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9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5)
세계 최대의 미술 전람회 ‘르네상스’ 개막을 앞두고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는 여러 방면에서 홍보를 진행했다.
가입한 각국 협회를 통한 무료 항공권을 추첨, 인플루언서 및 예술가를 활용한 광고 의뢰, 대중 매체 특집 기획 등 마케팅 방식과 비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르네상스를 미술계의 전환점으로 여기는 탓이었다.
셰바송 씨몽을 필두로 한 미술계 인사들은 동시대 미술을 향한 오해의 시선을 돌리고, 미술 작품을 보는 행위가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미술계 이슈를 다루는 인기 프로그램 ‘대화를 나눠요’ 역시 현재 예술계 중심에 서 있는 미술가 고훈을 초청하여 르네상스를 소개하고 나섰다.
“사회자 중에 가장 귀여운 사회자. 이보다 귀여운 사회자는 없었다.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가. 대화를 나눠요 진행의 우진입니다.”
우진이 뻔뻔하게 빙긋 웃었다.
“다음 주죠?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전람회 르네상스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한 예술가를 모셔서 관련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태양의 화가, 고훈입니다.”
우진의 소개와 동시에 카메라가 이동하여 고훈을 잡았다.
방청객과 시청자 모두 열렬히 그를 환영했고 우진 또한 반갑게 악수를 나누다가 문득 고훈과의 눈 높이 차이를 느꼈다.
“키가……?”
“얼마 전에 182㎝이었어요.”
“빨리 앉죠.”
우진이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생일이 얼마 안 남은 걸로 아는데. 17살이 되나요?”
“네.”
“시간이 빨리 가네요.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어렸는데 지금은 저보다도 키가 크니.”
“대신 사회자님은 귀엽잖아요.”
“그 말은 제가 해야 농담처럼 들려요.”
“진심이에요.”
고훈이 빙그레 웃을 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우진도 포기하고 프로그램을 이어나갔다.
└고훈 저거 멕이는 거 아니냨ㅋ
└맞아 훈이 진짜 잘 컸지 ㅠㅠ
└가끔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음ㅋㅋㅋㅋㅋ
“근황부터 여쭤보죠. 북미, 서유럽, 동아시아 곳곳에서 해바라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뒤덮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감사하죠.”
고훈이 깍지를 꼈다.
“저는 EIE 운동이 혐오에 지쳐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네.”
“미움 받는 것도 힘들고, 미워하는 일도 사실 쉽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사랑하고 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고훈 작가가 크리스찬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그런 말이 생각 나네요. 성경에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대라는 말이 있죠?”1)
“마태복음이죠.”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무조건적인 수용은 좋지 않아요. 마태복음엔 이런 말씀도 있어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단둘이 만나 권고하라고요.”
“네.”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라고 하셨어요.”
“갑자기 성경 공부 시간이 되었네요.”
고훈이 작게 웃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면, 어떤 잘못이 생기면 개인과 개인이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작은 집단, 나아가 사회에 알리라는 말씀 같아요. EIE 운동처럼요.”
고훈은 혐오 문제가 개인과 개인, 작은 집단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에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뭔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뜻 깊은 일에 제 그림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어서 정말 기뻐요.”
“좋습니다. 다음은…… 파리 보자르 대학 교수 적격 심사를 보셨단 보도가 있었습니다.”
“아.”
“관련 보도가 나가고 파리 보자르 학생들이 열렬히 환호했는데요. 학교 측도 작가님도 이후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으셔서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크 퀴리의 태도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혹시나 교직원 중 한 명, 혹은 일부의 생각이 파리 보자르 전체의 생각인 것처럼 전달될 것을 우려했다.
“아직 배울 게 많아서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제안을 받은 건 사실이군요?”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되죠.”
“뭔가 알려지지 않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고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르네상스 이야기로 넘어가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르네상스 예선을 통과하셨습니다.”
“네.”
“익명 심사라서 불안했던 점은 없었나요?”
