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7화
Golden Age
1. 황금시대(7)
기자회견 이후 프랑스 언론은 뜨겁게 타올랐다.
그동안 고훈에게 호의적이었던 언론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일부는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냈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가십지도 생겨났다.
[고훈 도 넘은 발언]
파리 보자르 회화과 교수이자 미술가 고훈(21)이 지난 5일 루브르 미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훈은 이날 오전에 발표된 <델프트의 여인> 검증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밝히며 “루이 갈렌이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 과정에서 고훈은 <델프트의 여인>을 네덜란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으로, 한 전문가에 따르면 네덜란드로 옮겨 연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한다.
관계자는 고훈이 취득자 루이 갈렌의 권한을 침해함과 동시에 최근 네덜란드에서 불거진 <델프트의 여인> 환원 운동에 명분을 주었다고 비판하면서 네덜란드 정부의 사주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시했다.
업계에서는 고훈이 <델프트의 여인>을 국외로 가져갈 순 없도록 프랑스 문화부가 국보 지정을 못박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최근 가장 화두에 오른 일인 데다 언론까지 나서서 불을 지피니 그동안 호평 일색이었던 프랑스 내부에서도 고훈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훈이한테 대체 왜 저럼?
└그니까. 검증 책임자로 들였으면 끝까지 믿어줘야지. 전문가라고 모셔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난리야.
└아니 솔직히 갈렌인지 가래인지가 먼저 거짓말했잖아. 왜 훈이한테 뭐라고 하는데?
└내 말이. 검증 제대로 하자는 건데 왜 저렇게까지 오버하는 거야?
└정치적 문제가 엮여서 쉬운 문제는 아님.
└아오 개빡치네 진짜. 훈이가 네덜란드한테 뒷돈 받았대. 미친 거 아님?
└ㅠㅠ 난 그냥 훈이가 미술만 했으면 좋겠다.
└왜 훈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말해? 맞는 말 했구만.
└아니 그냥 괜히 이상한 말 들으니까 그렇지.
└훈이 욕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겠지.
└훈이가 잘못했으면 몰라. 옳은 일 했는데 왜 하지 말라고 하냐고 내 말은. 훈이는 자기 생각 얘기도 못 해?
└솔직히 내 입장에선 고훈 저러는 거 좀 별로야. <기수> 양보했으니까 이번엔 네덜란드가 양보해야지.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끼어들어?
└가입일 1일ㅋㅋㅋㅋㅋ 좀 오래된 아이디라도 가져오지 그랬니?
└분탕 치는 애들 왤케 많아.
└그만해.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해.
└우리? 어그로 끌려고 들어온 게 뻔히 보이는데 우리?
└프랑스 놈들 예술품 약탈해 간 게 몇 갠데. 바득바득 지들이 챙기다가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님?
└이번 일은 좀 다르지 않나? 갈렌이 사 온 거라며. 개인 수집물을 돌려줘야 할 이유가 따로 있어? 문화재는 다른 느낌이야?
└프랑스가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려고 해서 그럼.
└?
└개인 거래면 네덜란드가 사들여서 자기네 국보로 지정할 수 있는데, 프랑스가 끼어들면 그럴 수 없게 되잖아.
└ㅇㅎ
└갈렌은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돈 더 받아내려고 하는 거고 문제의 본질은 프랑스하고 네덜란드의 자존심 싸움임.
└아까 분탕글 쓴 애 입장이긴 한데 프랑스 입장에서는 <기수> 양보했으니까 이번엔 양보 받길 바랄 수 있잖아.
└일본이 1965년에 우리나라에 문화재 일부 반환했거든? 그런데 지금까지 안 돌려준 게 94,341점임. 넌 그것도 이해해 줄 거야?
└그건 아닌데. 이번 일은 좀 다른 경우 아니냐는 거지.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값 치러서 가져온다는 데 굳이 자기 나라 국보로 지정해서 국외 반출 막으려는 거잖아. 조건은 달라도 행동은 같음.
└프랑스 훈이한테 엄청 호의적이었는데 이번 일 한 번으로 확 돌아서는 거 보니까 무섭다.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다.
* * *
“흠.”
고수열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 세계가 떠들썩한데도 손자는 태평할 뿐이었다.
“훈아.”
고수열이 정원에서 꽃을 손질하던 고훈에게 다가갔다.
손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음에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정성을 들이고 있었다.
“해가 잘 들어서 그런지 다들 건강해요.”
“싱싱해 보이는구나.”
“네.”
고훈이 손을 털고 일어났다.
“너무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비난 여론 때문에 입장을 바꿀 리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옳다고 판단한 일은 굽히지 않았기에 그저 상처 입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할애비는 항상 네 편이다.”
