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1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7)
한편 블랑쉬 파브르는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매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다 라바니의 멍청한 말 때문도, 두 사람이 480㎞나 떨어진 도시에서 살기 때문도 아니었다.
비다 라바니가 블랑쉬 파브르의 빼어난 외모와 사회적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랑쉬 파브르는 어느새 인터넷 환경에서 반전, 반테러, 반혐오 예술가로 유명해진 이클립스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걸었던 그가 런던으로 향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유명 예술가가 되니.
기쁨과 동시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블랑쉬 파브르? 누구였지?’
‘아, 그 머리 하얀 애? 요즘은 뭐 하나?’
‘그러게. 5~6년 전만 해도 천재라고 막 띄어주던데.’
‘원래 어렸을 때 신동이 커서 평범해지더라.’
‘솔직히 처음부터 예뻐서 유명해진 거잖아. 마침 비슷한 나이에 고훈이 유명하니까 의도적으로 경쟁 구도 짜려는 것도 있었고.’
‘그 애만 불쌍하네.’
미술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자신과 관련된 글을 찾았을 때.
블랑쉬는 좌절했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자신했거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잊힐 정도로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앙리 마르소를 목표로 했던 어리고 당찬 화가는 온데간데 없었다.
블랑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으로부터 6~7년이 흘렀다. 그동안 붓은 그녀의 손과 다름이 없어졌고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완전하지 않았던 자아에 좀 더 다가갔고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남들 눈에 비치지 않을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자신을 보고, 깨닫고, 다듬어 위로하고, 한 발 더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러한 일에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는 솔직하지 못하거나 본인을 속이는 부류였다.
자신을 깨닫고 표현하는 기쁨과 그것을 알아주는 이를 만났을 때의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짓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땀과 눈물, 열정과 애증으로 완성한 작품이 무시받았을 때.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진통제가 병의 근원을 고쳐주지 않고, 항생제가 언젠가는 내성이 생겨 말을 듣지 않듯.
블랑쉬 파브르는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인정받게 된 그가 너무 멀리 가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만 조급해졌고,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는 그에게 이러한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는 분명 내게 신경 쓸 테니까.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그에게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시기였고, 다른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해내야 해.’
블랑쉬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다 라바니를 신경 쓰고 있었지만 모든 일은 본인의 문제였다.
그를 마음에 두고 있으나, 화가 블랑쉬 파브르의 길에 다른 사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홀로 헤쳐 나가야 했다.
‘괜찮아.’
블랑쉬 파브르가 손을 모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르네상스 때문에 며칠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머리가 무거웠다.
반복된 실패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
그리고 존경해 마지 않는 앙리 마르소와 같은 무대에 오른다는 부담에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 외에도 고훈, 윌리엄 토마스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가 수백 명이나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작품이 빛을 낼 수 있을까.
예선과 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칠 대로 지쳐,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몸과 마음만이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 * *
2035년 6월 18일.
르네상스 개막 하루 전 파리는 전에 없던 인파로 북적였다.
관광업이 활성화 된 파리조차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을 감당할 순 없었다.
“어쩌지?”
촬영차 파리를 방문한 유명 뉴튜브 크리에이터 알렉스 우드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지.
└진짜 여행 한두 번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음?
└뻔하지. 뉴튜브 각 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공원 벤치에서 자는 것보단 낫지.
└생쥐랑 같이 자는 건 공원이든 숙소든 똑같을 것 같은데?
“지금 이게 내 잘못이야? 나 사기당했어. 어떻게 사기당한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늬들이 사람이야?”
알렉스가 발끈했다.
힘들게 예약한 숙소가 이불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고, 욕실에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것만으로도 열받는데 시청자들이 놀리기까지 하니 참을 수 없었다.
└숙소 못 구했다는 사람 엄청 많아. 잘 곳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ㅋ
└한쪽 구석에 치즈 두고 생쥐 나오는지 보자.
