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19화 (41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5화

Golden Age

2. 햇빛이 드는 창가(5)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고셀링크 이사가 물었다.

“델프트의 여인을 판 사람이에요. 분명 요니 크라머르라고 했어요.”

“그런 우연이.”

“우연이 아니에요. 마리아 베르메르와 결혼한 사람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힐손 크라머르입니다.”

베르메르의 생애를 연구한 미술관 직원 한스 박사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혹은 그의 딸 마리아 베르메르가 그렸을지도 모르는 작품이 사위와 같은 성을 가진 집에서 나왔어요. 전 이걸 우연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확인해야 합니다.”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다행히 차시현이 잘 짚어주었다.

“잘했어.”

“뭘?”

“넌 천재야.”

또 눈만 깜빡인다.

네덜란드말을 몰라서 이 상황도 이해 못 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면 다행인 게 나나 다른 사람은 크라머르란 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수 성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독특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차시현에게는 달랐다.

모르는 말로 이어지는 대화를 3시간이나 들어야 했던 차시현은 유일하게 아는 단어가 나오자 반응한 거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이야. 너 없었으면 한참 돌아갈 뻔했어.”

“어떻게 된 건데?”

“가면서 말해줄게.”

“또 어디 가?”

“델프트. 진짜 잘했어. 대학원 면접 보게 되면 이번에 네가 무슨 일 했는지 꼭 말해줄게.”

기쁜 마음에 차시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거 좋은 거야?”

“그럼.”

얼떨떨한지 잠시 고민한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면접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모양이니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줘야겠다.

“작가님?”

고셀링크 이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불렀다.

“네. 계속하시죠.”

“생각해 보니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닌 듯합니다. 말씀하신 잡화점에도 한번 다녀오는 게 어떻습니까.”

“제 생각도 그래요. 혹시 한스 박사님과 함께 들러도 괜찮을까요?”

고셀링크 이사가 소개한 대로 마리아 베르메르에 관해선 한스 박사를 신뢰해도 될 것 같다.

“한스, 괜찮죠?”

“예! 얼마든지요.”

한스 박사가 들뜬 기색을 보였다.

사료라고 할 게 많지 않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관련해서 모처럼 연구할 게 생겼으니 기뻐할 만하다.

“내일 어떠신가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가고 싶지만 한스 박사에게 일정이 있을 테니 내일 출발하자고 권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한스 박사도 흔쾌히 수락했다.

수수께끼 같았던 일에 조금씩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다.

* * *

“흐아아아아앙.”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차시현이 침대에 엎드렸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괴상한 소리를 낸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직원들과 나눈 이야기가 꽤 괴로웠던 모양이다.

“고생했어.”

“지쳤어.”

팔다리를 버둥거리더니 이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다.

피곤해 보여서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아직 그대로다.

“안 씻어?”

“……잠깐 졸았어.”

차시현이 일어나 침대 한가운데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서?”

“뭐가?”

“난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구.”

“아.”

회의장에서 나눈 대화를 요약해서 전달했다.

정확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어떤 흐름이었는지만 짚어주었는데 차시현이 뺨을 감쌌다.

“그럼 정말 크라머르 씨가 마리아 베르메르의 후손일 수도 있겠네?”

“델프트의 여인을 보관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

차시현이 그대로 침대에 눕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뭔가 좀 힘이 빠지는 느낌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파리에서는 그렇게 안 풀리던 문제가 여기 온 지 이틀 만에 풀렸잖아. 왜 그렇게까지 막아섰는지 모르겠고. 금방 알게 돼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응.”

“또……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각오하고 왔는데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아서. 그냥 좀 이상해.”

여러 가지 생각이 복합적으로 드는 모양이다.

“이틀 만에 풀린 건 아니야.”

“그래. 하루하고 반나절?”

고개를 저었다.

“파리에서 조사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단서를 잡진 못했을 거야. 그리고 평생 베르메르를 연구한 그들이 없었다면 훨씬 오래 걸렸을 거고.”

지식을 전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것을 쌓고 정리하고 깨닫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든다.

특히나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길은 너무도 험하다.

“마리아 베르메르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만큼 뛰어난 화가였다는 걸 알기 위해 벤자민 데이비스 교수는 수년, 아니, 어쩌면 수십 년을 연구했을지도 몰라.”

“아.”

“드레스덴 미술관이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에 큐피트가 감춰져 있다는 걸 알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고.”

차시현이 몸을 일으켰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배경이 녹색 커튼이고, 속눈썹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수십 년이 걸렸어.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이틀이 아니라 우리가 베르메르를 안 순간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거지.”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어.”

차시현이 금방 수긍했다.

잘 이해한 듯해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아직 확인해야 할 일이 좀 남았어.”

“잡화점에 가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야?”

“첫 번째는 요니 크라머르가 힐손 크라머르의 자손이라는 걸 확인해야 해. 족보가 남아 있길 바라야지.”

“있지 않을까?”

“글쎄.”

“흐으응. 오케이. 그럼 또?”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서 콘트라스트 검증 결과를 기다려야지.”

차시현이 손뼉을 쳤다.

“맞다.”

머리가 좋은 녀석답게 콘트라스트 검증이 왜 필요한지 금방 눈치챘다.

“콘트라스트라는 거 화가마다 다 다르지 않아?”

“맞아.”

“그럼 만약에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품하고 델프트의 여인이 다르면? 아니, 유사하면?”

“마리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사람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세밀한 부분은 숨길 수 없다.

