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9화
Golden Age
1. 황금시대(9)
루이 갈렌이 입술을 씰룩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른 허름한 잡화점에서 <델프트의 여인>을 찾은 뒤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뚜렷한 명암 대비, 부드러운 질감, 선명한 색감.
그를 통해 전달되는 애틋한 감수성 모두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특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진과 고훈이 검증을 거듭할수록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랫동안 미술계에 몸담은 그의 직감과 검토 결과가 일치한 것이었다.
루이 갈렌은 드디어 인생의 전환점이 왔다고 확신했다.
대체 얼마를 벌 수 있을까.
베르메르의 작품은 2004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1,624만 5,600파운드에 낙찰된 바 있었다.
무려 30년도 더 된 일이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후속작인 <델프트의 여인>이라면 못해도 그 두 배는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금. 아주 조금만 욕심을 부리자면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살바토르 문디>의 4억 5,030만 달러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루이 갈렌은 최선을 다해 여론을 자극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검증을 의뢰한 일부터 네덜란드 미술사에 정통하면서도 미술가로서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고훈을 추천했다.
검증팀이 발견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언론사에 배포했다.
루브르 박물관과 고훈의 명성 덕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했던 여론은 급격히 돌아섰고.
고맙게도 프랑스에서는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갔고 네덜란드에서는 <델프트의 여인> 반환 운동까지 일었다.
루이 갈렌으로서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도중에 고훈이 나서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으나, 결국 프랑스 문화부와 관광청은 <델프트의 여인>을 심의하기로 결정했고.
루이 갈렌은 <델프트의 여인>의 보관‧보존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이 작품을 매입하는 게 어떠냐고 제시했다.
<델프트의 여인>을 지켜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들끓으니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거란 판단이었고.
루이 갈렌의 예상대로 루브르 박물관은 심의가 통과된다면 <델프트의 여인>을 취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남은 문제는 가격.
프랑스에서 국보로 지정된 개인 소장품을 매입할 때는 행정 당국과 소유주가 공동으로 임명한 한 명의 전문가가 가격을 결정했다.1)
현재로서는 <모나리자>의 비밀을 찾아낸 뤼미에르 테크놀로지의 앙드레 페니코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는데.
그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열렬한 팬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델프트의 여인>의 감정가가 얼마가 될지 기대를 걸어도 되는 상황.
“흐. 흐흫흐.”
거듭된 호조 속에 루이 갈렌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흐헤헿헿헥헿.”
단 한 달.
심의위원회가 정한 검증 기한만 지나면 막대한 돈이 손에 들어올 터였다.
경제적 자유.
그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루이 갈렌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런 뒤에야 고개를 저으며 와인장 앞으로 향했다.
평소 즐겨 마시던 크레스만 생떼밀리옹을 쥐었다가 좋은 일이 생기면 마시려고 아껴둔 샤토 라피트 로칠드에 시선이 갔다.
‘아니지. 심의가 통과되는 날 따야 맞아.’
그렇게 발을 옮기려던 차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늦어도 반 년 뒤에는 수천만 유로를 벌 텐데 고작 800~900유로짜리 와인을 기념삼아 마실 순 없었다.
루이 갈렌은 숨을 들이마시며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집어들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이내 개의치 않고 마개를 열었다.
자줏빛을 머금은 루비색 와인으로 잔을 채우고 TV 앞 소파에 앉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혀를 휘어잡는 단단한 보디감과 체리와 자두, 블랙베리가 어우러진 고혹적인 향은 익히 경험하지 못한 맛이었다.
‘그래. 이런 게 품격이지.’
다소 어색했지만 루이 갈렌은 900유로나 되는 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수 있는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TV를 켰다.
앙리 마르소의 기자회견이 중계되고 있었고 루이 갈렌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르소 미술관이 보유한 작품 중 약탈물이 있는지 검증한다.
-약탈물임이 밝혀지면 무상으로 본국에 송달한다. 예외는 없다.
-몰라서 물어?
-버러지들 쫓아내.
소란 속에 중계가 끝나자 루이 갈렌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저러니 욕을 먹지. 품위 있게 살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고.”
앙리 마르소의 폭력적인 언행을 비판하며 와인을 입에 머금자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저 정도 되면 굳이 남 시선 신경 안 써도 되잖아?’
눈을 가늘게 뜬 채 유리잔을 바라보던 루이 갈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막 대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신분.
곧 그럴 위치에 오를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앙리 마르소의 기행이 일견 납득되기도 했다.
어색한 와인 맛처럼 그 역시 익숙해져야 할 일 아닐까.
루이 갈렌은 상류 계층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하며 와인을 비웠다.
* * *
전화를 받은 앙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왜 전화했는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내일 출발해요.”
-학교는.
“과제로 대체했어요. 돌아오면 보강도 할 거고.”
-언제까지 그놈들 자리 내주려고 그래? 계속 도와주면 고마운 줄 몰라.