“불안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잘못된 방식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기회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공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봐요.”
“예선 통과 작품 300점은 따로 전시되고. 본 전시회는 또 다른 작품을 출품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일정이 빠듯하다는 의견도 많던데. 작업하기엔 시간이 충분하셨나요?”
“사실 작업 시간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무엇을 그릴지만 정해지면 하루 만에 완성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어땠나요?”
“정말 명확했어요. 덕분에 일찍 완성할 수 있었죠.”
“어떤 작품인지 정말 기대되는데. 고훈 작가가 주목하는 작가는 누가 있을까요? 역시 앙리 마르소인가요?”
“네. 그는 언제나 제게 영감을 줘요. 작년에 발표했던 금환이나 오솔길 같은 작품은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런가요?”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이요. 앙리 마르소 002나 2년 8개월 같은 작품이 유명하죠.”
“앙리 마르소 또한 작가님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푸른 해라든지요.”
우진이 <푸른 해>를 언급했다.
앙리 마르소가 미셸 플라티니에게 프로포즈하며 건넨 작품으로.
미셸의 푸른 눈과 해의 이미지를 겹쳐 활용하여, 크게 주목받은 적 있었다.
“네. 이미지를 섞는 작업은 언제나 즐거워요. 앙리도 제 그런 시도를 계속 봐 왔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지게 표현했죠.”
우진이 질문을 하려던 차, 고훈이 답변을 이어나갔다.
“사실 앙리랑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아요. 굳이 미술가가 아니더라도요.”
“흥미롭네요.”
“예를 들어 마에스트로 배도빈의 음악에도 정말 큰 영향을 받았고,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영화에서도 느끼는 바가 많아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유명한 분이 아니라도 제게 영향을 주는 분은 많아요. 당장 오늘 아침 산책할 때 만난 분도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분이셨나요?”
“강아지 산책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분 같았어요. 14마리를 동시에 데리고 계셨거든요.”2)
“14마리요?”
“네. 확실해요.”
“그분 성함이 혹시 강형…….”
“네?”
“아,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분명 서로 다른 집에서 자란 아이들일 텐데 싸우지도 않고 줄 지어서 너무 다정하게 다니더라고요. 대단하다 싶었죠.”
“확실히 그러네요.”
“또 집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타냐 씨에게도 영감을 받아요. 카페오레 그림을 정말 잘 그리시거든요.”
“작가님이 감탄할 정도면 정말 대단하겠는데요?”
“기회가 있으시면 소개해 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렇게 앙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요. 그래서 전 세계에서 참가하는 이번 르네상스가 기대되고요.”
“동시에 작가님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회이기도 하겠네요.”
우진의 질문에 고훈이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되네요.”
“기대하는 바가 정말 큽니다. 그럼 광고 후에 2부에서는 고훈 작가와 함께 르네상스 본선에 진출한 미술가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 *
2035년 프랑스 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받고 있었다.
파리 3대 미술관으로 알려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에서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미술 애호가들은 베네치아, 휘트니, 상파울루 비엔날레 이상으로 기대를 걸었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미술이 더는 탈세 방법, 이해 못할 행동으로 치부되지 않을 기회로 여긴 탓이었다.
└아, 진짜 기대된다. 이제 딱 5일 남았네.
└그러니까. 훈이랑 앙리 작품 빨리 보고 싶다.
└고수열, 프랜시스 베이컨, 장미래가 없어서 좀 아쉽더라.
└이번에 기대되는 게 가본다는 사람 진짜 많더라. 미술 평소에 관심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구경하면 되냐고 막 물어봄.
└나도 그러던데.
└훈이랑 앙리 영향이 크지. 워낙 유명해지니까 두 사람 작품 보고 입덕하는 사람도 많아짐.
└근데 꼭 그렇게 인기가 있어야 하나? 다들 흥행만 얘기해서 좀 별로더라. 인기 있어야만 예술은 아닌데.
└앙리가 그런 말에 얘기하더라. 인기를 바라지 않는 예술가는 있을 수 없다고.
