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3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9)
오후 6시가 되자 관람객이 점차 줄어 들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함도 있고, 7시부터 시작하는 여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함도 있었다.
7시 튈르리 정원에서는 파리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열 예정이고, 8시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작가와의 대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밤 9시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는 르네상스에 참가하지 않은 20여 명의 예술가가 준비한 폭죽 쇼가 열릴 터라 관람객들은 각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폐관 시간이 가까워지자 루브르 박물관 르네상스 전시실은 한산해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술관 직원이 느지막이 방문한 고훈을 반겼다.
“고생하셨어요. 친구랑 잠깐 둘러봐도 되죠?”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한 시간 남짓 여유를 얻은 고훈이 차시현과 본선 진출작을 천천히 살폈다.
“어?”
차시현이 한쪽 벽에 설치된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자화상이다.”
미국 출신의 미술가 존 필립스가 자신을 표현한 그림이었는데, 독특하게도 캔버스를 철창으로 막아두었다.
배경 또한 감옥으로 표현하여 무엇인가를 고발하는 내용 같았다.
“검열…….”
고훈이 제목을 읽었다.
“감옥에 갇힌 것 같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아.”
“요새도 검열 많이 해?”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표현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미국에서 법적으로 예술가의 표현을 막아설 리 없었다.
“아마 예전 일 때문에 그럴 거야.”
<검열>을 감상하던 고훈과 차시현에게 방태호가 다가왔다.
“아저씨.”
“이 작가 3년 전에 백설공주를 그린 적 있는데 엄청 욕먹었거든.”
“왜요?”
차시현이 물었다.
“하얗게 그렸다고.”
“네?”
차시현이 눈을 깜빡였다.
“사인회 도중에 어린아이를 만났나 봐. 너무 기뻐서 뭘 그려줄까 물었더니 아이가 백설공주를 좋아한다고 했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려주었는데, 흑인 아이한테 하얀 피부 공주를 그려줬다고 비난받았지.”
“좀 이상해요.”
“그치. 당시에는 비판 여론이 너무 세서 결국 사과까지 했는데 이후 작품 활동을 전혀 못 하다가 이번에 르네상스 본선에 올랐더라구.”
방태호의 설명을 듣던 고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서웠을 거예요.”
“그럴 수밖에. 나 같아도 다시 작품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 다시 일어나서 다행이지.”
고훈이 <검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감옥 벽면은 어두운 파란색으로 덮었고, 피부는 창백한 것을 넘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감옥에 갇힌 자신을 표현한 만큼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였다.
“벽에 걸린 그림은 본인 작품인가 봐요?”
“맞아.”
그러나 존 필립스는 감옥 벽에 여러 흔적을 남겨, 그가 아직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엄청 억울했겠다.”
차시현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작품으로 그릴 정도니까. 자기 욕했던 사람들을 비판하는 거겠지?”
“글쎄.”
고훈이 그림 속 존 필립스의 눈을 가리켰다.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도리어 슬픔으로 가득했다.
“필립스 씨가 만약 자기를 비판했던 이들을 미워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거야. 이 작품은 그 사람들과 싸우자고 그린 게 아니야. 억울하게 비난 받은 이들과 자신을 위로하려고 그린 거야.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힘을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
고훈의 설명을 들은 차시현이 한동안 <검열>을 살피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거 보고 또 욕하면 어떻게 해?”
“하얀 눈이라는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하얗게 그렸다고 비판한 사람들?”
“응.”
“……그런 사람은 작품을 제대로 보지 않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강요하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야.”
“그럼?”
“글쎄. 적어도 사람을 백인, 흑인으로 구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방태호가 슬쩍 미소 지었다.
“존 필립스는 흑인이야.”
“네?”
차시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흑인이 흑인을 욕한 거예요?”
“그렇지도 않아. 백설공주를 하얗게 그리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흑인도 있었고. 왜 백설공주를 하얗게만 그려야 하냐는 백인도 있었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한 건.”
고훈이 오늘 처음, 그림으로 만난 존 필립스를 보며 말했다.
“필립스 씨가 피워낸 이 파란 꽃을 미워하고 비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거야.”
고훈이 발을 옮겼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여러 작가를 만나면서 때로 감동하기도, 가끔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마음이 통하는 작품은 반가웠지만, 굳이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비판하진 않으려고 했다.
그저 모를 뿐이니까.
고훈은 미지의 영역을 향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이건 뭐지?”
차시현이 또 다른 작품 앞에 서서 턱을 받쳤다.
“나 아직 그림 보는 눈이 없나 봐.”
