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6화
Golden Age
1. 황금시대(6)
루이 갈렌은 독단적으로 나서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처음 베르메르의 숨겨진 작품을 찾았다고 알렸을 때만 해도 여론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작품 중에는 위작인 경우가 대다수였고.
베르메르의 작품은 특히나 반 메헤렌의 일이 있었던지라 대부분 판단을 미루거나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한데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과 고훈이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주장한다고 하니 분위기가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권위는 익히 알려져 있고.
고훈은 이 시대 최고의 미술가로 인정받는 동시에 네덜란드 미술로는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언론과 대중은 물론 미술계 유력 인사들조차 루이 갈렌의 주장은 믿지 않아도 루브르 박물관과 고훈의 이야기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 협회장 셰바송 씨몽이 깜짝 놀라 비서에게 되물었다.
“고훈 군이 기자회견을 연다고?”
“그렇습니다. 1시간 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입장 발표를 한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들은 것 있나?”
“아뇨. 쇼콜라티에에 문의 넣었지만 답변을 피했습니다.”
“흐음. 이거 정말 진품인지도 모르겠구만. 큰일이야.”
셰바송 씨몽이 한숨을 내쉬었다.
프랑스의 문화 예술품 사랑은 오랜 일이었다.
자연스레 문화부는 최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후속 작품으로 추정되는 <델프트의 여인>에 관심을 보였다.
국립 박물관 루브르가 루이 갈렌의 감정 의뢰를 받아들인 것 또한 그런 기대 속에 이뤄진 일이었다.
만약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면 문화부는 즉각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고 국외 반출을 금지하게 될 터.1)
네덜란드와의 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비서가 물었다.
“정치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이라 그러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우호적인 관계였다.
2019년 유럽 최대 항공사 에어프랑스-KLM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갈등이 있을 때조차 원만히 합의했고.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자화상 <기수>를 국보로 지정하는 문제도 프랑스가 한 발 물러서 원만히 풀어냈었다.
<기수>를 국보로 지정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프랑스가 양보했으니.
네덜란드는 큰돈을 들였으나 자국을 대표하는 거장 렘브란트의 <기수>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이때 프랑스가 보인 이례적인 태도는 양국간의 협력 관계가 굳건함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는데.
다시 10여년이 흐른 지금.
그렇게 견고하던 두 나라의 관계가 <델프트의 여인>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갈렌 쪽 일은 알아봤는가.”
셰바송 씨몽이 비서에게 물었다.
“어제 감정사들과 만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역시 그쪽인가.”
루이 갈렌은 계산이 빠른 남자였다.
본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로는 <델프트의 여인>을 보러 올 관객을 소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테고.
차라리 정부에 작품을 넘겨 보상금을 받을 듯했다.
프랑스 문화부 또한 그것을 바라니 거래는 원만히 이뤄질 터였다.
“한데.”
“한데?”
“런던 크리스티와도 연락 중인 게 확인되었습니다.”
셰바송 씨몽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무래도 경매에 올릴 생각도 하는 모양입니다.”
“경매에 내놓는 건 그렇다 쳐도 왜 하필 그쪽하고 연락을 해?”
“네덜란드가 참여하길 기대하기 때문 아닐지 추측해 봅니다.”
“이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국가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게 자명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델프트의 여인>을 둘러싼 논쟁이 과열되어 막대한 금액을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10여년 전 렘브란트의 <기수>가 1억 7,500만 유로에 낙찰되었으니 최소한 그 정도 금액을 기대하여 벌인 일이 분명했다.
“서두르세. 일단 고 군부터 만나봐야겠어.”
* * *
미술 평론과 기행문을 적절히 버무린 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김지우가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자리가 있을까?’
고훈은 항상 화제의 중심에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북적거렸다.
한창 논란 중인 <델프트의 여인>에 관하여 고훈이 입장을 밝힐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김지우 또한 글감으로 삼을 생각이었기에 자리를 찾았다.
“작가님.”
막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려던 차 잡지 보자르의 편집장이 반갑게 다가왔다.
“편집장님.”
“이번 글 기대가 많습니다.”
“또 그러신다. 엄청 부담이라구요.”
“하핫. 그래도 고 교수와 가까우시니 뭔가 귀띔이라도 들으셨을 것 같은데.”
김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요새 바쁜 것 같아서 연락 안 했거든요. 오늘 일도 갑자기 정해진 것 같고.”
