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06화 (40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화

Golden Age

1. 황금시대(2)

루브르 박물관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데 좀처럼 진정할 수 없다.

“빨리 가죠.”

“어지간히 기다렸던 모양일세.”

차에 오르자마자 재촉하니 쥘 로카르 대학총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베르메르잖아요.”

베르메르는 네덜란드, 아니, 인류의 보배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렘브란트의 <야경>만큼이나 유명한데.

북유럽의 모나리자란 별명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우며 그를 증명하듯 소설, 영화, 연극 등 여러 예술 장르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나 역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빠져 한동안 베르메르의 기법을 연구했고 말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소녀.

관객을 향한 눈동자와 살짝 열린 입술 그리고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 귀걸이까지.

베르메르의 색채감과 표현력은 보는 이를 화폭 속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베르메르에게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었다니, 진정할 수 있을 리 없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네덜란드 여론도 시끄럽더군.”

“진품이라면 국보급 물건이니까요. 괜한 싸움 일기 전에 네덜란드 쪽이랑 협업하는 게 좋아 보여요.”

“고 교수 말대로 해야 할 텐데 입수자가 원체 고집을 부리는 모양이네.”

“그렇겠죠. 그 사람도 욕심이 날 테니까요. 그보다 루브르에서는 뭐라고 해요?”

“음.”

쥘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위작이 너무 많으니 말일세. 반 메헤렌 같은 경우도 있었고.”

“반 메헤렌.”1)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꾼으로 선정되었던 남자.2)

1889년에 태어난 반 메헤렌이 화가로 활동할 당시 네덜란드 비평가들은 인상주의를 무척 높이 평가했다.

그러다 보니 고전적 화풍을 선보인 반 메헤렌은 매번 혹평을 받았고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반 메헤렌은 비평가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데.

그것이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베르메르의 위작을 만들겠단 생각이었다.

비평가들이 안목을 갖추었다면 그것이 반 메헤렌의 위작임을 알아챌 테고, 그러지 않다면 위작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여겨 칭송할 테니 망신을 주려는 의도였을 터.3)

복수를 결심한 반 메헤렌은 4년간 베르메르의 화풍을 연구하고 17세기에 제작된 화구를 구했으며, 심지어는 오래된 작품으로 보이기 위한 화학처리 방법도 연구했다.

거기에 당시 학계는 베르메르가 남긴 작품이 워낙 적은 탓에 발견되지 않은 작품이 있을 거라 추측해서 베르메르의 작품을 찾아다녔는데.

때마침 반 메헤렌이 본인의 그림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발표하니 본인이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 외에도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공개된 그림은 대부분 위작이 많아서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게 우선이니 힘 좀 내주시게.”

“그럼요.”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자 직원이 곧장 그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루브르에는 여덟 개의 보존 부서가 있으며 박물관 연구, 수집품 연구, 재료 및 기술 연구를 주로 진행하는데.

그들 각 부서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나와 같이 외부 전문가도 초청한 듯하다.

아는 얼굴이 많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루브르 박물관 회화 보존 부서장 자비에르 부와예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앙리는 아직인가 봐요.”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자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일이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계시다고.”

들어본 적 없다.

자세히 물어보려다가 앙리가 그렇게 친절히 답변할 리도 않았을 테니,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정말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인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작품은.”

“저쪽입니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보존실로 들어서자 광장에 서 있는 한 여인이 이목을 끌었다.

“오오.”

쥘 총장이 감탄했다.

나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는데.

진품인지는 몰라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선명한 색채감만은 베르메르의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수자가 아무 근거 없는 얘기를 꺼내진 않은 듯하다.

“이게.”

“네. 배경은 델프트시의 옛 시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물을 부각한 그림이라 배경이 차지하는 공간은 적지만, 어디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거다.

베르메르는 고향 델프트를 평생 떠나지 않았으니, 분명 델프트 어딘가일 테고 건물 외관도 델프트의 옛 시청 건물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배경 따위는 나중 문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주인공이 나이를 먹은 듯한 모습으로 서 있기 때문.

“실존인물이었나?”