“굳이 이해할 필요 없어. 오늘 처음 만났잖아.”
“그래도.”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만나는 게 중요한 거야. 처음 만난 사람하고 시선을 교환하고 미소 짓고 가볍게 인사만 해도 충분한 것처럼. 혹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응. 엄청 기쁘니까.”
“그럼 말이 안 맞잖아?”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순 없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은 걸 사랑하도록 마음을 여는 게 중요하단 뜻이야.”
“…….”
“학교에서도 친한 친구가 생기면 좋잖아? 더 많은 친구를 사귀면 좋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기쁘고.”
“응.”
“그렇다고 모든 사람하고 친해질 필요는 없어. 그럴 수도 없고. 친하지 않은 친구를 배척하지만 않으면 돼.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눠서 마음이 맞으면 좋은 거고,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그냥 그대로 지내는 거야. 그런 사람을 이상하다고 말하거나, 싫어하거나 반에서 쫓아내는 게 아니라.”
“그러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게.”
“아, 있다.”
차시현이 어릴 적 자신을 괴롭혔던 반 아이들을 떠올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고훈이 또 발을 옮기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제목은 <리터치>, 작가는 블랑쉬 파브르였다.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에 새빨간 물감을 쏟아낸 작품이었다.
백금 같은 머리카락과 맑은 눈동자, 큰 입, 생기 넘치는 입술이 언뜻언뜻 보일 뿐.
빨간 물감을 끼얹은 탓에 작품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붓으로 문지르거나 긁고 밀어내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블랑쉬 누나 스트레스 엄청 받았나 보다.”
차시현이 그림을 살피며 혼잣말했다. 언뜻 보기에 빨간색 물감이 피처럼 보여서 섬뜩하기도 했다.
“응.”
화가가 외모로 평가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림에 모든 걸 바친 화가가 자신의 노력이 무시당했을 때 느낄 절망감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리터치>는 언론이 만들어 낸 미인 화가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다시 그리겠다는 블랑쉬 파브르의 의지였으며.
그것을 표현할 유일한 길이었다.
“뭔가 압도되는 기분이야.”
“응. 박력 있다.”
“아래 얼굴보다 빨간 물감이 더 누나 같아.”
“그런 성격이니까.”
“이 작품 사겠다는 사람 벌써 나왔더라구.”
방태호의 말에 고훈과 차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요?”
“벌써요?”
“응. 꽤 유명한 수집가인데 꼭 사고 싶다고 명함 주고 갔대.”
몇 년간 작품이 팔지 못해 마음고생한 블랑쉬가 드디어 자신을 알아본 사람을 만났다니.
고훈과 차시현이 기쁜 마음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서요?”
고훈이 방태호를 재촉했다.
“엄청 쿨하게 거절했다던데?”
“네?”
“왜요?”
“글쎄. 나도 성 과장한테 조금 전에 간략하게만 들어서.”
“그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지만 자기를 팔고 싶진 않다고 했대.”
방태호가 전한 말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쉬 본인의 말과 차시현이 느낀 대로 <리터치>는 화가 블랑쉬 파브르를 나타내는 작품이었다.
“멋지게 폈네요.”
고훈이 <리터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렇게나 쏟아낸 빨간 물감이 꼭 꽃잎 같았다.
“뭐가 펴?”
“꽃 같지 않아?”
“……그런가?”
* * *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블랑쉬, 시간 다 됐는데.”
성귤 과장이 멍하니 명함을 살피는 블랑쉬 파브르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 좀 주세요.”
“그래. 너무 늦지는 말고. 밖에서 기다릴게.”
“네.”
성귤 과장이 대기실을 벗어났다.
블랑쉬 파브르는 네덜란드 출신의 수집가가 건넨 명함을 다시금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테판 로번.
미술계에서는 이름 난 수집가였으며 가격을 후하게 쳐주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그림은 처음이라며, 20만 유로에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블랑쉬 파브르는 기뻐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바로 거절할 필요는 없었잖아. 저렇게 나올 정도면 분명 가격은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성귤 과장이 아쉬운 마음에 조심스레 제안했지만 블랑쉬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리터치>는 화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자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팔 수 없었다.
본인의 각오가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블랑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훈의 <화가>처럼 오늘 하루에만 수백 명의 기자가 달라붙지는 않았다.
수천, 수만 명이 감동하여 발을 떼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단 한 사람.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 <리터치>에 대해서 몇 분이나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가 수집가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막막한 기로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블랑쉬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그가 준 명함을 소중히 지갑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