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12화 (41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8화

Golden Age

1. 황금시대(8)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로 떠나기 하루 전 오후 2시.

자비에르 부서장이 대표로 루브르 박물관의 의사를 전달했다.

<델프트의 여인>을 국외로 반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여론을 의식한 탓이리라.

“어쩔 수 없죠.”

예상대로 반발이 강해 반쯤 포기하고 있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찾았고, 필요한 자료 또한 모두 가지고 있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 원본을 보여줄 수 없는 게 아쉽긴 하다.

“또.”

자비에르 부서장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슨 일이 또 있어요?”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연하죠.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거예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답을 피하는 걸 보면 적어도 루브르 박물관의 결정은 아니라는 말이다.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걱정한 대로 정치권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의문점이 남아 있다는 건 충분히 전달했나요?”

“……그렇습니다.”

“만약 진품이 아닐 때는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루브르 박물관은 불명예를 질 거고요.”

자비에르는 괴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 이상 다그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차 자비에르가 날 붙잡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잠시.”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뒷이야기를 풀어낸다.

“루이 갈렌이 델프트의 여인을 경매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자비에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밀을 지켜야 하는 그로서는 내게 최선의 방법으로 힌트를 준 것이리라.

뜻을 풀어보면 예상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돈 욕심이 많은 루이 갈렌은 <델프트의 여인>을 런던 크리스티에 내놓을 거라면서 보상액을 요구했을 테고.

문화부는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다.

경매에 오른 작품을 개인 수집가나 다른 나라와 경쟁해서 사는 것보단 저렴하게 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델프트의 여인>을 국외로 반출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다음 주에 문화재심의위원회에 넘어갈 예정입니다.”

빠르다.

“심의 과정은 통상적으로 한 달 정도 걸리고 루브르가 증빙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결국 루브르 박물관이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발표하기까지 한 달 남았단 뜻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도 그때까지뿐.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판단한 뒤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이 복잡해진다.

그전에 <델프트의 여인>을 둘러싼 모든 의문점을 풀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충분해요.”

얼굴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다.

“이걸.”

자비에르 부서장이 명함을 꺼내놓았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이사 거스 고셀링크란 이름이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 부탁을 넣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찾으실 거라고.”

공식적인 업무 협력은 아니나 개인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다.

이 역시 자비에르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겠지 싶다.

“고마워요.”

“건투를 빕니다.”

내가 <델프트의 여인>에 의문점을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자비에르 또한 의심하고 있다.

진위 여부를 확실히 밝혀달라는 요청과 응원에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르 몽드에서 나왔습니다. 이사님 계시죠?”

“안 계신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제발 좀 돌아가세요.”

“고훈 작가님! 20분지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내일 출국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자비에르와 헤어지고 쇼콜라티에 갤러리로 향하니 정문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직원들이 나섰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지하주차장을 통해서 올라가려고 했는데 그곳에도 자리를 잡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기! 이사님!”

“고 교수님! 교수님!”

“작가님! 작가님!”

날 발견한 기자들이 떼를 지어 달려든다.

분명 델프트의 여인을 어떻게 검증할 건지, 검증팀 운영에서 빠질 건지와 같은 질문을 꺼낼 거다.

내일이면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검증팀을 해산한다고 발표할 테니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앙리 마르소 씨와 사전에 얘기된 일인가요?”

생뚱맞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오늘 마르소 씨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전에 소통이 있었습니까?”

“마르소 작가의 발언이 작가님의 최근 행보와 연관되어 있습니까?”

“네?”

* * *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앙리 마르소가 본인의 미술관에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델프트의 여인>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오갔기에 언론은 앙리 마르소가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주목했다.

프랑스 주요 방송사가 생중계에 나섰고 수십 명의 기자가 참여하니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내 앙리 마르소가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 셔터음이 빗발쳤다.

눈짓 하나까지 포착하려고 안달이 난 기자들을 응시하던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헛소리를 들었어.”

마르소의 보석은 분노로 빛났다.

“어떤 그림 한 점에 프랑스의 경제가 달렸다는데. 너희 생각은 어때.”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누구나 <델프트의 여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루이 갈렌이 발굴한 그 작품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연작이었고.

많은 이들이 프랑스 관광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기자들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아주 더러워.”

평소에도 기행으로 유명했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진품인지 가품인지 밝혀지지도 않은 걸 가지고 염병 떠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앙리 마르소가 한 기자를 지목했다.

“너.”

“예?”

“그게 없으면 우리나라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기자가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앙리 마르소는 주변에 대고 다시 물었다.

