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2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8)
매해 1억 명 이상이 찾는 세계 최대의 관광 도시 파리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북적였다.
특히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을 잇는 튈르리 정원은 걷기조차 힘들 만큼 붐볐는데.
파리 경찰청이 전 병력을 대동하여 교통 정리, 안전 사고 예방 조치, 관광객 안내 등을 시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늘 볼 수는 있을까?”
파리를 방문한 차시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렸을 적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했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모르겠어.”
고훈도 반쯤 넋이 나가 눈만 껌뻑였다.
여러 미술 축제를 다닌 그로서도 이렇게 흥행한 경우를 보지 못한 탓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 베네치아 비엔날레, 아르누보 공모전과 같이 세계적인 행사조차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참가자는 빨리 들어갈 수 있지 않아?”
차시현이 물었다.
“패스가 있긴 한데 일단 박물관 안에 들어가야지.”
“할아버지가 가자고 하실 때 일어났어야 했나 봐.”
“그러게.”
어제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어버렸고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아침 일찍 행사에 참여해야 했던 고수열과 달리, 고훈은 저녁에 일정이 있었던지라 좀 더 자고 편하게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다른 데부터 갈래?”
“여기가 이러면 다른 곳도 비슷할 거야.”
고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르네상스를 즐기러 온 이들이 모두 루브르 박물관부터 찾았을 리는 없으니 오르세 미술관이나 퐁피두 센터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프티 팔레부터 갈래? 거긴 예선 작품 걸려서 좀 나을 것 같은데.”
“응. 여기 있는 것보단 뭐든 나을 것 같아.”
고훈과 차시현은 어떻게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샹젤리제 거리 방향으로 향했다.
튈르리 정원을 벗어나고 콩코르드 광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힘들어.”
더운 날씨에 약 1㎞를 사람들에게 치이며 걷다 보니 구경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다 왔어.”
고훈이 차시현을 달랬다.
“이렇게 오래 걸은 적 처음이란 말이야. 좀 쉬다 가자. 응?”
차시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고훈을 올려다보았다.
“쉴 만한 곳이 없어. 프티 팔레 주변엔 카페도 있으니까 거기 가서 시원한 거라도 마시자.”
차시현이 입을 내밀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
“다 왔어.”
“아까도 다 왔다고 했잖아.”
“저 건물이야. 어.”
프티 팔레 미술관을 가리키려고 고개를 돌린 고훈이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누님! 같이 가요!”
“따라 오지 마!”
“같이 구경하기로 했잖아요!”
“그래! 구경만 하면 되지 손은 왜 자꾸 잡아?”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떨어질까 봐 그랬죠.”
“거짓말하지마!”
“저, 정말이에요!”
“깍지 꼈잖아!”
백설기가 버럭 소리쳤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안 돼. 나 너랑 그럴 마음 진짜 조금도 없어.”
“……역시 제가 탈모라서 그런 거죠?”
“아니야!”
“그럼 왜요?”
“…….”
“전 누님 좋아요. 햄버거 깨끗하게 먹는 모습도 좋고, 화 내는 목소리도 좋고, 작품할 때 입술 깨무는 버릇도 좋고, 34살이나 먹었으면서 손 잡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좋아요. 다 좋아요.”
“야! 여기 밖이야.”
“뭐, 어때요. 한국 말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데.”
고훈이 인사하려고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진짜 할 말이 없다. 됐어.”
“아! 같이 가요오!”
“오지 말라고!”
“싫어요!”
“나도 싫어!”
“저도 싫어요!”
막무가내였다.
백설기는 답답하고 황당한 나머지 두 손을 든 채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발을 옮겼다.
그러나 마은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를 쫓으며 계속해 말을 걸었다.
“진짜 저 싫어요?”
“…….”
“그럼 오늘 만나자는 건 왜 거절 안 했어요? 왜 그렇게 예쁘게 입고 왔는데요?”
“시끄러!”
광장을 가로지른 두 사람은 금방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은찬이 형이었지?”
“응.”
“같이 있던 분은 백설기 작가님?”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좋아하나 봐. 난 한 번 거절당하면 다시 말 못 걸 것 같은데.”
“응.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이 한동안 마은찬, 백설기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난 귀여우니까 거절당할 일 없을 텐데.”
“…….”
* * *
차시현의 병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힘들다고 해서 카페를 찾았는데 음료수를 볼에 대고 셀카를 찍어댄다.
볼을 부풀렸다가 눈을 깜빡였다가 턱을 받쳤다가 오만 짓을 다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힘들어?”
“앉으니까 괜찮아졌어.”
“그런데?”
“막상 그림 그리기로 마음먹으니까 뭘 그릴지 모르겠더라고. 근데 요새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계속 말해보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아저씨가 왜 그렇게 자화상만 그렸는지 알 것 같아.”
진지한 주제다.
화가는 스스로에게 무엇을 그릴지 끊임없이 물어본다.
그 누구도 답을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질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완전한 정답을 내릴 수 없기에 끝도 존재할 수 없다.
그저 자신에게 끝없이 다가갈 뿐이다.