그 무엇보다 든든한 지지였기에 고훈은 씩 미소 지었다.
“훈아.”
“아저씨.”
방태호가 고수열에게 목례를 하고 다가왔다.
“협조를 구했어. 다행히 말귀를 알아듣더라.”
“어떤 협조요?”
“기사. 검증 과정에서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의 도움이 왜 필요한지 실어달라고.”
기자회견 이후 방태호는 <델프트의 여인>의 검정 과정을 상세히 정리한 내용을 언론사에 배포했다.
고훈을 향한 잘못된 비판, 비난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화하기 위함이었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내 일인데.”
“정치적인 발언으로 내비치는 게 걱정일세.”
고수열이 나섰다.
“그렇습니다. 반대 여론이 너무 강해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문제 맞아요.”
뜻하지 않은 말에 고수열과 방태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전 검증은 함께 진행해야 한다고 봐요. 프랑스에서 자체적으로 베르메르 작품이라고 결론 내리고 국보로 지정하면 네덜란드 입장에선 난감하잖아요.”
“훈아.”
방태호가 걱정스레 입을 뗐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네가 옳은 일을 한다고 믿고. 하지만 네 일도 아닌 일에 휘말려 혹시라도 다칠까 봐 이러는 거야.”
“제 일이에요.”
고훈이 장갑을 벗었다.
“대학에 있다 보면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수많은 작품이 어떻게 파리에 오게 됐는지, 빼앗긴 입장에선 얼마나 돌려받고 싶은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
“무조건 넘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어찌 되었든 지금 주인은 갈렌 씨고요. 다만 국보로 지정되기 전에 양국이 충분히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 검증도 양쪽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요. 적어도 욕심 때문에 대충 넘길 일은 아니에요.”
고훈이 목에 걸쳐 두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분명 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 * *
한편 프랑스 언론과 미술계는 또 다른 영웅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고훈이 <델프트의 여인>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었으니, 그의 동반자를 통해서 사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네덜란드 언론에서 고훈 교수의 발언을 지지하고 나섰다고요.
-그렇습니다. 고훈 교수가 그들에게 명분을 주었다고 봐야죠.
-명분이라면?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명분 말입니다. 사실상의 내정간섭이나 다름없죠.
-조금 격한 표현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인이 소유한 작품을 국보로 지정하는 일은 국내 일입니다. 또 일찍이 한 번 양보하지도 않았습니까.
-렘브란트의 기수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예요.
-확실히 최근 델프트의 여인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미술계에서는 어찌 대응하실 건가요?
-중론을 모아서 강력히 제청해야겠죠. 예술인 협회에도 협조를 구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셰바송 씨몽 협회장이 중심이 되겠군요.
-그렇죠. 하지만 또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앙리 마르소 씨를 염두에 두고 계신 듯하군요.
-예.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향을 미치는 분이니 이번 일이 잘 돌아가게 힘써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미 접선을 하고 있다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패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리 마르소가 모니터를 꺼버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멀리 마르소 미술관 정문에 기자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아침부터 진을 치고 인터뷰를 요청하는데 진절머리가 났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저들을 어떻게 내쫓을지 고민하던 차 인터폰이 울렸다.
“뭐야.”
-작가님, 셰바송 씨몽 협회장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그러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차였다.
미술계 인사들이 헛소리를 내뱉지 않도록 셰바송 씨몽에게 입단속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앙리 마르소가 혀를 차고 몸을 돌리니 곧 셰바송 씨몽이 다급히 사무실로 들어섰다.
“앙리 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세.”
셰바송 씨몽 협회장이 앙리 마르소를 다그쳤다.
“오자마자 뭔 소리야?”
“자네라도 나서서 고 군을 설득해야지. 다들 자네만 보고 있지 않은가.”
미술가로서의 파급력은 고훈과 동등했고 정‧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으로는 비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왕가의 핏줄을 이은 그라면 분명 <델프트의 여인>을 지키는 데 힘써주리라 믿었다.
“어째서.”
앙리 마르소는 창문을 통해 마르소 미술관을 포위하다시피 한 기자들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째서라니!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묻는 겐가!”
앙리 마르소가 본인의 의자에 앉으며 책상에 다리를 올렸다.
“검증해 달라고 데려갈 땐 언제고 제대로 하겠다는데 뭔 말이 많아?”
“다른 문제잖은가. 검증은 여기서도 할 수 있어.”
“그 녀석이 가야 한다잖아.”
“만약 네덜란드에서 진품이란 게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걸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대답이 없자 셰바송 씨몽 협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잘 알잖은가. 문화부뿐만 아니라 관광청에서도 신경 쓰고 있네.”
