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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404화 (40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8화

-르네상스-

에필로그(2)

“정말요?”

방태호의 딸 방예은이 애스턴 마틴의 유스 육성 프로그램에 합격했단 소식에 고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포뮬러1에 진출하여 루이스 해밀턴과 같은 드라이버가 되고 싶단 꿈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이다.

“하하하핳! 그렇다니까?”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면서요.”

“엄청났지.”

“이제 16살 아니에요?”

“최연소야. 캬. 진짜 기가 막히더라고. 마지막 코너에서 돌아나오는데 가슴이 막 터질 것 같더라니까?”

딸이 마지막 경쟁 주행에서 1위로 치고 나왔을 때를 떠올리던 방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 축하 파티라도 해야겠네.”

고수열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조만간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음음. 정말 축하하네.”

“축하해요.”

“아하하하하!”

방태호가 크게 웃었다.

“아, 그건 그렇고. 쇼콜라티에 가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

“네. 이거.”

고훈이 레나 자고예프가 제출한 가입 신청서를 건넸다.

“레나 자고예프잖아.”

방태호가 레나 자고예프를 언급하자 고수열도 관심을 보였다.

수리코프 미술대학 교수이자 오랫동안 친분을 나눈 미하일 자고예프의 딸로, 작년 르네상스에서 두각을 나타낸 천재 화가였고.

무엇보다 손자 고훈이 관심을 보였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야 고맙지. 이만한 작가 계약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네가 권한 거야?”

방태호가 물었다.

“아니요. 먼저 주더라고요.”

고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레나 자고예프에 대해서 말하던 표정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고맙네. 연락해 볼게.”

“그게.”

“응?”

“아니에요.”

“그래. 그럼 가볼게. 선생님,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러게. 다시 한번 정말 축하하네.”

“하하핳! 감사합니다.”

방태호가 집을 나서자 고수열이 고훈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레나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무것도.”

“할애비는 못 속여. 무슨 일 있는 게지?”

고훈이 망설이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레나 자고예프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사랑인지 확신은 서지 않고, 무엇보다 기존 관계 때문에 주변 시선이 걱정된다는 이야기였다.

고수열이 껄껄 웃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분명 무슨 구설이 오를 거예요.”

고수열이 고개를 저었다.

“할애비 눈에는 다른 사람 시선보다 그 아이를 만나는 걸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고훈은 말문이 막혔다.

“훈아, 사람과 사람 관계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단다. 틀어질 것부터 걱정하면 아무도 만날 수 없어.”

“…….”

고훈이 지난 사랑을 떠올렸다.

처음은 하숙집의 딸이었다.

가슴이 터질듯한 강렬한 감정을 처음 느낀 그는 곧장 고백했고 당연히 거절당했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탓이다.

깊이 좌절했던 그는 영국 램스게이트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며 상처를 잊어갔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하던 중에 사촌누이 케이를 만났다.

일곱 살 연상이고 여덟 살 먹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만나고 싶단 생각에 기차를 타고 이모댁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려 케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모 가족과 케이는 만남을 거절했고, 반 고흐는 석유등 불에 손을 얹으며 가족을 협박하는 데에 이르렀다.

과정 없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인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미숙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몇 명의 사람을 더 만났지만.

시엔은 가난을 이유로 떠났고.

마르홋은 빈센트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의 반대, 주변 사람들의 멸시에 진절머리가 난 탓에 마르홋과의 관계는 동생 테오도르에게마저 비밀로 했거늘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훈아.”

“네.”

“할애비는 그저 네가 솔직해지면 좋겠구나.”

고훈이 여태껏 관객들에게 전해 온 말이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를 갖자고 숱하게 말해 왔었다.

“대화하는 게 즐거우면 수다도 떨고. 보고 싶은 전시회가 마침 같으면 같이 구경할 수도 있지. 굳이 사귀어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니?”

고훈이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 다른 이들에게 전했던 말을 듣는 입장이 되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맞아요. 제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고수열이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눈을 감기 전에 증손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가만히 좀 있어.”

앙리 마르소가 모델이자 딸인 베르나데트 마르소에게 말했다.

“목도 못 가누는 애한테 뭐래?”

딸을 안은 미셸 플라티니가 으르렁댔다.

“그렇지, 베르?”

베르나데트 마르소가 엄마를 닮은 파란 눈을 깜빡이며 입을 오물거리다가 칭얼댔다.

“얘 졸린가 봐. 재워야겠어.”

미셸이 딸을 안아드는데 평소와 달리 목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베르 힘 엄청 세졌네?”

터미타임이 아기의 목과 어깨 근육 발달에 좋다고 하더니, 이제 곧 고개를 가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앙리 마르소가 붓을 내려두고는 딸을 안았다.

아빠 품에 안긴 베르나데트는 이내 고롱대며 잠에 들었다.

아이가 잠들 것을 확인하자 미셸이 시계를 확인했다. 친정 엄마 셰리 가도가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엄마 오실 때 됐는데.”

“베르~ 베르~ 할머니 왔지요~”

마침 셰리 가도가 손녀 이름을 부르며 안방 거실로 들어섰다.