그것은 저주이며 동시에 축복이다.
“이렇게 귀여운데 안 그릴 수 없잖아.”
“…….”
“앙리 아저씨도 그랬을 거야.”
자화상이 매개체가 되었는지 앙리의 병이 차시현에게 전염되었다.
전염병이라.
과연, 그래서 염병이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장난이고.”
차시현이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여기 오니까 알 것 같아. 거리마다 해바라기가 있잖아?”
그동안 쇼콜라티에 놀이터 아이들과 열심히 그렸다.
달리다 광장, 뷰그레넬리 쇼핑몰, 센강 강둑 외에도 정말 많은 곳에 해바라기를 그렸다.
작년부터는 나와 아이들이 그리지 않은 해바라기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아마 EIE(Everyone is equal)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그린 것이리라.
“내 파란 나무도 해바라기가 될 수 있을까?”
차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없이 보였던 녀석이 한 사람의 미술가로 보인다.
“그럼.”
“정말?”
“당연하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해바라기는 상징일 뿐이야.”
“무슨 뜻이야?”
“내가 그렸고. 지금은 사랑의 상징처럼 되어서 많이들 그리지만 형태가 중요하진 않아. 해바라기를 그리는 마음이 중요하지.”
“마음?”
“마음. 자기를 위로하고 싶고 용기를 얻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고 남을 안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 그런 마음으로 그리면 해바라기가 아니라도 해바라기인 거야.”
“어려워.”
“여기 프티 팔레에 전시된 예선 작품들 중에 같은 작품이 있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맞아. 해바라기는?”
“당연히 없지. 그럼 너 따라하는 거잖아.”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날 따라하는 건 아니야.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닌 해바라기도 있잖아.”
“…….”
“해바라기라고 부르지만 모든 해바라기는 서로 달라. 사람이 각자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아.”
“다르지만 해바라기인 거지. 굳이 해바라기를 그리지 않아도 해바라기가 가진 상징성을 가졌다면 해바라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어렵다.”
차시현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좀 알 것 같아. 해바라기가 사랑을 상징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린 건 모두 해바라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훌륭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
해바라기가 수백만 명, 튤립이 수백만 명, 장미가 수백만 명.
키가 큰 해바라기가 그 중 절반이고 주황색 튤립은 그중 일부고 하얀 장미가 또 소수 있을 거다.
모든 집단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나뉘어 끝에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는 오직 나만이 존재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공통점을 지녔음에도 그 모든 특성을 가진 존재는 단 한 사람뿐이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꽃을 피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오늘은 그중 일부에게 선택된 300명이 애지중지 키워온 자신의 꽃을 자랑하는 날이다.
* * *
르네상스 개막 첫날.
고훈의 <화가>는 루브르 박물관 일대를 붐비게 했다.
땅에 씨앗을 심는 손에 ‘화가’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 이전에 주름지고 상처나고 굳은살 박인 손에서 알 수 없는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관람객들은 <화가>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한 채 머물렀고 루브르 박물관은 종일 정체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아침 일찍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고훈의 <화가>를 감상하고 나온 김지우가 벤치에 힘없이 앉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가면>처럼 찢었을까? 구겼을까? 긁었을까?
<총탄>의 효과적인 구도라든가 <여름 너울> 같은 독특한 구도를 보여줄지도 기대되었다.
아니면 <앙리와 미셸의 결혼식>처럼 놀라운 발상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149,597,870.696㎞>와 <금환>처럼 공간과 자연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일까.
수많은 기대를 하고 찾았건만 고훈이 내건 그림은 아주 단순했다.
<서리 밀밭>처럼 마치 과거로 회귀라도 한 듯 후기 인상주의적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빛이 어디에서 내려오고 얼마나 밝은지, 그에 따라 그림자의 범위와 짙음은 어떤지 고민한 흔적이 물씬 묻어났다.
피부 질감과 흙을 표현한 섬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많이, 오래 고훈의 작품을 봐왔던 김지우에게는 충격이었다.
고훈은 다른 어떠한 기교도 없이 붓과 물감, 캔버스만으로도 이렇게나 가슴 벅찬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회화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아.”
김지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한다.”
부우웅- 부우웅-
전화기가 울렸다.
오르세 미술관으로 갔던 이인호가 건 전화였다.
“응.”
-어땠어?
“말 못 해.”
-어?
“그런 거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수없이 많은 작품을 정리했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그쪽은 어땠어?”
고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알려진 앙리 마르소의 작품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했다.
-보는 순간 아, 하게 되더라고. 소름 돋더라.
“아아, 보고 싶다!”
-가상 전시관 접속해서라도 보지 그래?
“직접 보는 거 하고 다르잖아. 지금 어디야?”
-그쪽으로 가는 중. 다리 앞에서 보자.
“응.”
통화를 마친 김지우가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많은 사람이 주변을 서성이거나 공원에 머물고 있었다.
“고의 그림 무슨 뜻일까?”
“모르겠어. 씨앗을 심는 손이 기도하는 것 같았는데.”
“이해를 못 하겠어. 뒤에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림이 빛나는 거야?”
모두 고훈의 <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