└그런 데서 일주일이나 어떻게 지내냨ㅋㅋㅋ
“나 근데 진짜 거기서 일주일 못 지내. 무슨 병 걸릴 것처럼 생겼단 말이야. 나 예민한 거 알지? 아, 혹시 파리 와 있는 사람 있어? 있어? 진짜야? 방 같이 쓰면 안 돼? 사인도 해주고 숙박료도 다 줄게. ……야, 내가 널 왜 덮쳐. 진짜 돌겠네. 아니, 나랑 같이 일주일 지내면 솔직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유명해!”
알렉스가 시청자들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카페 주인이 커피와 컵케이크를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잊고자 버터크림치즈가 듬뿍 올라간 컵케이크를 집어들었다.
치즈의 꾸덕한 식감과 보드라운 빵이 찰싹 달라붙어, 입 안에서 탱고를 추는 듯했다.
턱을 움직일 때마다 혀를 무대 삼아 우아하게 몸을 놀렸다.
“와. 미쳤다. 이거.”
알렉스가 스마트폰과 컵케이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여러분, 이거 진짜 맛있어요. 꾸덕구독한 치즈가. 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해?”
└꾸덕 뭐요?
└이젠 뭐 아무 데나 같다 붙이네.
└그런다고 구독자 안 늘어요, 아저씨.
└내일 어디부터 감?
“그래. 그 얘기 좀 하자. 주최 측이 앙리랑 고훈을 다른 데다가 배치했더라고. 어디부터 갈까?”
오랫동안 준비한 여행이지만 알렉스 우드는 여전히 첫날 일정을 정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는 파리 3대 미술관으로 알려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에서 동시에 치러졌고.
본선에 진출한 300점의 작품이 각각 100점씩 전시될 예정이었다.
또한 방문객들이 각 미술관을 고루 방문하도록, 현재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 세 명을 떨어뜨려 놓았다.
알렉스 우드를 비롯한 많은 이가 고훈을 찾아볼 수 있는 루브르 박물관을 먼저 들를지.
앙리 마르소가 있는 오르세 미술관을 찾을지, 아니면 윌리엄 토마스의 작품이 전시된 퐁피두 센터로 향할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면 루브르부터 간다. 고훈 보러 가야지.
└ㅇㅈ. 요새는 진짜 살짝 분위기가 고훈에게 이동한 것 같더라.
└살짝이 아니라 대놓고 움직였음. 미술 쪽 말고도 패션, 영화에도 영향 미치잖아.
└오죽하면 예술가들도 고훈 해바라기 샀다고 자랑하더라.
└사는 것뿐이냨ㅋㅋ 뱅크스랑 최근에 이클립스란 사람도 훈이 지지하면서 해바라기 그리던데.
시청자들의 채팅을 확인하던 알렉스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 윌리엄 토마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작가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자 의견이 그에게 몰린 만큼 첫날은 고훈의 작품이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게 좋아 보였다.
“확실히 루브르부터 가는 게 좋겠네. 아, 다른 사람은 누구 있냐고? 찾아보지 뭐.”
알렉스가 촬영 참고 자료 및 기념품으로 미리 구입해 둔 르네상스 가이드북을 꺼냈다.
각 미술관에 누가 참여하는지 정리되어 있었다.
“와. 고훈 말고도 진짜 많네. 사라. 사라 조지아 씨도 있구나. 리처드도. 훈이 작품 없었어도 가야 할 정도잖아.”
명단을 확인하던 알렉스 우드가 감탄했다.
전 세계에서 선발된 300명의 예술가답게 이름만 봐도 누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
특히 주목해야 할 작가를 추려서 간단하게 소개하던 차, 알렉스의 시야에 의외의 이름이 포착되었다.
“블랑쉬 파브르? 이 친구가 올라왔어?”
└누구?
└프랑스 사람임?
└처음 듣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넼ㅋ
└짬을 괜히 먹은 건 아니야. 이럴 땐 진짜 전문가 같음.
└ㅋㅋㅋㅋ그냥 아는 척하는 거임.
└블랑쉬 예전엔 그래도 많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나 보네.
“전문가지! 뭐 이럴 때만 전문가 같대? 대놓고 전문가입니다!”
알렉스가 소리를 치자 카페 주인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카페 내부를 촬영하는 건 아니라 가만히 두었지만 목소리가 커지니 쫓아낼까 고민되었다.
