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08화 (40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화

Golden Age

1. 황금시대(4)

대니얼 스콧을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베르나데트를 보러 앙리네에 잠시 들렀다.

“까꿍.”

몇 주 전만 해도 까꿍을 하면 좋아서 자지러지던 베르나데트가 오늘은 별 반응이 없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보여줘도 웃지 않는 걸 보니 벌써 다 큰 듯하다.

“천재 아니에요?”

“천재?”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손으로 가려도 없어진 게 아니란 걸 아는 거잖아요. 천재가 분명해요.”

미셸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자 앙리가 대신 호응했다.

“내 딸이니 당연하지.”

“아니에요. 분명 미셸 닮아서 그럴 거예요. 그렇지, 베르?”

베르나데트가 웃으며 두 팔을 휘저었다. 자기도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뭐야?”

앙리가 심통 부리며 물었다.

“베르나데트 보러 왔죠.”

“흥.”

“잘 왔어. 요새 바쁘다고 들었는데 어때?”

“한숨 돌렸어요. 루브르 박물관에서 심층 촬영하는 중이거든요.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할 일 없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뭔가 있어서 그런 거야?”

“네. 가능성은 있어 보여요.”

<델프트의 여인>을 분석한 이야기를 꺼내니 미셸과 앙리 모두 놀란 눈치를 보였다.

당연히 위작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무리도 아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세상에.”

“아직은 살펴봐야겠지만요.”

베르나데트가 딸랑이를 흔들었다.

“더 듣고 싶은데. 점심 먹고 갈 거지?”

미셸이 고맙게도 점심을 권했다.

나 역시 마담 셰리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은 마르소 저택 조리장의 실력을 즐기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다.

“미안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아쉽다.”

“대니얼이 파리로 찾아왔어요.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대요.”

“대니얼 스콧?”

앙리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 일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 웬일로 관심을 보인다.

“네. 대니얼 스콧.”

“그자가 왜.”

“황금시대를 주제로 다큐 찍는대요. 저번처럼 자문 상대가 되어 달라는 것 같은데 만나봐야죠.”

“빌어먹을.”

“앙리.”

미셸이 나쁜 말을 꺼낸 남편을 탓했다. 귀여운 딸 앞에서 말을 조심하라는 눈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다큐 관련해서 스콧 감독에게 제안서를 보냈는데 거절받았거든.”

미셸이 꺄르르 웃는 베르나데트를 안으며 말했다.

“아, 그거 궁금했어요. 갑자기 웬 다큐에요?”

미셸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앙리를 볼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궁금해서 앙리를 쳐다보니 으레 그러하듯 턱을 들고 오만하게 답했다.

“위대한 앙리 마르소. 부제 천사가 태어났다.”

“……네?”

“제목이다.”

홈비디오를 찍고 싶었던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일…….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거절할 리 없지.”

하던 일이 없었어도 아마 위대한 앙리 마르소란 다큐멘터리를 찍진 않았을 것 같다.

“기다려 준다고 전해.”

선심 쓰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기가 권한 일을 거절할 리 없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다.

“일단 말은 해둘게요.”

* * *

오랜만에 만난 대니얼 스콧은 여전히 삐쩍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하자 싱긋 웃는데 건강이 걱정스럽다.

“더 마른 거 아니에요?”

“글쎄. 그래 보여?”

“네. 잠도 못 잔 것 같고.”

다크서클이 진하다.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재밌는 일이 있거든.”

“재밌는 일?”

“주문부터 하자고.”

양파 스프와 샐러드, 안심 요리를 주문하고 와인도 한 잔씩 추가했다.

점심에 와인이라니, 할아버지가 아신다면 펄쩍 뛸 일이다.

“요새 베르메르 작품이다 뭐다 시끄러운 것 같던데. 어때?”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 걸 보면 현재 최대 관심사이긴 한 모양이다.

“아직은 장담할 수 없어요.”

“아직은?”

