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3화
Golden Age
2. 햇빛이 드는 창가(3)
다음 날.
델프트를 뒤로 하고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을 찾았다.
다부지게 서 있는 여섯 개의 기둥이 근엄하고 창문마다 조각된 장식이 품위 있다.
건물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반 고흐 미술관과 함께 네덜란드 3대 미술관으로 꼽힐 만큼 잘 관리되어 있다.
반 호브가 1825년에 그린 작품과 똑같으니 이곳 헤이그 사람들이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1)
“안 들어가?”
미술관 앞에서 잠시 망설이니 차시현이 재촉했다.
“들어가야지.”
마음이 무겁다.
<델프트의 여인>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니까.
잡화점 주인 요니 크라머르가 당한 일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며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로 가?”
“응. 온김에 잠깐 둘러보자.”
자비에르 부서장에게 이곳 이사 거스 고셀링크를 소개받긴 했지만 직접 연락하진 않았다.
공식 방문도 아니고 무엇보다 작품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이사라고는 해도 상주하진 않을 테니 한번 둘러보고, 프론트를 통해 천천히 만나볼 생각이다.
“여기도 매표소가 지하에 있네?”
“그러게.”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앞에 안내원이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 표는 어디서.”
“바로 앞으로 가시.”
안내원이 날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고, 고훈!”
“반가워요. 날씨가 좋네요.”
인사하기가 무섭게 안내원이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갔다.
놀라서 눈만 껌뻑이는데 차시현이 나와 안내원이 향한 곳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저래?”
“인사했을 뿐이야.”
“인사 받은 표정이 아니던데?”
아무래도 환영받긴 그른 듯하다.
숨을 길게 내쉬고 표를 사러 가니 매표소 직원도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티, 팀장님! 팀장님!”
매표소 직원마저 어디론가 향하니 차시현이 날 의심스레 쳐다본다.
“왜.”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왜 너 보면 다들 도망가?”
“나도 알고 싶어.”
환영받기 힘들다곤 생각했지만, 설마 도망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황당하기도 하고 표도 구할 수 없어서 어쩌나 고민하던 중 먼저 만났던 안내원이 사람을 잔뜩 모아서 이쪽으로 왔다.
“뭐야? 뭐야?”
차시현이 놀라서 내 뒤로 숨었다.
“작가님!”
40대 중반 정도일까?
부엉이처럼 수염이 난 남자가 다가와 두 손을 덥썩 잡았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연락도 없으시고요.”
“네?”
“자비에르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거스 고셀링크입니다.”
“아, 이사님.”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애가 타서 어제부터 여길 떠나질 못했어요.”
처음 만난 나이 든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니 조금 당혹스럽다.
“어제부터요?”
“예. 자비에르가 어제 출발하셨다고.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고요?”
“네, 덕분에…….”
일단은 환영받는 것 같은데.
다소 과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덕분이란 말이 나오고 말았다.
“잘 오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어요. 안으로 드시죠. 함께 오신 분도 같이요.”
부엉이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길을 안내했다.
함께 온 안내원이 가방과 외투를 들어주려고 해서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 * *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델프트의 여인>을 가지고 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니 고셀링크 이사가 정색했다.
“프랑스에서 그 일이 터졌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신 것 같습니다.”
“…….”
“파리에서 활동하시니 프랑스 여론에 반하는 입장을 꺼내기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적어도 우리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은 작가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인사에 목울대가 묵직해졌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안정되었고.
누군가는 날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지만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직업이기에 이미지가 안 좋게 심어지면 달리 방도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방태호와 더불어 쇼콜라티에 갤러리 직원 모두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다.
내 행동 하나에 130명이 직업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부담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직원들이 불안해할까 봐 의연한 척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되뇌며 무서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런데 옛 고향 땅에 와 이런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날 것 같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델프트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조사한 걸 정리해 둔 파일이에요.”
스마트폰을 스크린과 연동해 <델프트의 여인>을 띄우자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직원들이 탄식했다.
“오오.”
“이것이.”
<델프트의 여인>을 처음 접한 그들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해서 감상을 방해할 순 없었다.
한동안 잠자코 기다리니 마침내 고셀링크 이사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인사 받을 일은 아니에요.”
“잠깐의 인상이지만 확실히 베르메르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자비에르 부서장에게 전해 듣기로 고셀링크 이사는 평생을 베르메르 연구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조차 베르메르와 겹쳐 보인다고 하니 지금까지 내가 갈팡질팡한 것도 위안이 되었다.
“다음은 엑스레이 단층 촬영본과 안료 분석 결과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설명했다.
17세기 무렵에 사용된 재료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숨겨져 있던 속눈썹이 고스란이 표현되어 있던 점 등을 알리자 고셀링크 이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진품일 가능성이 높군요.”
