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96화 (39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70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6)

르네상스를 앞둔 시점에서.

현재 가장 사랑받는 화가를 둘러싼 차별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첫 운동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EIE 운동 지지자들은 다시금 분개하여 목소리를 모았다.

단 며칠 만에 여러 매체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고, 손자의 일이 고수열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몰래 촬영된 영상을 확인한 고수열이 신음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손자 고훈이 특례생 입학 절차를 밟으려다가 오해가 생긴 일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교직원에게 차별 발언을 들었던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영국 유학 시절 뼈저리게 겪었고.

파리에서 살게 된 몇 년간 심심치 않게 찾아왔거늘 정작 손자가 당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어린 손자가 대견하면서도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끄응.”

무엇보다.

프랑스의 여러 미술 대학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파리 보자르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격이 컸다.

고수열의 손자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미술계에 새로운 물결을 이룬 고훈을 미술계 종사자가 업신여긴다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 * *

“호칭이 중요해.”

-호칭?

역시나 가장 기본적인 지식도 없다.

비다 이 녀석을 그냥 두었다간 소중한 인연을 잃을 게 뻔하다.

“그래. 어떻게 부르는지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거든. 라벨링 효과라고 심리학에선 꽤 유명해.”

-난 잘 모르겠어.

“자기에게 붙은 이름대로 행동하려는 심리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 들어 넌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라고 반복해서 말하면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너한테 이런 일은 힘들다고 계속 말하면 할 수 있는데도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응?

“그러니까 친근하게 얘기하는 거야. 애칭을 만들면 더 좋고. 블랑쉬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도록.”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

“특별하게 느껴지니까.”

-……역시 잘 모르겠어.

“내 말대로만 하면 돼. 아주 자연스럽게 제안하는 거야. 나라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잠깐 간격이 생겼을 때 눈을 마주보고 물어볼 거야. 이 때 절대 부담스럽게 다가가면 안 돼. 듣고 있어?”

-으, 응.

“어색한 거 알아. 그래도 블랑쉬랑 더 가까워지고 싶으면 해야 해.”

-블랑쉬랑?

비다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하다.

-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없다니?”

-없어.

“블랑쉬 안 좋아해?”

-갑자기 그렇게 물으면.

한숨이 나온다.

“괜찮아. 말해 봐.”

연장자로서 인내심을 갖고 다독이자 비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망설였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로 생각하면 좋아하는데. 아니, 정말 많이 좋아하는데.

다행히 자기 마음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블랑쉬가 날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만날 리도 없고.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왜 그럴 리가 없어.”

화면 너머 비다가 씁쓸하게 웃는다. 어렸을 때, 새로운 무엇을 알게 되면 아이처럼 기뻐하다가도 뒤에서 저렇게 웃곤 했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너도 알잖아.

“내가 아는 건 너랑 블랑쉬가 특별하다는 것뿐이야.”

-훈아.

“다른 사람의 기준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블랑쉬에게 어울릴지 말지는 너랑 블랑쉬만 정할 수 있는 문제야.”

실로 그렇다.

시엔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는 이미 다섯 살 난 딸과 뱃속의 아이가 있었다.

그조차 사랑스러웠다.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그녀를 사랑했기에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엔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테오도 그때만큼은 본인을 잃고 싶지 않으면 포기하라 했지만 난 시엔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기를 마음먹었다.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멀리 떠나서 아이들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자고 말했다.

부족했던 것은 사랑뿐.

그녀가 나를 떠난 이유는 아버지와 테오가 결혼을 반대해서도 아니며, 나와 그녀가 가난해서도 아니며 단지 그녀가 날 덜 사랑했고 나보다 좀 더 현실적이었을 뿐이다.

“블랑쉬 좋아해?”

다시 한번 묻자 비다가 입술을 깨물고 괴로워했다.

저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과거 나는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었다. 동전 한 푼이 아쉬어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인지했다.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을 포기할 만큼 바보도 아니었다.

-좋아해.

그리고 비다도 바보가 아니다.

“좋아. 그럼 계속하자.”

-어. 그거 계속하는 거야?

“물론이지. 대화를 하다가 물어보는 거야. 자연스럽게. 부담 주지 말고 가볍지도 않게.”

-응.

“친구들이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 봐. 그럼 뭔가 나오겠지?”

-딱히 없잖아.

“애칭이?”

-아니. 친구가. 우리 말곤 거의 대화도 안 하던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무튼 애칭이 없으면 지어준다고 하는 거야.”

-어떻게?

“그 부분이 제일 중요해. 나라면…… 알파벳 두 글자로 지어준다고 하겠어.”

비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두 글자 단어가 뭐가 있지?

“QT.”1)

-Q하고 T?

“QT.”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하니 비다의 얼굴이 화면 너머에서도 알아볼 정도로 새빨게졌다.

-그런 부끄러운 말을 어떻게 해!

* * *

모처럼 좋은 생각을 알려줬더니 아직 용기가 부족한 모양이다.