쥘 총장이 말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소녀는 지금까지 특정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베르메르가 살던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가공의 인물을 그리는 트로니(Tronie)가 유행했는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또한 작가 개인의 상상 속 인물 혹은 이상적인 인물상, 혹은 어떤 인물의 전형이라고 추측해 왔다.

그런데 그 소녀가 나이를 먹어 델프트의 옛 시청 앞에 서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허어. 이것 참.”

쥘 총장이 난감한 심경과 놀라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그 소녀와 베르메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모든 의문은 이 그림이 진품인지 확인한 뒤에 생각할 문제다.

“입수 경로는 어떻게 돼요?”

“루이 갈렌 씨가 델프트의 잡화점에서 발견했습니다.”

“루이 갈렌이라면.”

“네.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분이죠.”

갈렌 갤러리라면 유명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갤러리다.

그런 곳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안목 또한 갖췄을 테니, 그 사람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다.

“마침 저기 계시네요. 갈렌 씨?”

자비에르가 손을 흔드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한 중년이 다가왔다.

키는 작지만 팔다리와 가슴이 두꺼워 다부져 보인다.

“파리 보자르의 쥘 로카르 총장과 고훈 교수입니다. 총장님, 교수님, 갈렌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루이 갈렌 씨입니다.”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제가 두 분을 몰라뵐 리 있겠습니까.”

루이 갈렌이 호탕하게 웃었다.

느긋하게 인사를 나누기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

“작품 구하실 때 일을 여쭙고 싶은데요.”

“얼마든지 대답해 드리죠.”

“잡화점에서 구하셨다고.”

“로랜드 홀스타인 거리에 있는 허름한 곳이었죠.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예상치 않는 곳에서 있더군요.”

루이 갈렌의 너스레에 쥘 총장이 못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인장은 교수님과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몸져 누워 지금은 본인이 운영한다고 말하더군요. 이것저것 보여주는데 신통한 물건은 없었죠.”

사설이 길다.

“볼 게 없겠다 싶어서 나가려던 차에 입구 옆에 놓인 그림이 눈에 띄더군요. 찬장에 가려서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도 거기 계속 있었을 겁니다. 제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요. 하하핫!”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어떻게 보관되고 있던가요?”

“정확히 찬장 뒤에 반쯤 가려 있었죠. 이 그림은 뭐냐고 물었더니 횡설수설하더이다. 아마 매장을 물려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자기도 몰랐던 거겠죠.”

“네.”

“자세히 보고 싶어서 꺼내달라고 하니 그러면 사야 한다고 합디다. 얼마를 원하냐고 물으니 1,000유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게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이면 1,000만 유로로도 부족할 것이다.

“딱 보니 이 그림의 가치를 전혀 모르더군요. 알았으면 그렇게 방치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500유로를 불렀지요.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그나마도 반값이라니, 진품이라면 잡화점 주인에게는 정말 안 된 일이다.

“진품으로 보시는 근거는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그것을 표현한 깊은 색감. 30년 경력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건 진품입니다.”

“음.”

지금으로서는 동의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직접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루브르 박물관이 나서서 작품을 분석하고 있으니 뭐라도 알아낸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세요?”

자비에르 부서장이 팔짱을 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워낙 말이 많은 일이라 신중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용된 물감은 17세기 근처로 보입니다.”

“…….”

“사용한 안료도 베르메르와 일치하고요. 이걸 보시죠.”

자비에르 부서장이 판독 결과지를 건네주어 확인해 보니 과연 베르메르가 주로 사용한 안료들이 적혀 있었다.

베르메르가 주로 사용한 색은 레드 화이트, 옐로 오커, 버밀리언, 매더 레드, 그린 어스, 로 엄버, 아이보리 블랙 등 일곱 가지다.

“울트라 마린이 없군.”

쥘 총장이 턱을 쓸며 말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우유를 따르는 하녀> 등 베르메르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물감이 없으니 의아해할 만도 하다.

“너무 비싸서 파란색을 쓸 때는 보통 아주라이트를 사용했어요.”

“정확하십니다.”

자비에르가 내 말을 거들자 쥘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분 분석까진 얼마나 걸릴까요?”

자비에르 부서장에게 결과지를 넘겨주며 물었다.