“네.”
“하지만 뭔가 의심되는 부분도 있기에 오셨을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곤 페이지를 넘겼다.
“첫 번째는 보관 상태가 좋은 점이었어요. 루이 갈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이런 상태로 남을 수 없으니까요.”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델프트에 들렀어요. 잡화점 주인에게 물으니 창고 밖으로 꺼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창고는 습도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문제가 없군요.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면 생기는 문제입니다.”
“실존인물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겠죠.”
고셀링크 이사가 설명도 듣기 전에 곧장 답을 내놓았다.
<델프트의 여인>을 방금 접했으면서 사고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건 그가 정말 베르메르 전문가이고 이 사건을 유의 깊게 지켜봤단 증거이리라.
“맞아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델프트의 여인>이 완벽히 같은 인물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주인공이 베르메르에게 특별한 존재였다는 점과
베르메르와 카테리나 사이가 각별했던 점을 들며 고셀링크 이사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건 작가님의 추론이 맞을 겁니다.”
고셀링크 이사가 눈을 감은 채 풍성한 수염을 쓸었다. 고민할 때의 버릇 같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주인공이 딸 마리아라는 주장도 있죠. 혹시 배제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알고 있는 이야기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그려진 시기는 1665년이었어요. 장녀 마리아는 1654년생이고요. 넉넉하게 10살에서 12살이었단 뜻인데 그러기엔 나이대가 맞지 않아 보이죠.”
고셀링크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또 하나는 다른 작품에 나온 마리아 베르메르와 인상이 다른 점이에요.”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딸 마리아 베르메르를 자주 그렸다.
현재 학계에서는 8점 정도 작품에 등장시켰다고 추측하는데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마리아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인상이 상당히 다르다.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는 점을 제외하면 마리아 베르메르로 추정되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와 <피리를 든 소녀>의 주인공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고셀링크 이사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이 길어지던 차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직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 이야기하고는 다르지만 콘트라스트 관계 검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콘트라스트 관계 검증은 화가가 빛을 어떻게 지각했는지 분석하는 방법이다.
화가마다 빛의 강도와 위치, 번짐, 대조, 대비되는 걸 인식하는 게 다른데.
요하네스 베르메르처럼 빛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작가일수록 분석 결과가 높은 신뢰도를 가진다.
다만 원본이 없는 지금 가능할지 의문이다.
“사진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죠. 지금 바로 진행해요.”
“예.”
고셀링크 이사가 발언한 직원에게 곧장 분석을 시도하라고 주문했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고셀링크 이사가 눈썹을 들어 설명을 재촉했다.
“전 델프트의 여인이 베르메르의 작품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조사를 시작했어요.”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고 증명할 방법은 소거법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두고 모든 의문을 풀었을 때야 비로소 진품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논란이 되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누군가는 의심을 지우지 못할 테니까.
“같은 생각입니다.”
“누군가가 베르메르 흉내를 내서 그렸다면 그림 속 여인은 실존인물이어야 해요.”
고셀링크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재료 분석 결과 17세기 무렵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건 확실해졌죠.”
“당시에는 베르메르 작품을 모사할 이유가 없죠.”
전문가답게 잘 따라온다.
당시에도 작은 마을이었던 델프트에서만 활동했고 그마저도 사랑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베르메르의 작품인 척 그리더라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렇다면 베르메르가 그린 것으로 봐야 하는데.”
고셀링크 이사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주먹을 쥐었다.
“밀월 관계도, 딸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는 의문이군요.”
조건을 따지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분명 실존한 인물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실존하지 않다면 조건이 틀리게 된다.
여러 추측이 맞물려야 진품으로 볼 수 있는데, 상반되는 결과가 나오니 진품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후보는 총 3명입니다. 장녀 마리아는 저와 작가님의 생각이 같고. 베르메르의 하녀는 확인할 길이 없죠. 마지막으로 베르메르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반 라이번의 딸이 있는데.”
네덜란드로 온 보람이 있다.
“반 라이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찾아아죠.”
고셀링크 이사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저…….”
일어서려던 차 누군가 소심하게 나섰다.
“말해봐요.”
고셀링크 이사가 미술관 직원에게 의견을 묻자 주변 눈치를 보더니 이내 또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작가님 설명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어떤 점이.”
워낙 많은 이야기를 해서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만약에 델프트의 여인이 위작이라면 당시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이사님이나 작가님께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고 하셨고.”
“……계속해 봐요.”
고셀링크 이사가 설명을 재촉했다.
“한 사람 있어요.”
“누구요?”
“장녀 마리아 베르메르요.”
* * *
1)The mauritshuis in the hague, bartholomeus van hove, 1825, 판넬에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