다.

“여기.”

그림을 건네받았다.

크라머르가 별거 아니라고도 했고 앞선 다섯 작품 모두 베르메르와 연관 짓기 힘든 그림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고 천을 벗겼고.

이내 말문이 막혔다.

“별거 아니죠?”

먼지 쌓인 천 속에는 300년 전 델프트로 이어진 창문이 있었다.

“그리다가 만 것 같아서요.”

크라머르가 이 그림을 왜 보여주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아니에요.”

“네?”

“가득 차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은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의 배경이다.

다만 정성스레 수놓은 테이블보도 녹색 커튼도 보석함도 없이 텅 비어 있다.

크라머르의 말대로 파란색 창틀과 하얀 벽뿐이나 나는 이 작품이야말로 화가 마리아 베르메르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자신한다.

“이 방에는 원래 빨간 커튼이 있었어요. 탁자도 있었고 방을 분리하기 위해 녹색 커튼도 달아두었죠.”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요.”

한스 박사가 거들었다.

“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남긴 빚 때문에 집안에 있던 집기를 처분했을 테니까요. 집도 팔았을지도 모르고요. 아마 그랬겠죠.”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으니 말이다.

“마리아 베르메르는 전과 달리 텅 빈 방을 보면서 그렸어요. 커튼도 테이블보도 탁자도 남아 있진 않지만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을 가득 담아서.”

“저는 잘 모르겠는데.”

크라머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로서는 구체적인 물질이 그려져 있지 않으니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빛이에요.”

“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두 화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빛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당대 최고였다.

섬세한 명암 표현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화풍.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살았던 시절을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라고 칭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 들어온 그윽한 햇빛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딸 마리아 베르메르에게 남긴 유일한 자산이고.

아버지를 향한 딸의 그리움이며.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정신이 계승되었단 걸 의미한다.

늦은 오후.

텅 빈 방은 너무도 낯설었다.

외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14명의 동생과 함께했던 그곳에는 그들이 살았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허탈함 속에서 기꺼이 붓을 든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을 방 가득 채워,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이곳에 살았단 걸 남긴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돈을 벌고자 함이 아닌.

화가 마리아 베르메르로서.

“여기.”

한스 박사가 그림 왼쪽 하단을 가리켰다.

그곳에 마리아란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 * *

“나 사람이 기절한 거 처음 봤어.”

<창문이 열린 방>을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으로 가져간 뒤 호텔에 돌아왔다.

“나도.”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은 요니 크라머르에게 <창문이 열린 방>을 위임받는 대가로 10만 유로를 보증금으로 걸었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창문이 열린 방>을 분실하거나 훼손할 리 없고.

추후 진품임이 밝혀지면 보증금에 더해서 국가 차원의 보상이 이뤄질 테니 크라머르의 가계 사정은 몰라보게 달라질 거다.

“어려워 보였는데 잘 됐다. 그치.”

“응.”

장사가 잘 되던 매장도 아닌 데다 최근에는 <델프트의 여인>에 관련한 일로 안 좋은 소문도 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차시현 말대로 이번 일이 크라머르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아무튼 금방 끝나서 다행이다. 다른 그림 보여줄 땐 일이 길어질 줄 알았는데.”

“아직이야. 그 그림이 진품인지 감정해야 하고. 크라머르 씨가 힐손 크라머르의 후손인 것도 입증해야 하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응. 다른 것도 아니고 국보로 지정하는 일이니까.”

차시현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이것저것 고민되나 보다.

“마리아 베르메르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만큼 뛰어난 화가였고. 본인이 서명한 그림도 발견했고. 아니지. 그건 아직 모르는 건가? 그건 어떻게 증명해?”

마리아란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해서 마리아 베르메르가 그렸다고 볼 순 없다.

“요하네스의 작품 중에 마리아가 그렸다고 추정되는 그림하고 대조해 봐야지. 아마 결과는 금방 나올 거야.”

“델프트의 여인도?”

“그게 가장 확실하다고 봐.”

“근데 안 보내줄 거 아니야.”

그게 마지막 문제다.

“쉽지 않겠네.”

“해낼 거야.”

“어떻게?”

“얘기해 봐야지. 씨몽 협회장도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거야.”

지금껏 누구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거장을 찾아내는 일이다.

잠시 국익에 흔들리긴 했지만 셰바송 씨몽의 미술을 향한 애정을 믿는다.

분명 바른 길을 갈 사람이다.

“그게 잘될까?”

“그렇게 할 거야.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파리에 있는 할아버지의 명예는 왜 걸어?”

“몰라?”

“뭘?”

“명탐정.”

“노인탐정 도일?”

“아니. 다른 탐정인데. 됐어.”

실패한 드립에 연연하면 구차해질 뿐이다.

어찌되었든 가장 높은 산은 넘었으니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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