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5화
Golden Age
1. 황금시대(5)
분석 결과가 나왔단 소식에 다급히 찾은 루브르 박물관 연구실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축하드립니다. 갈렌 씨.”
“하하하핫! 저야 처음부터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새 작품이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후속 작품을 발견했으니 루이 갈렌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직접 연구원들에게 샴페인을 따라주며 기분을 내고 있다.
“아, 교수님.”
자비에르 부서장과 루이 갈렌이 날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훈 작가님이 인증해 주셨으니 이걸 어떻게 인사드릴지 모르겠어요. 하하하핫!”
“네.”
신이 난 루이 갈렌에게 적당히 답하곤 자비에르 부서장을 보았다.
“결과는.”
“안쪽에서 확인하시죠.”
작품 보존 부스로 들어서니 연구팀 직원이 <델프트의 여인>과 엑스레이 분석 사진을 비교해 주었다.
“여길 보시면 됩니다. 속눈썹 흔적이 남아 있죠? 섬세하지만 붓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발견되었던 흔적이 <델프트의 여인>에도 남아 있다.
다만 또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주근깨.”
“네. 이번 조사로 새롭게 발견된 점입니다.”
속눈썹, 주근깨와 같은 세부 묘사가 없다는 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라는 주장의 근거였다.
그러다 2020년 연구를 통해 속눈썹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잠시 흔들렸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속눈썹에 이어 주근깨까지 발견된 것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는 주근깨가 없었어요.”
고개를 돌려 연구원을 보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랬죠. 하지만 발견 못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워낙 작으니 속눈썹처럼 도중에 떨어졌을 수도 있고요.”
“하하하핫! 그게 뭐 대수입니까? 이 작품이 진품이란 사실이 중요하지요.”
루이 갈렌이 웃으며 동조를 구했지만 다들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아직 진품이라고 확정할 단계가 아님을 인지한 탓이다.
“실존 인물이었다고 가정하면, 주근깨가 없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생겨났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자비에르 부서장이 상황을 풀어내고자 또 다른 가능성을 던졌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당시엔 자외선 차단제도 없었으니 주근깨는 어릴 때부터 많이 났어요.”
동양인에게는 드문 현상이나 서양인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더군다나 하녀 신분이었으니 햇볕에 더 많이 노출되었을 거고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정도 나이라면 있어야 해요.”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면 말이다.
“하긴. 그래서 트로니로 판단했었죠.”
자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일입니다.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인 건 속눈썹이 표현된 걸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루이 갈렌이 다급히 주변을 설득하려 했다.
“의문이 남아 있는데 섣불리 판단할 순 없어요.”
“아니. 그럼 발표를 안 하시겠단 말입니까?”
“확실히 하자는 뜻이에요. 갈렌 씨에게도 그 편이 좋지 않겠어요?”
“끄응.”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루이 갈렌은 입을 다물고 앓는 소리만 냈다.
“부서장님,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분석한 자료 요청할 수 있을까요?”
2020년에 속눈썹의 존재를 발견했던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라면 뭔가 얻어낼 수 있을 거다.
“안 됩니다!”
루이 갈렌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제가 왜 루브르에 의뢰했는데요. 네덜란드가 붙으면 분명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겁니다.”
“갈렌 씨가 구입한 물건이니 빼앗길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쪽에 보여주지도 않는 태도 때문에 괜한 불화를 사느니, 협조를 구해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게 갈렌 씨에게도 좋아요.”
루이 갈렌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내 작품입니다.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요!”
그의 외침에 연구실이 고요해졌다.
진품이라면 <델프트의 여인>은 가격을 추정할 수 없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보로 대우받을 작품이다.
2022년, 네덜란드 정부가 로스차일드 혈통의 프랑스인에게 렘브란트의 <기수>를 1억 7,500만 유로(약 2,300억 원)에 사들여 오기도 했는데.1)
그 일을 상기하면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루이 갈렌이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갈렌 씨.”
차분히 이야기를 풀었다.
“이 그림을 진품으로 믿으시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진품이면 국가간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2021년 일을 기억하시겠죠?”
“무슨.”
“프랑스 정부에서 렘브란트의 기수를 국보로 지정하려다가 포기한 일이요. 덕분에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사들여 국보로 지정할 수 있었는데, 만일 그 일이 틀어졌다면 양국 사이에 어떤 갈등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
“이 그림의 소유권은 갈렌 씨에게 있지만 신중히 접근해야 함을 잊지 말아주세요.”
결국 <델프트의 여인>은 작은 갤러리가 감당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사실은 루이 갈렌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고, 그가 바라는 건 아마도 보상금일 터다.
“고 교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델프트의 여인을 찾아오라는 서명 운동도 벌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갈렌 갤러리 이미지에도 좋지 않은 일이에요.”
자비에르 부서장도 거들어 설득하자 루이 갈렌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내려놓았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 * *
오늘도 느즈막이 귀가하니 차시현이 냉장고에서 커피를 꺼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 때문인데.”
입을 삐죽 내밀고 팩에 든 커피를 유리잔에 따른다.
“누구 때문인데?”
“너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이자 차시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생각한 대학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어. 공부하는 건 괜찮아. 좋아.”
“그런데?”