과학적 접근은 내 분야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어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서두르고 있습니다만 정확해야 하다 보니 시일이 좀 걸릴 듯합니다.”

“그렇겠죠. 당분간 살펴도 될까요?”

“그럼요.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황금시대에 있어 교수님만 한 전문가도 드무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루브르 박물관과 고훈 작가님이 보증하신다면 저도 안심이죠. 하하핫!”

자비에르 부서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이 갈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판명난 것도 아닌데 벌써 보증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걸 봐서는 진품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꼭 직접 확인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 * *

“다녀왔습니다.”

“좀 늦었구나.”

집에 돌아오니 할아버지가 반겨주셨다.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계시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오늘도 책을 읽으셨던 모양이다.

“네. 루브르에 들렀어요. 베르메르의 작품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뉴스에 나오던 그거 말이냐.”

며칠 전부터 문화 관련 뉴스는 온통 그 일뿐이다.

루이 갈렌이 여기저기 다니며 이야기를 풀어대니, 어지간히 기쁜 듯하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진위 여부가 판명난 것도 아닌데 언론사에 진품인 것마냥 제보했을 게 뻔하다.

“네. 갈렌 갤러리 아세요?”

“알지.”

“거기 대표가 델프트의 잡화점에서 샀대요.”

“그랬구나. 어땠고?”

“……모르겠어요.”

“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셨다.

“17세기 무렵에 그려진 건 맞는 것 같아요.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허.”

당연히 위작일 거라고 생각하셨을 테니 의아하실 거다.

“또?”

“화풍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모델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나이를 좀 먹은 듯했거든요. 같은 사람을 그렸다고 볼 수 있어요.”

“잠깐. 그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트로니가 아니라 초상화일 수도 있단 말이잖니.”

“그렇게 되죠.”

“허허. 이거 또 재밌는 일이 생겼구나.”

할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셨다.

“네가 모르겠다고 하는 걸 보면 진품일 가능성도 있는 거구나. 의심되는 점도 있을 테고.”

“네. 배경이 야외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요.”

“확실히 생각해 봐야겠구나.”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에는 야외 작업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1841년 존 랜드가 개발한 튜브 물감은 1850년은 되어야 상용화가 되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돼지 방광에 물감을 넣어 운반했는데 부피도 크고 무거웠다.

내가 빈센트란 이름으로 살 부근은 되어야 비로소 야외 활동이 자유로웠으니.

나보다 200년도 더 전에 활동했던 베르메르가 야외에서 작업하긴 힘들었을 거다.

“만약 베르메르가 그 그림을 그렸다면 아마 야외에서 모델을 두고 그리진 않았을 거예요. 대강 스케치만 해두고 작업실에서 그렸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야외에서 그린 그림과 실내에서 그린 그림은 분명 차이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이 그것까지 파악해 주면 좋겠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또…….”

“또?”

“너무 정확했어요.”

“무엇이 말이냐.”

“배경이요. 델프트시 구 시청사를 배경으로 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까 너무 똑같은 거예요. 여기.”

할아버지께 구 시청사 사진과 논란의 그림을 함께 보여드렸다.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관찰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확실히 그렇구나. 하지만 자주 다니는 곳이라 잘 기억했을지도 모르잖니. 스케치에 정성을 들였을 수도 있고. 큰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왜인지 마음에 걸려서요. 당분간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려고요.”

“그래.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씻으려고 화장실로 향하자 컵에 물을 따라 마시던 할아버지가 불러세웠다.

“참. 시현이가 공부하느라 힘든 모양이더구나.”

“그래요?”

작년만 해도 프랑스말 때문에 고생했지만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학생은 한 수업만 듣는 게 아니니까.”

“맞아요. 뭐든 다양하게 배우는 게 좋으니까요. 시현이도 잘하고 있나 봐요.”

할아버지가 날 보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 * *

1)Henricus van Meegeren(1889~1947)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판메이헤런이나 작품 내 통일성을 위해 반 메헤렌으로 칭합니다.

2)2008년 BBC 선정

3)당시 반 메헤렌이 술과 마약에 중독되었기에 단순히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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