편집장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당분간 소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소란이요?”
“아침부터 크게 다뤄졌잖습니까. 루브르 박물관과 고 교수의 검증이 거의 끝났다고.”
“네.”
“그 이후에 급하게 일정을 잡았으니 고 교수가 할 말도 정해져 있습니다.”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고요?”
편집장이 씩 웃었다.
“사실 기대하고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후속작이니까요. 또.”
“또?”
“아무래도 갈렌이 경매에 올릴 것 같습니다.”
“결국 그쪽으로 가나 보네요. 갈렌 갤러리가 그만한 작품을 걸어둘 만한 규모는 아니니까.”
“문제는 프랑스에서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네?”
김지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잠시 이목이 집중되었다.
편집장은 주변 눈치를 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이미 문화부에서 갈렌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 오늘 고 교수의 발언이 중요해지겠죠.”
온 세상을 해바라기로 물들인 화가 고훈이 <델프트의 여인>을 인정하면 그동안 물밑 작업만 이어오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정면으로 부딪칠 터였다.
“작품이 경매에 오르면 양국에서 경합이 들어갈 테고 개인 수집가가 나설 자리는 없어지겠죠.”
“자존심 싸움이 되겠네요.”
“네. 그리고 우리는 작가님의 필력 덕분에 매출도 확보할 거고요.”
김지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튼 프랑스에 또 하나의 걸작이 들어왔으니 잘 되었죠.”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지 모르잖아요.”
“하핫. 작가님도. 저번에 우리가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네덜란드 쪽에서 한발 물러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렘브란트의 <기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저기 루이 갈렌도 와 있군요.”
편집장이 회견장 안을 가리켰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크게 웃는 루이 갈렌을 찾아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에요?”
“평판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번 일에 욕심이 과하단 말도 돌고요.”
“네.”
“하핫. 그래도 델프트의 여인을 가져왔으니 그 일만큼은 인정해 줘야겠죠.”
“…….”
“잠시 후 고훈 작가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기자분과 내빈께서는 자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기자회견의 진행을 맡은 자비에르 루브르 박물관 회화 보존부서장이 안내 방송을 했다.
김지우는 편집장과 함께 자리해 태블릿을 챙겼다.
녹음 기능을 실행하고 포커스 기능을 더해 고훈의 목소리만 기록되도록 세팅하자 곧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수열과 앙리 마르소의 강요로 어렸을 적부터 몸관리를 한 고훈은 하얀 셔츠 위로도 다부진 선이 드러나 있었다.
선하고 다정한 인상과 근육질 몸은 내유외강한 인상을 풍겼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입니다.”
고훈은 인사를 간단히 마치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오늘 아침 루이 갈렌 씨가 언론에 공개한 내용에 오해 소지가 있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좌중이 동요했다.
루이 갈렌이 펼친 언론 플레이의 영향으로 많은 이가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믿은 탓이었다.
“델프트의 여인의 검증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한 기자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델프트의 여인에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생겨난 잡음을 뚫고 누군가 또 한 번 질문했다.
“루이 갈렌 씨는 99% 진품임이 밝혀졌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검증 과정과는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수치로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다만 의문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저는 그 그림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기자들이 아연실색했다.
고훈의 발언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델프트의 여인>을 국보로 지정하는 일은 시도조차 안 될 터였다.
프랑스에 또 하나의 걸작이 찾아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자들이 하나같이 루이 갈렌을 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예상 못 한 루이 갈렌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손을 저었다.
그가 시선을 피하자 기자들이 앞다투어 일어섰다.
“어떤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루이 갈렌의 발언이 거짓이었습니까?”
“갈렌 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품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까?”
갑작스레 쏟아진 질문에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훈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들과 루이 갈렌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순서를 지켜주십시오. 한꺼번에 말씀하시면.”
“어떻게 검증하실지 계획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자비에르 부서장이 기자들을 달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고훈을 향해 더 많은 질문을 건넬 뿐이었다.
‘너무 흥분해 있어.’
김지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 생활을 했었기에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예술품을 향한 집착과 루이 갈렌의 언론 플레이가 맞물려 기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훈아.’
김지우가 걱정스레 고훈을 바라보던 끝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검증 과정은 내일부터 공개할 예정입니다. 계획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과 협력해 분석할 예정입니다.”
“마우리츠하이스?”
기자들이 또 웅성거렸다.
