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화
Golden Age
1. 황금시대(1)
“한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네, 모네, 반 고흐처럼 미술사를 뒤흔든 위대한 미술가였죠.”
그는 적절한 제스처를 활용하며 준비해 온 말을 풀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응시한 채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바로 앙리 마르소입니다.”
남자는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음미하듯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였습니다. 긴 여정이었죠.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되짚을 수 있었고요. 시대라는 늪에 빠졌던 우리에게 앙리 마르소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남자가 깍지를 꼈다.
“50년이 흐른 지금도 여러 예술가가 그 빛에 동조하니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앙리 마르소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고집스럽고 오만하며 그윽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체 앙리 마르소는 어떻게 우리를 감동시켰을까요?”
“…….”
“마르소 미술관과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둘러보며 그가 이룩한 황금시대를 들여다보도록 하죠.”
이야기를 듣던 앙리 마르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저분해.”
“예?”
“거추장스럽다고.”
“그럼……. 아니. 간결하게 진행하는 방향도 가능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앙리 마르소가 손을 휘저었다.
딱히 틀린 내용은 없었지만 남자의 설명은 조잡하고 거추장스러웠며 그런 주제에 빠진 내용도 많았다.
앙리 마르소는 본인 사후 50년 뒤에 개봉될 기념 다큐멘터리 <위대한 앙리 마르소>의 첫 장면은 좀 더 담백하고 직관적이길 바랐다.
“다음.”
앙리가 다음 면접자를 불렀다.
“자, 잠시만. 다른 소개문이 있습니다.”
남자가 가방을 뒤지며 애타게 사정했지만 앙리 마르소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비서 아르센이 면접자에게 다가가
“고생하셨습니다. 밖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런.”
아르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고 남자는 면접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손에 든 서류를 뒤적이다가 테이블에 내려놓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끝이야?”
“예. 마지막이었습니다.”
“쯧.”
“대본을 직접 써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위대한 앙리 마르소>에 투입될 막대한 제작비에 눈독 들인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대본을 보내오기도 했고 오늘처럼 직접 소개하는 이도 있었지만, 앙리 마르소를 만족시킬 만한 인재는 없었다.
면접을 시작한 지 꽤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소득이 없었기에 아르센은 앙리 마르소가 직접 나서길 권했다.
“내가 쓰는 건 의미 없어.”
본인 기념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현명한 비서는 굳이 화를 자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은 어떻습니까.”
“김?”
“김지우 작가 글 즐겨 읽지 않으십니까.”
앙리가 입을 반쯤 가린 채 검지를 까딱였다.
확실히 평론가 김지우는 앙리 마르소를 깊이 이해했다.
그가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도 잘 파악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평론가일뿐이었다.
“평론하는 사람이야. 다큐멘터리 대본하고는 달라.”
“누구와 함께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고훈 군과 함께했던 대니얼 스콧 감독이 도와준다면 만족하실 겁니다.”
대니얼 스콧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빈센트>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빈센트>는 고훈이 출연한데다 충실한 내용과 아름다운 영상미까지 갖춘 덕에 큰 인기를 끌었고 개봉한 지 수 년이 흐른 지금도 수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이었다.
앙리 마르소 또한 감명 깊게 감상한 바 있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앙리 마르소는 케일 주스를 들이켜고는 마음을 굳혔다.
“연락해 봐.”
“네.”
“잠깐.”
자리를 옮기려던 차, 앙리 마르소가 말을 덧붙였다.
아르센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시죠.”
“베르나데트 사진 몇 장 뽑아서 같이 보내.”
“대니얼 스콧 감독과 김지우 작가에게 보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따님 사진을?”
“뭐 문제 있어?”
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충직한 비서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판단했다.
“아닙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아르센이 물러나고 홀로 남은 앙리 마르소는 고개를 저었다.
수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본인과 미셸 사이에서 태어난 베르나데트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없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베르나데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니.
앙리 마르소는 자신을 찾아온 여러 사람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베르메르 숨겨진 작품 발견!]
[갈렌 갤러리 대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진위여부가 관건]
[캐롤라인 스트릭, “진품이라면 올해 가장 큰 이슈가 될 것.”]
비교적 잠잠하던 미술계에 큰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루이 갈렌이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탓이었다.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이 1,624만 5,600파운드에 낙찰된 바 있었고.1)
<성녀 프락세데스>가 624만 2,500파운드에 거래되는 등.2)
베르메르는 미술사적 의의, 예술적 가치, 대중적 인기 모두를 갖춘 위대한 화가였기에 미술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구라 아님?
└ㄹㅇ 저걸 어떻게 믿음. 위작 가지고 진품이라고 얘기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게. 작품을 공개한 것도 아니고.
└갈렌 갤러리 대표가 진짜라고 할 정도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 아님?
└갤러리가 잘 안 되니까 어그로 끄는 거지.
└파리에 미술관이 많긴 하지. 루브르랑 오르세 말고도 마르소 미술관하고 쇼콜라티에 갤러리도 있잖아.
└언론플레이용 발언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건 아닌가? 거짓말인 거 들통나면 갤러리 문 닫아야 할 판인데.
└그래서? 진위여부는 어떻게 판단한다고 함?
└루이 갈렌이 루브르 박물관에 의뢰했다고 함.
└?
└그걸 왜 프랑스에서 함? 네덜란드가 아니고?
└루이 갈렌이 몰래 가져온 듯. 베르메르 작품이면 네덜란드가 해외 유출되는 걸 가만보지 않았을 테니까.