└??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데, 누구나 자기 이야기 들어주길 바라잖아?
└그치 ㅋㅋ
└앙리 말은 인기 없는, 매력 없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말임.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부정하는 건 솔직하지 못한 일이고, 모든 예술은 최종적으로 대중성을 띤대.
└솔직히 진짜 어마어마한 예술품은 그 자체로 주류가 되지 않나? 훈이 해바라기처럼.
└ㅇㅇ 요새 진짜 해바라기 오만 데 다 걸림ㅋㅋㅋ
└캐롤라인 스트릭이란 학자가 훈이 처음 나왔을 때 쇼콜라티즘이라고 이름 지어줬는데, 진짜 그렇게 돼버림.
└아니 그럼 뭐 하냐고 ㅠㅠ 난 파리 못 간다고오 ㅠㅠ
└가상 전시관으로 봐. 실물하고 거의 차이 못 느낄걸?
└그래도 그게 같냐고. 냄새부터 안 나는데.
└현장 분위기란 게 있어서 완전히 똑같긴 힘들지.
└사람 미어터져서 차라리 가상 전시관으로 보는 게 감상에는 더 나을걸? ㅋㅋ
└그건 그럼.
└ㅁㅊ 이거 봤음?
└뭐?
└[파리 보자르 관련자, “한 교직원이 고훈에게 무례한 발언해 일이 틀어졌다.”]
└엥? 무슨 말을 했길래?
└기사 읽어보면 나와 있음. 총장이 고훈 설득하니까 옆에서 “교수진의 명예마저 떨어뜨릴 생각이냐”고 했다고 함.
르네상스를 향한 기대감이 나날이 치솟는 가운데.
파리 보자르에 재직하는 한 인물이 고훈의 교수 적격 심사 당일에 있었던 일을 언론에 제보했다.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지만.
몰래 찍은 동영상마저 공개되자 파리 보자르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물론, 미술계, 나아가 다른 시민들마저 분노하고 말았다.
└아니, 명예가 떨어진다니 무슨 개똥 같은 말이야? 훈이가 교수 되면 감사하다고 절해야 할 판에.
└의도가 뭔데?
└이거 동영상 보면 알겠지만 파리 보자르 전체 뜻이 아니야. 저런 생각 가지고 있었으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겠지.
└와. 세상에 훈이도 인종차별 당해? 지금 세계에서 젤 유명한데?
└심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 역겹네.
└요즘 세상에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인간도 있네.
└근데 프랑스가 원래 저래? 선진국 아님?
└병신 총량의 법칙 모르냐. 어느 집단에나 또라이 있음.
└프랑스 사회에 아직 귀족 계층 같은 느낌이 남아 있긴 함. 영국도 계급에 따라서 영화 배역이 나뉘잖아. 대학도 상류층만 가는 대학 있고.
└?????
└진짜임.
└아마 저 자크 퀴리란 놈도 비슷한 생각에서 꺼낸 말일 거임. 파리 보자르도 프랑스 상류층이 다니는 곳이니까 훈이 들일 수 없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훈이가 대화를 나눠요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구나.
└ㅠㅠ 우리 애기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ㅠㅠ
└ㅋㅋㅋㅋ영상 보면 어른이 애 달래듯 잘 말하던데?
└ㄹㅇ 오늘 처음 만났죠? 하면서 자기 소개하면서 당신이 함부로 대할 사람 아니라고 말하는 거 시원하더라.
└오히려 앙리가 더 흥분했음.
└암. 우리 존잘님 욕하면 못 참지.
└앙리 말 왤케 웃김ㅋㅋㅋㅋㅋ 메뚜기 마빡 같은 얼굴이랰ㅋㅋㅋㅋ
* * *
1)마태복음 5:39
2)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는 동물보호법 등으로 개의 산책이 의무화된 국가가 많다.
때문에 개를 산책시키지 않으면 법적 처벌을 받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직업이 생겨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