앙리와 미셸이 황급히 입술에 검지를 대자 셰리가 입을 막았다.

요람 안에서 곤히 잠든 손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언제 잠들었어?”

셰리가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물었다.

“방금. 밥 먹었어?”

“먹었지. 너희는?”

“아직. 훈이 오면 같이 먹게.”

“그래.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왔으니까 같이 먹으면 되겠네. 베르 걱정 말고 가서 좀 쉬어.”

“괜찮아.”

“괜찮긴. 너희 키울 때 다 겪어봐서 알아.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눈이라도 좀 붙여.”

셰리가 앙리와 미셸을 내쫓다시피 내보냈다.

두 사람 모두 모든 일을 중단하고 베르나데트를 보살피는 데 집중했던 만큼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돌아가며 쪽잠을 잘 뿐, 벌써 3개월 가까이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회복 캡슐이 없던 시기에는 대체 아이를 어찌 키웠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앙셸 부부는 곧장 회복 캐슐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 * *

“……괜찮아요?”

근 석 달 만에 만난 앙리와 미셸이 죽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초췌한 모습은 처음 보는데, 피부 상태나 다크 서클과는 무관하게 묘하게 행복한 인상이다.

베르나데트의 힘인가 보다.

“학교는 어때?”

미셸이 대학 이야기를 꺼냈다.

“재밌어요. 학생들 덕분이죠.”

“학생?”

“네. 수업에 진지하더라고요. 과제 내주면 앓는 소리를 내긴 하는데, 그래도 빠짐없이 해오고. 또 저도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작품을 그려오기도 해서 배우기도 해요.”

“평가가 후한데?”

“정말로요.”

미셸과 함께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요?”

미셸과 앙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앙리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고 미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좋아. 너무.”

부모의 사랑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잔뜩 지친 얼굴로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베르나데트는요?”

“잠들었어.”

“혼자 둬도 돼요?”

“엄마랑 같이 있어. 하아암. 아, 미안.”

“신경 쓰지 말아요.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텐데. 아, 이거 뱅크스 전시회 도록이에요. 볼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뱅크스와 비다의 전시회에서 산 도록을 전하자 앙리와 미셸이 반색했다.

“고마워. 보고 싶었는데.”

“어때?”

앙리가 물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더라고요. 뱅크스답게.”

“……그 웃기지도 않는 닉네임 쓰는 놈은?”

“이클립스요?”

앙리와 미셸은 이클립스가 비다 라바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

“영향을 받긴 했는데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고요. 좀 더 적극적이라고 해야 하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향한 비판의 메시지는 뱅크스보다도 강렬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오라고 하고.”

쪽잠 자기에도 시간이 아쉬울 텐데,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물어봐도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참았는데 더는 참지 못하고 먼저 꺼냈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자.”

“네.”

미셸이 또 한 번 대답을 미뤘다.

덕분에 모처럼 앙리네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셰리가 만들어 둔 양파 수프가 일품이었다.

위장 깊이 스며드는 단맛에 취해 있던 차 미셸이 앙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크흠.”

그답지 않게 망설인다.

“뭔데요. 부탁할 거 있어요?”

예상하기로는 쇼콜라티에나 마르소 미술관 관련 일정을 부탁하려는 것 같다.

한동안은 베르나데트를 보살펴야 하니, 공백이 생긴 자리를 맡아달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 외에 그가 내게 부탁할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게.”

“어디 작품 주기로 했어요? 그런 거면 걱정 말아요. 우리 사이에.”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가만있어 봐.”

앙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길 반복했다.

그러고는 나를 노려보더니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낸다 싶다가 또 고개를 돌린다.

“뭔데요. 답답하게 굴지 말고 그냥 말해요.”

“……너 부모 없잖아.”

이게 돌았나.

뜬금없이 불러다가 아픈 구석을 꼬집는다.

“나도 없고.”

“그런데요.”

“만약에. 나랑 미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불길한 말을 꺼낸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부모를 일찍 여읜 나와 앙리 본인의 경우를 언급할 리 없다.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거 아니야. 제대로 좀 말해. 오해하잖아.”

미셸이 앙리를 구박했다.

“만약.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베르나데트를 보살펴 달라고.”

세상에.

“베르나데트의 대부가 되어 달라는 말이에요?”

“…….”

“그래요?”

다그쳐 묻자 앙리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제의에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떨어진 숟가락에서 눈을 떼 앙리와 미셸을 바라보니 갑자기 내게 정말 그럴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저 두 사람만큼, 아니, 반의 반이라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너무나 기쁘지만 동시에 그렇게 대단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아니.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듯 처음부터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용기만 있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분명 그럴 것이다.

“부탁해. 앙리랑 둘이 이야기했는데, 믿을 사람이 훈이 너뿐이더라.”

“그럼요. 정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어나 앙셸 부부에게 다가갔다.

미셸과 포옹하고나자 앙리가 부끄러워하길래 냅다 끌어안았다.

“왜 이래!”

“이리 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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