마리아 베르메르가 아버지를 사사하고 그와 아주 흡사한 그림을 그렸더라도 콘트라스트 검증에서는 분명 차이를 보일 거다.

“그럼 어떻게 판단해?”

“콘트라스트는 여러 기준이 있어. 가장 먼저 확인할 건 완성도 차이야.”

“얼마나 신경 써서 표현했냐는 거지?”

“응.”

물감과 물감 사이에는 경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다뤘는지에 따라 화가가 빛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다루려 했고,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위작의 경우에는 콘트라스트가 부족한 경우가 잦은데.

그것은 빠른 시간 내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경계를 최대한 부드럽게 처리하지 않고 대강 표현하기에 티가 나게 된다.

반면 진위여부가 엇갈리는 작품의 경우 이 콘트라스트에 진품만큼 공을 많이 들였단 뜻이 된다.

“만약 마리아 베르메르가 정말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따라했다면 아마 그 차이가 얼마 안 날 거야.”

“하긴. 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다 베르메르 작품으로 느꼈으니까.”

“응. 그래도 분명 차이는 있을 거야. 베르메르의 작품을 모두 대조하면 그중에 튀는 작품이 있을 거고.”

“그게 마리아 작품일 확률이 높다는 거지?”

“맞아. 문제는…….”

“또 뭐가 있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은 이미 콘트라스트 검증 결과가 있을 거야.”

네덜란드에서 보관하고 있는 작품이 여럿이니 이미 자료를 갖추고 있을 터.

“그런데?”

“델프트의 여인. 고해상도 사진을 찍어오긴 했지만 원본은 아니니까.”

“맞다.”

“원본이 아니면 결과를 얻는다고 해도 설득력이 떨어져. 역시 가지고 오는 게 좋았는데.”

“어쩔 수 없었잖아.”

베르메르를 연구한 석학들의 방대한 지식과 크라머르 가문에 관련한 정보.

기존 베르메르 작품에 관련한 조사 결과 등 <델프트의 여인>의 진위여부는 역시 네덜란드에서 살펴봐야 했다.

하지만 이미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래.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응. 내일도 바쁘겠네. 일찍 자야겠다.”

차시현이 발라당 누웠다.

“씻고 자.”

“피곤해.”

“빨리.”

“힝.”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스 박사와 함께 델프트를 찾았다.

지체할 것 없이 곧장 요니 크라머르가 운영하는 잡화점을 찾았는데 다행히 나와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치워져 있고 떨어진 간판도 새로 달아놓아서 그제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어질러져 있다.

“어?”

그 사이에서 반갑게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작가님!”

“열심히 치우셨네요.”

“히힛. 이거라도 해야죠.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요니 크라머르가 한스 박사를 힐끗 보곤 물었다.

“이분은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서 근무하시는 한스 스트로트만 박사님이에요.”

“한스 스트로트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요니 크라머르라고 합니다.”

우선 통성명은 했지만 그가 왜 찾아왔는지에 대해선 감을 못 잡은 눈치다.

“델프트의 여인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어서요. 크라머르 씨 가문 내력도 궁금하고. 혹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당황한 눈치다.

“저는 아는 게 별로 없는데.”

“괜찮아요. 아는 대로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안심하길 바라고 꺼낸 말인데 그리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긴장한 모습을 보인다.

“이, 일단 여기라도 앉으세요. 어, 물 드실래요? 시원한데.”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요니 크라머르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스 박사가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실크를 다루진 않네요.”

마리아 베르메르의 남편이 실크 상인의 아들이었으니 그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천천히 알아보죠.”

“악.”

요니 크라머르가 물을 가지고 나오면서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매번 저러면서 용케 안 넘어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

요니 크라머르가 떠다 준 물을 한 모금씩 마시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실은 크라머르 씨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찾아뵈었습니다.”

너무 놀랐는지 목을 길게 뺀 채 눈만 껌뻑인다.

“혹시 예전에 실크를 다루진 않으셨나요?”

한스 박사가 물었다.

“아니요.”

요니 크라머르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님 때라든가 그 윗분들은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 어울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사실 조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아도 그 윗세대로 넘어가면 모를 수밖에 없다.

전해 듣는 이야기도 한정적인데다 마리아 베르메르가 살았던 시기는 300년 전이다.

알고 있는 사람이 특이하다고 판단해서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그럼 혹시 족보 같은 게 있을까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한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기록 보관소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베르메르가 언제 어떻게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기록되어 있으니, 서류 더미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조상 중에 힐손 크라머르란 분이 마리아 베르메르, 즉,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장녀와 결혼했단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스 박사가 요니 크라머르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아무래도 성이 같으셔서 연관이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전 전혀 몰랐어요.”

마리아 베르메르가 뛰어난 화가로 알려졌다면 대대로 그 이야기가 남았을 텐데 요하네스 베르메르조차 사후 100~200년간 잊힌 화가였다.

아는 게 이상하다.

가장 빠른 방법이라 생각해서 직접 물었으나 역시 직접 기록 보관소를 뒤져야 할 듯싶다.

“그래서 혹시 다른 그림도 있으신지 궁금한데. 어떤가요?”

한스 박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그림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 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테지만 가능성이 낮은 일이다.

“어. 몇 점 있긴 한데.”

“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는데 너무 흥분했던 모양.

한스 박사와 동시에 달려드니 요니 크라머르가 가슴에 양손을 모으고 잔뜩 겁에 질렸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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