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화
Golden Age
1. 황금시대(3)
루브르 박물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한 지도 나흘째.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에 <델프트의 여인>이란 이름을 임시로 붙여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살피면 정말 베르메르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이 <델프트의 여인>에 사용된 안료가 17세기에 사용되었던 물건이라고 하는데다.
스푸마토 기법을 활용한 인물 표현력도 베르메르만큼 훌륭하다.
정말일까.
이 작품이 정말 17세기에 그려졌다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성 루가 길드의 최연소 이사일 정도로 살아생전 사회적 입지를 갖춘 인물이었으나 화가로서는 그리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다.1)
베르메르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헐값에 거래되다가 18세기, 19세기 초에는 거의 잊혔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미술사가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그러니 17세기의 누군가가 베르메르인 척 이런 작품을 그릴 리도 없다.
<델프트의 여인>이 베르메르의 작품일 가능성은 또 있다.
만약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였다면 ‘소녀’가 나이를 먹은 모습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베르메르뿐이다.
트로니는 화가가 생각하는 어떤 인물의 전형, 즉, 상상 속 인물이니 말이다.
베르메르의 작품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건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일.
이 작품이 진품인지 이제는 정말 알 수 없게 되었다.
“교수님.”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보존부서의 자비에르 부서장이 다가왔다.
“네.”
“캔버스 성분이 일치하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비에르가 넘겨준 검토 결과지를 확인해 보니, 기존 베르메르의 작품에서 사용된 캔버스와 <델프트의 여인>이 그려진 캔버스의 성분이 일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확실한가요?”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재차 확인하니 자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이 정도로 근거가 많이 나오면 믿어야겠죠. 하지만.”
“하지만?”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어떤 점이.”
홀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 책상 앞으로 가 베르메르의 작품을 검색했다.
곧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이 책상 위에 비쳐졌다.
“레이스 뜨는 여인, 우유를 따르는 하녀, 연애편지 등 베르메르의 작품 속 인물은 보는 사람과 분리되어 있어요.”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곤 했죠. 그래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더 특별하고요.”
내가 할 말을 자비에르가 대신 꺼냈다.
“맞아요.”
베르메르와 그의 그림 속 등장인물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레이스를 뜨거나 우유를 따르는 등 대부분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관객 혹은 작가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런 점에서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과 차별된다.
<델프트의 여인> 또한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마치 화가와 대화 또는 교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혼동이 온다.
“하지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델프트의 여인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특별 취급도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비에르 부서장의 말대로다.
베르메르에게 이 여자가 특별한 존재였다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
“네. 그래서 의심되면서도 혹시나 싶더라고요. 하나 더 보실래요?”
<델프트의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리고 <우유를 따르는 하녀> 그림을 나란히 두었다.
때가 탄 노란 의복과 머리에 두른 천 모두 일치한다.
“당시 하녀들이 입던 옷이군요.”
“네. 이 여성이 실존했다면 아마 베르메르의 집안일을 돌봐주었을 거예요.”
“소설처럼 말씀이십니까?”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쓴 『진주 귀고리 소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상상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근거를 기반한 이야기니까요. 적어도 이 여성이 실존했던 인물이라면 고용인과 하녀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자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또 하나의 의문점이 남아요.”
“계속하시지요.”
“하녀였던 그녀가 진주 귀걸이라는 비싼 장신구를 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아요?”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한 모양이다.
“베르메르는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길 좋아했어요. 모델이 자신을 의식하질 않길 바랐죠. 그래서 하녀에게 일부러 진주 귀걸이를 주었다면 정말 특별한 이유가 있었단 말이 돼요.”
“예를 들어 연인 관계라든가.”
고개를 들자 자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를 들면 말이죠.”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요. 그래서 그런 소설이 나왔던 거고요.”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그런 추정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음. 하지만 장모가 가만 있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소설 내용처럼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메르는 장모 덕을 상당히 많이 봤는데, 장모가 사람을 소개해 주어 작품을 조금이라도 판매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요.”
“장모 덕에 길드에 가입했다고 들었습니다.”
베르메르는 다섯 살 연상이었던 카타리나 보네스와 1653년에 결혼했다.
그림 판매권을 독점했던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한 것도 같은 해였으며 이에 장모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추정된다.
“베르메르는 작품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려고 했어요.”
“관찰자일 뿐이었죠.”
자비에르가 조금 전 대화를 언급하며 호응했다.
“네. 자기를 감추고 철저히 관찰자로 지냈던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그의 외가가 지폐위조범이었다는 것이고 남은 하나는 무척 가난했다는 거죠.”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자체도 힘들었다고 해요. 8년 뒤에나 혼인신고를 했다고 하니까요. 아마 처가살이를 하는 내내 본인이 그리고 싶은 작품보다는 장모가 연결해준 사람들에게 팔 만한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베르메르의 작품은 서민적이지 않습니까?”