“나 앙리 마르소가 있는 이곳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

“밀레, 마네, 세잔, 마티스, 뒤샹이 살았던 이 나라가 언제부터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것에 목매었냐고 묻잖아!”

앙리 마르소의 외침이 기자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고 중계를 지켜보는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경종을 울렸다.

앙리 마르소가 또 한 명의 기자에게 물었다.

“너, 그게 진품인지 알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물었다.

“넌. 고훈이 발표한 자료 읽어는 봤어?”

“예. 당연히.”

“그럼 아직 확인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검증해야 할지도 알아?”

그 역시 답하지 못했다.

앙리 마르소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베르메르에 대해 그녀석보다 잘 아는 놈 있냐고.”

마르소 미술관 응접실에는 카메라 셔터음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놈이 풀리지 않는 게 있다고 더 알아봐야 한다잖아. 데려다가 책임자로 앉힐 땐 언제고 확실하게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많아? 왜. 그놈이 그걸 네덜란드에 갖다 바치기로 한대?”

“그…….”

“뭐.”

“아무래도 국보 후보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보니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이지 않습니까?”

“공항에서 붙잡기라도 할까 봐?”

“그러니까 혹시나.”

“똑바로 말해. 개인 소유품을 압류하는 게 강도 새끼지 나라야? 네덜란드 정부가 그렇게 한대?”

앙리 마르소의 일침에 용기 내 발언했던 기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 빌어먹을 것을 우리나라 국보인 양 말하는데. 대답해. 대체 언제부터 프랑스가 이렇게 치졸해졌지?”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너희가 잘 아는 것처럼 렘브란트 기수도 네덜란드에 양보했어. 2021년는 베냉에 26점의 문화재를 돌려줬고.”1)

앙리 마르소가 프랑스의 문화재 반환 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세네갈에도 돌려줬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돌려주고 있었다고. 그게 생색이나 내는 일이었어?”

그는 분노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는 위대한 프랑스가 수만 점의 문화재 중 몇 점을 돌려줬다고 만족한다는 데 실망했다.

<기수>를 양보했으니 <델프트의 여인>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열한 발상에 기가 찼다.

과거 잘못된 일을 저질렀어도 하나씩 바로잡고 있었기에.

그런 나라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대답해!”

앙리 마르소가 의자 팔걸이를 내려치자 그 기세에 압도되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 국보가 될지도 모르는 그림을 가져와서 우리 걸로 하자? 미쳤어?”

앙리 마르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소리는 잘하더만 왜 대답이 없어! 언제부터 이 나라가 그렇게 옹졸했냐고 묻잖아!”

지금껏 앙리 마르소는 기인이었다.

역사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미술가였으나 인격적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무례했고 쉽게 화를 냈으며 언행도 단정치 못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이 순간부터.”

앙리 마르소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르소 미술관이 보유한 작품 중 약탈물이 있는지 검증한다.”

기자들이 또 한 번 기겁했다.

수십만 점의 예술품을 보유한 마르소 미술관은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와 함께 파리 4대 미술관으로 손꼽혔다.

프랑스 왕가가 오랜 세월 모은 예술품이 즐비해 있고, 마르소 가문이 대대로 사비를 들여 수집한 모든 작품이 마르소 미술관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약탈물임이 밝혀지면 무상으로 본국에 송달한다. 예외는 없다.”

앙리 마르소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어떤 작품이라도 예외 없이 말입니까?”

“사전에 계획된 일인가요? 언제부터였습니까!”

“갑자기 그리 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쏟아지는 질문 속에 앙리 마르소의 귀에 꽂힌 말이 있었다.

“이유?”

“미술관 운영에 큰 타격이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여쭙습니다!”

마르소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은 그 가치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국보급 작품의 수가 루브르 박물관에 밀리지 않으니 그중 약탈한 물품이 있다면 손해가 막심할 터였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사람이 아니니, 그렇게 큰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몰라서 물어?”

앙리 마르소가 이를 갈았다.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모국 프랑스가 천박해지는 꼴을 볼 수 없었다.

본인을 지지해 온 수많은 팬 앞에서 비겁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당위와 책임, 양심이 따랐다.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는 사람이라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버러지들 쫓아내.”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기자들을 내보낼 것을 주문했다.

* * *

1)2021년 기준 프랑스는 약 9만여 점의 아프리카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었다.

2021년에 베냉에 돌려준 문화재 26점 또한 1892년 프랑스군이 베냉 아보메 왕궁에서 훔친 물건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문화재 반환 협약서에 서명하며, “이번 반환 이후에도 이 일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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