앙리는 줄곧 학생들에게 업체를 연결해 주거나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통해 전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게 둬야 한다는 교육관을 가진 터라 반복해 이야기해 온 주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랑 맛이라도 본 입장은 달라요. 다이어트할 때도 모르는 음식은 먹고 싶지 않잖아요. 아는 맛이 무섭지.”
-뭔 소리야.
다이어트 경험이 없어서 공감할 수 없나 보다.
2형 당뇨 때문에 열심히 살을 뺀 마은찬이라면 분명 납득했을 거다.
“전시도 해보고. 업체랑 업무도 해봐야 더 열심히 하게 된단 뜻이에요.”
-흥.
오늘 기자회견 일을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무튼 다녀올게요. 미셸하고 베르한테 안부 전해줘요.”
-그래.
전화를 마치자 차시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작품 돌려주는 일 물어보려던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괜찮을 것 같아.”
“응?”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그럼?”
“델프트의 여인이 프랑스 국보가 되면 그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나선 것 같아. 모두가 욕심 내니까 자기라도 나서야 면목이 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기가 프랑스인이라는 데 자부심이 엄청 크거든.”
그 외에도 이유는 많을 거다.
충분히 모른 척할 수 있고 누구도 그에게 뭐라 하지 않을 테지만.
앙리의 그림으로 아픔을 달래고 용기를 얻는 팬과 그를 목표로 하는 수많은 미술가에게 그런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미셸과 베르나데트에게 떳떳하고 싶을 테고.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는데 나 때문이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실례다.
굳이 나와 <델프트의 여인>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분명 행했을 일이다.
“빨리 짐 싸자.”
“응. 아, 레나 누나는? 요새 안 보이던데.”
“모스크바 아트페어 준비하고 있어.”
“흐으응.”
차시현이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징그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어?”
“연락 자주 해?”
“자주 하긴 뭘 자주 해. 그냥 얘기하다 보니 알게 됐어. 빨리 짐이나 싸.”
“언제? 무슨 얘기하다가?”
“시끄러워!”
* * *
앙리 마르소가 통화를 마치자 미셸 플라티니가 상냥히 미소 지었다.
“부담 가지지 말라고 얘기하려던 거 아니었어?”
“별로.”
그럴 생각이었다.
<델프트의 여인>의 진위 여부는 프랑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만큼은 시덥지 않은 일로 여겼다.
진품이면 국보로 지정해선 안 될 일이고 가품이라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될 터.
어느쪽이든 프랑스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고훈이 혹시나 이번 일로 <델프트의 여인>을 반드시 검증해내야 한다고 여기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잠깐의 통화로도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내일 간대.”
“어딜?”
“네덜란드.”
고훈은 내일 네덜란드로 떠난다는 말만 했다.
사족은 없었다.
문화부와 루브르 박물관, 루이 갈렌이 <델프트의 여인>을 국외 반출하지 못하도록 막아두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리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델프트의 여인>에 관련한 의문을 반드시 풀어낼 의지가 엿보였다.
해서 달리 묻지 않았다.
이미 각오를 다진 녀석에게 구태여 당부를 더하고 싶진 않았다.
본인이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녀석이었다.
“한동안 못 보겠네.”
“그렇겠지.”
“그래도 심심하진 않을 거야.”
“심심하긴.”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고훈이 없다고 해서 심심할 리 없었다. 베르나데트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힐까 고민하던 차 앙리 마르소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아내는 여전히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뭐야.”
“뭐가?”
“왜 웃어.”
“웃으면 안 돼?”
안 됐다.
평소 무뚝뚝한 편인 미셸 플라티니가 저렇게 상냥하게 웃는 건 화를 감추기 위함이거나 앙리 마르소에게 화가 닥쳤을 때였다.
“클라우드에 목록 올라와 있을 거야.”
“무슨 목록.”
“소장품. 오늘부터 실시간으로 갱신해 놓으라고 했으니 확인해.”
마르소 미술관이 보유한 소장품은 총 118,000여 점이었다.
그중 공개 거래로 진행된 작품을 제외하더라도 60,000여 점 이상을 확인해야 했다.
“이걸 왜 내가 해.”
“설마 이렇게 중요한 일을 직접 안 보려고?”
“…….”
“아니면 일을 벌여놓고 나한테 떠넘길 생각이었어?”
그럴 생각이었다.
마르소 미술관의 관장은 미셸 플라티니였고 직원만 300여 명에 달했다.
엄중하고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했지만 결코 그 많은 작품을 직접 확인할 생각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다.
“물론 나도 도와주고는 싶은데. 우리 베르가 엄마 아빠 없으면 외로워할 테니까. 나라도 같이 있어줘야지.”
우리 아이만큼은 외롭게 두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그럼 힘내. 다 확인하려면 한 달은 걸리겠더라.”
“…….”
미셸이 앙리의 뺨에 키스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입가에 남은 미소와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콧노래가 잊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앙리 마르소는 어쩔 수 없이 클라우드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소장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1)참고자료:
심경미‧차주영‧임유경‧허윤아, 『선진국 문화재 보존‧관리 규범현황 및 내용에 관한 연구』(문화재청, 2014.12.26).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