└ㅋㅋㅋㅋ막장이닼ㅋㅋㅋㅋ
└네덜란드가 가만 있음?
└아직 진품인지 판명되지 않았으니까 지켜보겠지.
└그럼 루브르에서 진품이라고 하면 어떻게 됨?
└갈렌 갤러리가 대박 나겠지. 베르메르 작품이면 구경하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 전에 밤길 조심해야 할걸? 기사 보니까 거의 헐값에 구했다던데.
└진짜 목숨 걸고 하는 듯.
└근데 궁금하긴 하다. 진짜면 보고 싶은데.
└나도 그렇긴 한데 진짜인지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더 궁금하네.
└아마 루브르 자체적으로만 판단하진 않을 거야. 공신력 있는 곳이긴 해도 외부 전문가들 모아서 분석할 듯.
└전문가?
└네덜란드 미술 전문가.
└어디 학교 교수겠지. 일반인은 잘 모르는 사람일걸?
└반은 맞고 반은 틀렸음. 파리 보자르 교수로 있는 고훈이 네덜란드 황금시대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 받았음.
* * *
“그럼 오늘 다룬 내용 정리해서 발표 준비해 주세요. 내일까지.”
교수 고훈이 판서를 마치고 돌아서자 파리 보자르 대학생들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기존에 받은 과제만으로도 벅찬데 발표까지 준비하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보자르 재학 2년 차에 접어든 차시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다음 주까지 패턴 만들어 오라고 하셨는데요!”
“아, 그랬죠.”
고훈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학생들에게 가정집 거실 벽지로 활용할 패턴을 만들어 오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성과를 보인 작품은 업체와 연결해 줄 계획을 세워두었기에 대강 넘길 일은 아니었다.
“어쩐다.”
고훈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학생들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마터면 잠도 못 잘 상황을 타개한 차시현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토해야죠.”
“……네?”
“패턴 과제는 내일까지 제출해 주세요. 강의 이후에 확인하고 메일로 코멘트 줄게요. 다음 주에는 수정된 걸 받아보죠.”
다음 주에 제출할 과제를 중간 검토하겠다니.
학생들은 눈만 깜빡일 뿐 갑자기 닥친 재난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 교수님?”
이번에도 차시현이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까 내일까지 패턴 과제 제출하고 발표 자료도 준비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고훈은 프랑스어에 금방 익숙해진 친구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작년만 해도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수업에 종종 놓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정확해요.”
고훈이 기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지난 3학기 동안 과제에 치여 살던 차시현이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 주에도!”
똑똑-
차시현이 항의하려던 차에 노크 소리가 났다.
“네.”
고훈이 대답하자 조교 에릭이 다소 들뜬 얼굴로 강의실로 들어섰다가 학생들이 있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숙였다.
“강의 도중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막 마치려던 차였어요.”
고훈이 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했어요.”
더 이상 과제를 줄일 방법이 없었다.
실의에 빠진 학생들은 강의실을 나설 채비를 했고, 차시현은 부들부들 몸을 떠는 와중 조교 에릭이 고훈에게 다가갔다.
“총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총장님이요?”
“루브르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설마.”
“네.”
조교 에릭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메르 작품입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델프트시의 전경> 등으로 유명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그 명성과 달리 그가 남긴 작품은 현재 37점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 38번째 작품이 발견되었단 소문이 돌던 차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품었거늘 작품을 구했단 소식에 고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이었어요?”
“입수자는 그렇게 주장한다고 합니다.”
모작, 위작을 가지고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워낙 많아서 쉽게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네. 교수님께서 살펴주길 바란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가야죠.”
고훈이 서둘러 짐을 챙기다가 막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학생들을 보았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감정하고 의견을 나누는 일이 하루이틀로 끝날 리 없었다.
만일 이번 작품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 확실하다면 미술계가 들썩일 만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새로운 관점으로 다룬 논문을 발표한 뒤로 권위와 발언력을 확보한 고훈은 이번 일의 중요 인물이었다.
내일 강의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깐만요.”
고훈이 불러세우자 학생들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여러분도 들으셨겠지만 베르메르 작품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아무래도 내일은 휴강해야 할 것 같은데 과제랑 발표는 다음 주 이 시간까지 하도록 해요. 꼭 잘 살펴볼게요.”
겨울바람에 얼어붙은 동태 눈 같던 학생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아쉽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요. 나중에 꼭 여러분께도 소개해 줄게요. 정말 미안해요.”
학생들이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도 역시 보강은 해야겠죠. 언제가 좋을까요? 다음 주 주말.”
“아니에요!”
차시현이 소리쳤다.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세요!”
“그래도 일정은 잡고.”
“베르메르 그림 찾은 거 아니에요? 없어지면 어떡해요!”
“그림이 어떻게 없어져요. 우선.”
“저희는 정말 괜찮아요! 나중에! 나중에 정하면 되죠!”
다른 학생도 동조하자 고훈이 난감해하는데, 조교 에릭이 슬쩍 한마디 거들었다.
“교수님, 시간이.”
“시간 없다고 하잖아요! 빨리 가보셔야 하잖아요!”
“아니.”
“빨리 가!”
차시현이 버럭 소리쳤다.
“알았어요. 다들 다음 주에 봐요. 고마워요.”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긴 고훈이 강의실을 벗어나고는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강의도 쉬고, 과제를 확인하는 일마저 미루게 되었음에도 본인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친구와 착한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주 강의를 더욱 알차게 준비하고.
다른 좋은 과제를 또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1)런던 소더비 2004년 7월 낙찰가
2)런던 크리스티 2014년 7월 낙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