“네덜란드에 있는 그 마우리츠하이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델프트의 여인을 옮겨가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회견장을 찾은 모든 이가 눈을 크게 떴다.
진품으로 판명되지 않았음에도 양국간의 신경전은 수위를 넘나들 정도로 치열했다.
프랑스에서는 <기수>를 양보했던 일을 언급하며, <델프트의 여인>만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델프트의 여인>을 네덜란드로 가져가겠단 고훈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그, 그럴 순 없어요!”
기자들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루이 갈렌이 소리쳤다.
고훈이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물었다.
“어째서 안 된다고 하시죠?”
“이미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이 맡은 일이지 않습니까.”
“기술적인 문제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져갔다가 진품으로 판명되면 다시 가져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책임지시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루이 갈렌 씨.”
고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상황은 검증팀과 상의도 없이 언론에 잘못된 내용을 전한 본인 탓입니다.”
사람들이 루이 갈렌에게 시선을 모았다.
“거짓을 저와 검증팀이 한 말처럼 꾸며낸 데에는 그만한 책임을 지셔야 할 거예요.”
고훈이 회견장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델프트의 여인은 엄중하고 신중히 검증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술품인 만큼 개인이나.”
고훈이 시선을 옮겨 노려보자 루이 갈렌이 분에 겨워 몸을 떨었다.
“어느 집단의 욕심으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프랑스를 두고 한 말이었다.
“방금 그 말씀은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신 겁니까!”
“델프트의 여인을 네덜란드로 보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자들이 유도 질문을 쏟아냈지만 고훈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 * *
“훈아!”
김지우는 혼란 속에 마무리된 회견장을 벗어나 고훈을 찾았다.
“어. 오셨었어요?”
“어쩌려고 그랬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알잖아.”
고훈은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조심해야 해. 너 지금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렘브란트, 마네, 모네, 반 고흐, 피카소와 같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약관도 되기 전에 온 세상을 노란색으로 물들인 입지전적인 미술가였다.
그의 말 한 마디가 미술계에 끼칠 영향력은 일찍이 한국화의 거목으로 인정받는 조부 고수열보다도 컸다.
“알아요.”
고훈이 김지우의 말을 막아섰다.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란 곳 알아요?”
해외로 흩어진 한국 문화재를 환수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었다.2)
김지우가 모를 리 없었다.
“프랑스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만 6,326점이래요.”
“…….”
“우리나라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프랑스 사람들의 인식부터 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맡았던 거야?”
고훈이 씩 웃었다.
“저 바빠요.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작품도 해야 하고.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맡을 리 없잖아요. 게다가 베르메르 작품이기도 하고.”
김지우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프랑스 사람들도 분명 필요한 일이라고 알아줄 거예요.”
앙리 마르소에게 박치기를 해 코피를 터뜨렸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너무나 커져 있었다.
김지우는 걱정을 애써 누르고는 씩 웃었다.
“멋진데? 나만 믿어! 내가 또 어? 사람 설득하는 건 자신있거든. 가만있어 봐. 당장 다음 주제로 다루려면.”
평소처럼 떠벌대는 김지우를 보던 고훈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 내용 쓰면 칼럼 끊기는 거 아니에요?”
“어?”
“보자르 약간 보수적이잖아요.”
“…….”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말에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내, 내가 그런 일로 겁먹을 사람처럼 보여? 나 데미안 카터 비리 파내려고 어? 잠입 취재도 했던 사람이야. 나, 날 뭘로 보고!”
김지우가 당황하는 모습에 고훈이 소리내어 웃었다.
* * *
1)참고자료:
佛, 시골집서 발견된 치마부에 작품 국보지정…30개월 반출금지, 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2019.12.25.
프랑스 정부는 약 300억 원에 낙찰된 이탈리아 유명 화가 치마부에의 <조롱당하는 그리스도>를 국보로 지정, 2년 6개월간 외국 반출을 금지했다.
상술했듯 프랑스는 국내외 작품을 가리지 않고 국보로 지정, 일정 기간 동안 국외 반출을 금지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1년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받았으나 실상은 5년 단위로 갱신되는 무상 영구 대여의 형태라 논란이 있었다.
2)2022년 2월 14일 기준 한국 문화재 214,208점이 환수되지 않은 채 미국(54,185점), 영국(8,967점), 독일(15,402점), 프랑스(6,326점), 러시아(5,346점), 중국(13,000점), 일본(94,341점) 등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