“내부에서는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

대니얼이 눈을 크게 떴다.

앙리, 미셸과 똑같이 의외라는 반응이다.

“저도 의심스럽긴 한데 재료도 17세기에 사용되었던 거고. 연대 측정 결과도 300년 이상 된 걸로 나오더라고요.”

“흐음.”

대니얼이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놓았다.

“이게 뭐예요?”

“이번 다큐멘터리 소재.”

대니얼이 영화로 다룰 만큼 관심 있는 내용이니 분명 흥미로운 내용일 거다.

잔뜩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기자 베르메르의 생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하네요. 관련 기록이 많진 않을 텐데.”

“어지간한 건 다 찾았다고 봐.”

“이거 정리하느라 다크서클이 진해졌나 봐요. 책으로 묶어도 되겠어요.”

“하핫. 맞아. 몬티아스가 아니었으면 아마 죽었을 거야.”1)

“지금 연구된 건 거의 그 사람이 찾아낸 내용이니까요. 그래도 대단하네요.”

다시금 쭉 살폈다.

없는 형편에 열심히 모은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미 아는 내용이었고 새로운 정보는 많지 않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더더욱.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학자가 베르메르의 흔적을 좇았으니 사실상 알 수 있는 건 전부 찾았다고 봐야 할 거다.

새롭게 발견된 일이 없어도 무리는 아니다.

“역시 다른 이야기는 찾기 힘들었나 봐요.”

“그렇더라.”

실망한 눈치는커녕 의기양양해 보인다.

“뭔가 더 있나 봐요?”

“말했잖아. 재밌는 일이 있다고.”

대니얼이 또 하나의 서류를 넘겨주었다.

“이건?”

“마리아 틴스도 부모였다는 증거. 꺼내 봐.”

마리아 틴스라면 베르메르의 장모 이름이다.

“처음 결혼 문서에는 이 문구가 없었어.”

1650년부터 1656년 12월 31일까지 델프트 시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의 등록부다.2)

딸의 결혼에 반대했던 마리아 틴스가 결국 베르메르와 딸이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한 기록이다.

두 사람은 베르메르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시장 여관에서 동거했었다.

“베르메르와 딸이 메헬렌 여관에서 살고 있다고 증언해 주는 내용이네요. 이게 왜요?”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이라 의아해하며 고개를 드니 대니얼 스콧이 눈을 깜빡였다.

너무 빤히 보길래 얼굴에 손을 대니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읽었어?”

“네덜란드어잖아요.”

“300년 전 네덜란드어지.”

새 삶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깜빡하고 말았다.

“단순한 문장이니까요. 상황도 알려줬고.”

“그래? 흐음. 그 정도는 해야 박사라는 건가.”

다행히 잘 넘어간 모양이다.

사실 말 그대로 단순한 문장이고, 대니얼이 생각한 대로 연구할 때 옛말을 아는 게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왜 결혼을 반대했는지 이유를 찾아봤는데 그럴 만하더라고.”

“나이 문제도 있었고 종교관도 달랐죠.”

“정확해.”

과거 네덜란드는 남자 나이가 25살이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해 주었는데, 당시 베르메르는 20살이었다.

그때 기준으로는 결혼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였던 것.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사랑했지. 개종까지 했으니까.”

개신교인이었던 베르메르는 카테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다.

그러고도 장모 마리아 틴스는 결혼 증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5일 뒤에 이런 글을 적어서 딸과 베르메르의 관계를 인정해 주었다.

“아무튼 재밌는 건 이 문서에서 카테리나가 결혼하기 전부터 집을 나와 살고 있었다는 거야.”

“어.”

생각해 보면 그렇다.

결혼식 당일이었던 4월 20일 이전부터 카테리나가 메헬렌 여관에서 베르메르와 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왜 그랬을까?”

“결혼을 반대하니까 도망간 거 아닐까요?”

“글쎄. 나라면 좀 더 멀리 갔을 거야.”