비다가 서둘러 통화를 끊었다.

아쉬운 대로 이번에는 앙리에게 다정하고 달콤한 문구를 알려줄까 고민하던 차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리셨다.

“훈아, 잠깐 괜찮아?”

“네. 들어오세요.”

할아버지가 사과 주스 두 잔과 비스킷을 들고 들어오셨다.

간식을 먼저 가지고 오실 때면 항상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던 차.

바로 이야기를 꺼내셨다.

“뉴스 봤다. 욕 봤더구나.”

어제부터 심상치 않더니 결국 할아버지도 찾아보신 듯하다.

모르긴 해도 여기저기에서 이야기했을 테니, 언젠가는 알게 되시리라 생각했지만 아쉽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었어요.”

할아버지 눈이 곧 떨어질 나뭇잎처럼 슬프다.

“흔하잖아요. 신경 안 써요. 정말로요.”

“훈아.”

할아버지가 날 부르시고는 손등에 손을 얹으셨다.

흔한 일이라는 말을 괜히 꺼냈지 싶다. 그 말에 더 속상해하실 텐데 괜찮다는 걸 말하려다 보니 실언이 나오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네 마음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짐작은 해본단다.”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술계에 있다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오죽 속이 상했을까 싶어.”

씁쓸한 건 사실이다.

다시 태어난 이후 저번 삶과 달리 꽤 성공했다고 자부했었다.

앙리나 배도빈처럼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진 못했지만 나와 내 주변을 살피고, 과분한 사랑에 감사하고 또 기뻐했다.

상도 여럿 탔고 무엇보다 팬들이 많아져 적어도 미술 쪽에서는 두루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받은 인종, 계급이란 차단막에 부딪쳐 당황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훈아.”

할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할애비는 네가 누구보다도 자랑스럽단다. 그림을 잘 그려서도 아니고 훤칠하게 잘 커서도 아니야. 그냥 훈이 너라서 그래.”

“할아버지.”

“그것만 기억해 주면 좋겠구나.”

르네상스 전에 잡생각을 버리고자 여기저기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한 마디만 못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잘생겨서도 아니고 오직 나라서.

그 이유만으로 자랑스럽다는 말씀이 왜 이렇게 포근한지 모를 일이다.

“네. 저도 그래요.”

“그래?”

할아버지가 가난했더라도 분명 존경했을 거다.

“그럼요. 할아버지가 하신 밥 먹으면서도 이렇게 사랑하잖아요.”

“잉?”

할아버지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예끼, 이 녀석아. 할아버지를 놀리고 그래.”

할아버지도 웃긴 지 따라 웃으신다. 이렇게 크게 웃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한참을 웃은 뒤에 겨우 진정하고 슬쩍 본심을 꺼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자크 퀴리란 사람도 뭔가 느끼도록 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다고 믿고요.”

“음.”

“토론이라든가, 처벌이라든가. 그런 걸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잖아요?”

“있지. 아주 많이.”

“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건 특히 더 그렇고요. 근데 작년에 EIE 운동처럼 그림이라면 어떻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날 빤히 보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말로 전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으로는 나눌 수 있지.”

모든 일은 불가능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의미가 희미해지고,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일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기를 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언젠가 그 발자국이 모여 길을 이룬다고 믿는다.

* * *

“저…….”

-뭐야.

“그게.”

-무슨 말인데 대체. 벌써 5분째 저, 그, 어만 말하고 있잖아.

비다 라바니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미친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고훈이 전한 말이 너무나 선명히 남아서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블랑쉬를 향한 마음이 그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갈 용기가 되었다.

“혹시 애칭 같은 거 있어?”

-애칭?

화면 너머 블랑쉬가 인상을 썼다. 몇 분이나 뜸을 들이더니 고작 꺼낸다는 말이 애칭이었다.

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거나, 이클립스로 활동하면서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나 등 오만 걱정을 하던 차라 김이 새고 말았다.

“어, 없으면 내가 하나 지어주려고.”

-…….

“알파벳 두 글자로. 신기하지?”

-QT는 아니겠지?

“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비다 라바니가 당황하고 말았다.

블랑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나 잠깐 유행을 탔던 말장난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헛소리할 거면 끊어.

“자, 잠깐만.”

비다가 황급히 블랑쉬를 잡아세웠다.

“QT아니야. QT가 아니고.”

-그럼?

비다 라바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이었다.

지금 당장 두 글자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두 글자가 뭐가 있지? as? at? be? by? do? dj? en?’

“e, ex?”2)

비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블랑쉬의 눈이 거의 튀어나오고 말았다.

“자, 잠깐만! 이거 아니야! 아니야!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뚝-

뚜- 뚜- 뚜- 뚜-

“블랑쉬! 블랑쉬!”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비다가 오열했다.

* * *

1)Cutie(귀여운 사람)과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

2)전 애인, 전 남편 혹은 전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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