“과제는 공부랑 다르잖아?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래! 밤을 새우고 머리를 쥐어 뜯어도 안 나온다구. 이젠 언제 푹 잤는지 기억도 안 나.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내가 작업실에서 썩어가도 되는 거야? 어?”
“…….”
말투와 표정이 너무 절절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어. 내가 생각했던 유학은 이런 게 아니었다구.”
“어땠는데?”
“너랑 비다, 블랑쉬랑 그림 그리고 신기한 데도 가보고 전시회도 다니고 내가 몰랐던 이야기 알고 싶었어. 적어도 작업실에 틀어박혀 과제만 하는 건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과제로 내주었던 패턴 때문에 고생 좀 했던 모양이다.
이번에 수강생들에게 내준 벽지 과제는 우수작을 선별해 업체와 연결해 주려고 마련한 일이다.
기껏 대학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해도 좀처럼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진로에 도움이 되길 바랐는데 부담을 주었나 보다.
“안 해도 돼.”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웃으며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판단하는 거야. 학교가 요구한 일이든 내가 시킨 일이든 본인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안 해도 돼. 그게 건강을 잃는 일이면 더더욱.”
커피가 든 잔을 시현이에게서 멀리 옮겼다.
“대신 진지하게 고민해야지.”
“…….”
“난 다양한 일을 경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네 생각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는 것 같으면 안 해도 돼. 정말로.”
“시간 낭비라고 한 적 없어. 그냥 더 많은 걸 보고 싶은 거야.”
방향은 달라도 여러 일을 경험해야 한다는 바탕은 같다.
“괜찮아.”
“그래도 될까?”
“그럼. 성적은 못 받겠지만.”
“야!”
“대신 다른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책상을 짚고 발끈한 친구를 보며 웃어 주었다.
“다른 거?”
“응. 대학 커리큘럼이나 내 강의로는 채워주지 못하는 거.”
시현이라면 분명 시간 낭비를 하진 않을 거다.
그림을 좋아하는 만큼 노력할 테고 어떤 방향으로든 뭔가 얻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너야말로 왜 이렇게 늦어? 델프트의 여인 때문에?”
“응. 생각보다 복잡해. 아무래도 네덜란드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거긴 왜?”
“확인할 것도 있고 가볼 곳도 있어서.”
“베르메르 생가라든가?”
“응. 마침 대니얼이 답사하러 간대서 같이 가려고. 모레 출발해.”
“하아. 좋겠다.”
“왜?”
“넌 하고 싶은 거 공부하잖아.”
“그럼 너도 교수 해. 생각보다 재밌어. 연구 주제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어떻게 그래.”
“그럼 대학원 갈래?”
“대학원?”
고개를 끄덕이니 잠시 고민한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거 해도 돼?”
“기본 수업은 있지만 뭘 연구할지는 네 소관이야. 지도 교수가 조언해 줄 순 있겠지만.”
“웅…….”
차시현이 식탁에 엎드렸다.
“모르겠어. 지금은 작업실만 아니면 어디든 좋아.”
“그럼 같이 갈래?”
“네덜란드?”
“응.”
녀석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그러나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쉰다.
“안 돼. 학교 가야 한단 말이야.”
“선생님들께는 내가 말해둘게. 내 일 도와주는 걸로.”
“……그래도 돼?”
“양해를 구하는 거지.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안 내켜?”
“아니! 좋아! 나도 갈래! 뭐 하면 되는데?”
“딱히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대학원생 두 명하고 같이 가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지켜봐도 좋고. 도와도 좋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사랑해!”
차시현이 식탁 위로 반쯤 올라서서 와락 끌어안았다.
이럴 때마다 좀 당황스럽다.
* * *
“이제 일어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니 할아버지가 안락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계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시다.
“어제도 늦더니 일이 거의 마무리된 모양이구나.”
“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으니 할아버지도 고개를 갸웃하셨다.
“여기 봐라.”
할아버지가 핸드폰을 넘겨주셨다.
뉴스 기사다.
[루이 갈렌, “99% 진품임이 확실하다.”]
지난 8일 갈렌 갤러리 대표 루이 갈렌(46)이 최근 본인이 구입한 <델프트의 여인>(가제)이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루이 갈렌은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과 고훈 교수가 제시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며 “신중할 뿐 모든 일은 마무리되었다”고 덧붙였다.
미술계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과 거장 고훈의 증언은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는 데 무게를 실어주기에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은 “고훈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증명해낼지 기대된다”는 코멘트를 남겼으며 미술품 수집가로 알려진 더들리 부부 또한 이에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델프트의 여인> 반환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람이…….”
“뭔 문제가 있나 보구나.”
“아직 확정나지 않았어요. 알겠다고 하더니 그새를 못 기다리고.”
어떻게든 이 이슈를 확산시켜 <델프트의 여인>의 가격을 높이려는 수작일 거다.
“할아버지, 저 바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밥도 안 먹고?”
“괜찮아요. 오늘은 저녁 전에 들어올게요.”
“그래. 뭐라도 챙겨 먹고.”
“네.”
* * *
1)참고자료: 네덜란드의 국보 렘브란트 자화상 ‘기수’ 2331억원에 고국으로, 서울신문, 임병선, 202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