“……확실히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지역 유지였던 마리아 틴스는 델프트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거다.

두 사람이 사랑의 도피를 하기에 델프트는 너무나 작은 마을이었다.

“지역 유지였던 마리아 틴스는 충분히 딸을 데려올 수 있었어.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음.”

“그래서 의문이 하나 들었지. 마리아 틴스는 왜 식도 올리지 않은 딸이 베르메르와 동거하는 걸 눈감아 주고 있었을까.”

확실히 이상하다.

마리아 틴스는 결혼에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 당시 이미 자유연애가 어느 정도 이뤄지긴 했지만, 그만한 집안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결혼은 반대했지만 베르메르에게서 딸을 데려오지 않았다니 이해가 안 된다.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대니얼 스콧이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생각을 이어나가니 문득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쳤다.

“빌렘.”

대니얼 스콧이 씩 웃었다.

“역시 바로 나오는구만.”

빌렘 볼네스.

베르메르에게는 처남이었고, 마리아 틴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아들이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심지어는 어머니 마리아 틴스를 폭행했단 기록도 있다.

“카테리나에게는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어. 베르메르를 사랑한데다 집에는 빌어먹을 알코올 중독자도 있었으니까.”

“상속자 명단에서 빼버릴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네?”

“상속권을 박탈하니까 더 날뛰기 시작했잖아. 어머니와 누이를 칼로 찌르려고도 했고.”

“그랬죠.”

“그런 장모와 아내를 베르메르가 보호한 거야. 몬티아스가 잘 정리했더라고.”

뭔가 놓친 기분이다.

“처가살이하느라 기죽어 살았다는 내용하고는 좀 다르지. 도리어 마리아 틴스와 카테리나는 베르메르를 든든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

“……그렇죠.”

“아이만 15명을 가졌다고 하니 부부금슬도 좋았고. 위기를 극복해서 사이가 더 끈끈해진 건가?”

확실히 대니얼의 말대로다.

베르메르와 카테리나 사이에는 15명의 아이가 있었다.

4명이 죽긴 했지만 11명이나 장성했고, 그건 두 사람 사이가 아주 돈독했단 뜻이다.

위협당하는 아내와 장모를 위해 칼과 몽둥이를 든 처남을 막아설 정도로 사랑과 신뢰가 깊었다.

“베르메르를 다루는 데 새로운 관점이 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그런 베르메르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면 작품 속 여인과 베르메르가 밀월 관계일 수도 있다는 추측과는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니 대니얼 스콧이 고민에 빠졌다.

“그건 이상하네.”

한쪽에서는 애틋한 부부, 다른 한 쪽에서는 불륜이라고 말하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내 추측이 더 신빙성 있어 보여. 애초에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건 그래요. 사료를 기반한 거니까.”

“애초에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인 확실한 증거가 있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한테 속눈썹이 있었단 사실 알고 있어요?”

“아니. 처음 듣는데.”

“모나리자 경우랑 비슷해요. 정밀 감식한 결과로 속눈썹이 그려졌는데 나중에 떨어졌단 게 밝혀졌어요. 만약 델프트의 여인이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이라면 아마.”

“거기에도 흔적이 남아 있을 거란 말이지?”

“그렇죠.”

부우웅- 부우웅-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루브르 박물관의 자비에르 부서장이다.

“네.”

-교수님, 분석 결과 나왔습니다.

“빠르네요. 어때요?”

-속눈썹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을 찾은 것 같습니다.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 * *

1)『Vermeer and His Milieu: A Web of Social History』의 저자 몬티아스는 델프트 시립 기록 보관소에서 베르메르와 그의 가족과 연관된 454개 이상의 문서를 발굴해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2)5 en 20 april 1653. Den 5den Apprill 1653: Johannes Reyniersz. Vermeer J[ong] M[an] opt Marcktveld, Catherina Bolenes J[ong] D[oc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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