“부유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그림도 있죠. 저는 베르메르의 서민적 작품을 그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봐요. 사회에서도 가족 내부에서도 주체적이지 못했으니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 휴식을 취한 거죠.”
고개를 돌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델프트의 여인>이 진품이라면 소녀는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음.”
“평생 장모에게 순종하고 의지해 살았던 베르메르가 하녀와 만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무척 비밀스러운 관계였겠군요.”
“네.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는 말이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베르메르와 연인 관계였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증거를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장모가 이 작품을 봤다면 그냥 지나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교수님께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라고 보시는 거군요.”
“네. 그런데 이런 그림이 나타나니 확신할 수 없네요.”
<델프트의 여인>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조사했으니, 17세기에 사용된 물감과 캔버스란 건 사실일 것이다.
또 베르메르가 살아생전에 이름이 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니 당시 사람이 베르메르의 위작을 그렸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정말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이란 말인데.
당시 베르메르의 상황을 고려하면 마냥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 어떤 방향으로 검증하실 계획이신가요?”
“이것도 봐주실래요?”
디지털 현미경 기술과 엑스레이로 관찰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사진을 자비에르 부서장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2020년에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연구진이 밝혀낸 내용이에요. 속눈썹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 표현되어 있었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자비에르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신체 세부 묘사가 적은 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어요. 주근깨라든가 점, 머리카락, 눈썹 같은 세부묘사가 배제되었으니까요.”
“그게 베르메르가 생각했던 인물상이었단 말이었죠.”
“네. 그런데 사실은 세부 묘사가 있었던 거예요. 비슷한 예가.”
“모나리자.”
역시 회화 보존 부서의 담당자답게 잘 알고 있다.
“정확해요. 그림에 입체감을 주고자 층을 나눠 작업하곤 했는데, 윗 표면에 그렸던 눈썹이 떨어져 나갔던 거죠. 그 덕에 더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지만요. 아무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면.”
자비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델프트의 여인에도 속눈썹의 흔적이 남아 있겠군요.”
“네. 속눈썹이라든가 눈썹, 머리카락 등 세부 묘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주셨으면 해요. 만약 그마저도 일치한다면.”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 * *
집에 들어서니 거실 의자에 앉아 주무시고 계신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틀어져 있는 TV를 끄니 할아버지가 눈을 뜨셨다.
선잠을 자고 계셨던 모양이다.
“으음? 훈이냐.”
“네. 들어가서 주무세요.”
“끄응.”
기지개를 켜고 시간을 확인하시더니 고개를 저으셨다.
“요새 계속 늦는구나.”
“내일부턴 좀 쉬려고요. 검증 방향을 잡았으니 당분간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할애비는 들어가서 마저 자야겠다.”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침실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방태호가 내일 시간 날 때 갤러리로 찾아와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낼 힘이 없어 전화를 걸자 곧장 받는다.
-안 자고 있었어?
“네. 지금 들어왔어요.”
-검증 과정이 쉽지 않나 보네.
“내일부턴 좀 쉬려고요. 무슨 일이에요?”
-대니얼 스콧 감독이 찾아왔어. 다큐멘터리 일을 제안하고 싶대. 빈센트 때처럼.
“다큐멘터리.”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앙리가 다큐멘터리를 찍는단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델프트의 여인>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덜란드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이번에 화제가 된 베르메르 중심으로. 네가 전문가니 자문도 받고 출연도 부탁하고 싶은 눈치더라.
“촬영도 그쪽에서 하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델프트의 여인>에 대한 단서를 좀 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을 것 같아요. 내일 몇 시에 갈까요?”
-편할 때 얘기해 주면 감독한테도 전해둘게.
“그럼 점심 같이 먹으면서 얘기해요. 1시가 좋겠어요.”
-1시. 오케이.
“참, 아저씨.”
-응?
“앙리도 다큐멘터리 찍는다고 하던데 이야기 들은 거 있어요?”
-아니? 처음 듣는데?
나랑 방태호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뭘 준비하는지 모르겠다.
-알아볼까?
“아니에요. 직접 물어보면 되죠. 내일 봬요.”
통화를 마치고 앙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베르나데트가 깰 수도 있으니 내일 하는 게 좋겠다.
* * *
1)기존에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작가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가 진행되며 30세 이전에 어느 정도 성공한 작가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를 대표하거나 지역에서 이름을 떨친 정도는 아니었으며 사후 백여 년간 잊혔기에 모방 작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여 본문과 같이 서술했다.
성 루가 길드는 당시 그림 판매권을 독점하고 있던 조합으로, 화가로 작품을 판매하려면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