씨몽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를 되찾았다.
프랑스의 관광산업은 1년 GDP의 7%를 차지하며 동시에 200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1)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방문하듯.2)
<델프트의 여인>은 제2의 <모나리자>로서 프랑스 관광업을 활성화시킬 게 분명했다.
“현실적인 문제야. 그 작품 하나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어. 그걸 모른 척해서 되겠나?”
앙리 마르소가 셰바송 씨몽과 눈을 마주했다.
“베르메르 작품이 없으면 프랑스가 위태롭다고?”
“그런 말이.”
“정신 차려, 영감.”
앙리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셰바송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 프랑스가 다른 나라 작품에 기대었지?”
밀레, 마네, 드가, 세잔, 로댕, 모네, 고갱, 쇠라, 마티스, 뒤샹.
수없이 많은 미술가가 살아 숨쉬었고 지금은 앙리 마르소가 있는 나라였다.
“기수를 돌려줄 때는 이러지 않았어. 당당하고 품위가 있었지. 그런 프랑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치졸해졌냐고 묻잖아.”
앙리 마르소는 화가 났다.
렘브란트의 <기수>와 같은 대작조차 흔쾌히 양보했던 위대한 프랑스가 대체 언제부터 이리도 옹졸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자네.”
“그 녀석이 그걸 네덜란드에 갖다 바치자고 했어?”
고훈을 두고 한 말이었다.
“검증하러 간대잖아.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해?”
앙리 마르소는 지난 날 미술계를 위해 힘써 온 셰바송 씨몽을 떠올리며 그를 몰아세웠다.
양국이 함께 검증하자는 말을 마치 네덜란드에 <델프트의 여인>을 넘겨야 한다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눈 앞에 황금이 있으니 생각이 달라져? 아니면 누가 부탁이라도 했어?”
선거가 가까워졌기 때문인가.
모든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자 했고, 그 때문에 이번 일을 이용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애국심을 자극해 말이다.
“말을 삼가게!”
“영감이야말로 정신 차려! 그 녀석 말 하나도 안 틀렸어! 온 나라가 미쳐가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대잖아!”
셰바송 씨몽이 분한 나머지 몸을 떨다 입을 열었다.
“그러는 자네는 무엇이 그리 깨끗해서 이러는가.”
“뭐?”
“자네 미술관에 있는 그 많은 작품.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도 약탈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떴다.
“고 군이 설령 다른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은 분명 자네에게도 피해를 줄 것일세. 그걸 왜 몰라!”
악다문 입에서 빠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났다.
“취득물을 어찌할지는 개인의 판단이네.”
틀렸다.
고훈은 <델프트의 여인>을 무상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말한 적 없었다.
렘브란트의 <기수>를 양보했을 때처럼 양국이 대화를 나누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띤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 셰바송 씨몽에게는 그리 들리지 않았다.
오직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해 다가올 선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자 할 뿐이었다.
“자네가 나서서 고 군을 설득해 주게. 그리 해야 해. 언젠가 이 일이 자네를 망칠 수 있어.”
“다물어.”
“앙리 군!”
“닥치라고!”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치자 셰바송 씨몽도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놈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분노한 모습에 셰바송 씨몽이 잠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실언을 했나 보군.”
실수를 인정했음에도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말을 붙여봤자 감정만 상할 듯하여, 셰바송 씨몽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외투를 챙겼다.
“……또 오겠네.”
“꺼져.”
셰바송 씨몽은 몹시 흥분한 그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피했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앙리 마르소는 책상을 내리쳤다.
‘날 망친다고? 그 녀석이?’
권력과 돈에 눈이 먼 것보다.
자신과 고훈의 관계를 더럽혔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고훈과는 수많은 예술 작품을 통해 함께 성장하고 교감했다.
서로에게 가장 큰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이 이해하는 관계였다.
앙리 마르소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인터폰을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기자들 들여보내.”
기자라면 치를 떠는 고용주가 뜻밖에 말을 꺼냈는지라 그의 비서는 짐짓 당황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비서실장 아르센의 가르침을 상기하고는 이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응접실에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 * *
1)2020년 기준, 프랑스의 관광산업은 총 GDP 2조 5,514억 달러 중 7%인 1,785억 9,800만 달러(한화 약 213조 6,900억 원)를 차지했다.
참조자료: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프랑스 관광산업 대응전략, Travel Daily, 2020.11.08.
2)프랑스 정부는 <모나리자>의 경제적 가치를 2조 3,000억 원에서 40조 원 내외라고 밝혔다.
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 대다수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찾는 현상을 근거로 둔 추정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