카페 주인의 심경을 읽은 알렉스가 얼른 사과하고 목소리를 낮춰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데 여러분, 블랑쉬 파브르 진짜 몰라요? 첫 번째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10위로 입선했잖아.”
알렉스가 블랑쉬의 대표 이력을 언급하자 몇몇 시청자가 기억을 떠올렸다.
└아, 머리 하얀 애.
└맞네. 쇼콜라티에 소속이네.
└그동안 활동을 안 했나?
└ㄴㄴ 쇼콜라티에 갤러리에서 꾸준히 작품 발표 했었음.
└그럼 그냥 묻힌 거야?
└앙리랑 고훈 작품 걸리고 가끔 가다가 고수열 작품도 걸리는데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오겠냐.
└하긴.
“나 진짜 놀랐어. 잘 그리는 친구긴 한데 르네상스잖아. 세계에서 딱 300명 뽑는 전시회라구. 그것도 익명 심사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나라를 대표할 만큼 뛰어났다.
그런 무대에 최근 몇 년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블랑쉬 파브르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 22살에 르네상스 본선. 와. 와. 고훈 말고도 이런 경우가 있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와, 와 좀 그만햌ㅋㅋㅋㅋㅋ
└본선 진출자 평균 나이가 51세라고 들었는데 22살이면 고훈 빼면 최연소자 아닌가?
└왜 보도가 안 됐지?
└됐는데 묻힌 거겠지. 기사가 없진 않네.
└천재네.
└진짜 저런 애들 부럽다. 자기 일 열심히 해서 세계 무대에도 서고.
“그러니까. 엄청 열심히 했나 봐. 내일 한번 확인해 보자고. 22세에 르네상스 본선은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다. 이거 진짜 진짜 대단한 거야.”
알렉스가 명단으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또 다른 이름이 눈에 띄었다.
“와. 얘는 20살이야? 레나 자고예프?”
미술계 여러 정보에 빠삭한 알렉스에게도 낯선 이름이었다.
“자고예프. 자고예프. 아, 미하일 자고예프 교수 딸이었구나. 와, 대체 뭐야? 20대가 두 명이나 있어?”
└레나 자고예프는 좀 알려짐.
└공부 좀 해라. 20살에 르네상스 본선 진출했다고 엄청 많이 보도되더만.
└미하일 자고예프 교수 딸인데 고훈 빼고 최연소 진출자라 화제 됐었음.
“나라고 어떻게 다 아냐? 300명을 어떻게 다 훑어 봐. 아, 고훈 말고는 이 사람이 최연소야?”
└ㅇㅇ.
└블랑쉬 파브르 진출이 왜 묻혔는지 알겠네. 캐릭터가 너무 겹쳐.
└둘 다 어리고, 잘 그리고, 예쁘고 하니까 더 어린 쪽으로 기사가 쏠렸나 봄.
└근데 난 좀 그렇더라. 블랑쉬 파브르도 그렇고 레나 자고예프도 그렇고 그림보다 다른 걸로 보도되는 경향이 좀 있음.
└어떻게?
└레나 자고예프는 미하일 자고예프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아빠 딸로만 소개되고, 정작 작품은 사진도 안 올라옴.
└본인이면 속 좀 상하겠는데.
└블랑쉬도 예쁜 화가로 방송 출연 몇 번 하다가 방송 그만두고 작품만 하니까 금방 관심 끊겼지.
└르네상스 본선 진출할 정도면 실력도 있을 텐데, 너무했다.
“억울한 일도 있지. 언론이란 게 원래 그래. 단물만 쪽 빨아먹고 버리거든. 잘 알아보고 쓰는 기획 기사보다 그때그때 이슈 맞춰서 내는 게 조회 수가 잘 나오거든.”
└그거 젤 잘하는 사람이 님 아님?
└ㄹㅇ. 미술계 렉카는 알렉스지.
“시끄러워. 아, 진짜. 오랜만에 칼춤 좀 춰? 나, 이래 보여도 내 일에 엄청 자부심 갖고 살아.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튼 내일 이 작가들부터 해서 쭉 보고 마지막에 고훈 작가 보는 걸로 하자. 나 숙소 좀 다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 내일 아침에 다시 켤 거니까 그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