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8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4)
“이거 왜, 왜 이러십니까?”
자크 퀴리가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체구도 작은데다 운동한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으니, 한손으로 사과를 으깨는 인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다시 떠벌려 봐.”
“예, 예?”
“말해보라고.”
앙리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자크 퀴리가 고통을 호소했다. 앙리의 손을 마구 때린다.
저러다 큰일 나겠다.
“그만해요.”
다가가 말려도 자크 퀴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앙리.”
한 번 더 부르니 그제야 던지듯 자크 퀴리를 놓아주고는 장갑을 벗어 던졌다.
결투를 의미하는 건 아닐 테고 더러운 게 묻었으니 더는 끼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잘 들어.”
“켁. 케헥.”
“네가 누굴 욕하든 내 알 바 아니야.”
“크흑.”
“들어!”
앙리가 버럭 소리치자 자크 퀴리가 움찔했다. 당황한 탓인지 몸도 벌벌 떤다.
“근데 그 개떡 같은 소리가 날 향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저는.”
“닥쳐.”
“…….”
“당장에라도 네 메뚜기 마빡 같은 면상을 짓이기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한 번만 그 더러운 입을 열었다간 사람 구실 못 하게 될 줄 알아.”
“그만해요.”
앙리를 옆으로 밀어내고 자크 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세워주려는 의도였는데 이해를 못 한 건지, 내 손을 잡기 싫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숨을 내쉬어 마음을 달랬다.
“우리 처음 만나죠?”
“…….”
“전 고훈이라고 해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안함이라든가, 후회라든가, 하물며 분노도 찾아볼 수 없다. 짐작해 보건대 아마 본인이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를 거다.
“파리에서 살고. 미술을 해요. 갤러리도 운영하고 아이들하고 공공미술을 하기도 해요.”
내 말을 듣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프랑스 아이도 있고 저처럼 한국에서 온 친구도 있어요. 유대인, 아일랜드 출신도 있고 무슬림도요.”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에 경멸과 두려움이 차오른다.
“저도 그 아이들도 그림 좋아해요. 이 학교 다니는 학생들 못지 않을 거예요.”
파스텔 하나 살 돈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비다도.
누구 하나 제대로 봐주지 않지만 날개를 펼치기 위해 번데기 속에서 홀로 씩씩하게 분투하는 블랑쉬도.
황량한 땅에 기어이 푸른 나무를 키워낸 시현이도.
그리고 다른 모든 아이도 캔버스 위에서 자신을 가꾸고 있다.
“난 나와 내 그림이 있어야 할 곳을 잘 알아요.”
“그러면.”
“착각하지 말아요.”
단호히 말했다.
“내 그림은 미술관과 거리. 사람들의 방에 걸릴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처 받은 이들 곁이라면 세상 그 어떤 곳이든 찾아갈 거다.
가장 낮은 곳. 가장 외딴 곳. 아픔이 가득한 장소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곳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항상 태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 것이다.
해바라기처럼.
“그러니 내가 있을 곳을 당신이 넘겨짚지 말아요. 자크 퀴리.”
* * *
“야.”
대답하기도 싫다.
자크 퀴리란 인간을 만난 게 앙리 탓은 아니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다.
“야.”
가만히 있고 싶은데 왜 자꾸 불러대는지 모르겠다.
“고훈.”
“왜 자꾸 불러요.”
“먹어.”
기껏 돌아봤더니 갑자기 초콜릿을 건넨다.
따뜻한 말이라곤 입에 담아본 적 없는 이 인간 나름의 위로 방법이다.
“됐어요.”
“안 먹어?”
“……하나만.”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초콜릿 향이 유화 물감처럼 진득하게 번진다.
혀 위에서 천천히 녹아드는 꾸덕한 식감 또한 훌륭하다.
“신경 쓰지 마.”
“안 써요.”
대화가 멈췄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리 시내가 오늘따라 조금 낯설다.
“잡아다 줘?”
“뭘요?”
“그놈.”
“……자크 퀴리요?”
“그래.”
“부탁인데 그러지 말아요. 범죄예요.”
“빌어먹을. 화도 안 나?”
“조금 전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해놓고 왜 또 이래요?”
“열이 안 받게 생겼어?”
인종차별은 파리에서 살면서, 아니, 부모님과 함께 런던, 버뱅크에서 살 적에도 숱하게 겪어왔다.
파는 거 뻔히 아는데, 물건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그런 상품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상점 주인도 있고.
길을 가는데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려는 사람도 있다.
도무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꽤 긴 시간 억울해했었다. 당한 만큼, 그보다 더 갚아주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고.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다.
그들은 말 몇 마디로 변하지 않는다. 훈계로 잘못을 깨우칠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앙리가 생각을 정리하듯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했다.
“난 앙리나 미래 이모처럼 그런 사람들을 응징하는 데에는 관심 없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는 거고.”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하고 싸우면 그날 그림 그릴 힘이 있어요?”
대답하지 않는다.
“난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런 사람들한테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듬고 싶은 거예요. 경찰이 있으면 의사도 있어야 하잖아요.”
앙리와 장미래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되레 나는 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두 사람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분명 부패와 부정을 바로 잡기 위해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니까.
“의사라고?”
“그래요. 난 그게 더 중요해요.”
그보다 내게 좀 더 소중한 가치를 따를 뿐이다.
“그건 그렇고.”
“……?”
“앞으로 말할 때 뭐 생략해서 말하지 말아요. 깜짝 놀랐잖아요.”
“네가 멋대로 잘못 알아들은 거잖아.”
“본인이 잘못 말했다곤 생각 안 해요? 그리고 뭐, 귀찮아?”
“귀찮지.”
“그런 일을 나한테 넘기려 했다고요?”
“……아르센, 왜 이렇게 굼떠?”
“말 돌리지 마!”
* * *
[르네상스 예선 결과 공개]
[앙리 마르소, 고훈, 윌리엄 토마스 등 인기 작가 다수 출전]
[WAPA, “예선 심사는 익명으로 진행. 참여자 49,000여 명 중 300명 본선 진출.”]
[세계인의 축제 개막까지 D-20]
“49,000명?”
르네상스에 참여한 이들이 49,000명이 넘는다는 뉴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껄껄. 놀랐지?”
3주 동안 심사를 마치고 돌아온 할아버지가 회복 캡슐에 앉은 채 웃으셨다.
“그걸 다 보셨어요?”
“말도 마라. 눈 빠지는 줄 알았어.”
“어떻게요?”
르네상스 예선 심사위원은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서른 명이었다.
3주라면 한 작품에 1분만 써도 30,000여 점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나마도 먹고 자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일이니 어마어마하게 고생하셨을 거다.
“세 조로 나눠서 봤지. 못 본 작품이 훨씬 많아.”
“그럴 수밖에요.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출품한 사람들이 했지.”
어느쪽든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거다.
“이렇게 많이 참여할 줄은 몰랐어요.”
“글쎄. 숫자만 보면 많아 보이지만 규모를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구나.”
“그래요?”
“그럼. 미술 하는 사람이 어디 49,000명뿐이겠니.”
“그건 그래요.”
“아이고. 아이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누적된 피로가 어제 하루로는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마실 거 가져다 드릴까요?”
대답이 없으시길래 슬쩍 보니 벌써 작게 코를 골고 계시다.
편히 쉴 수 있도록 회복 캡슐을 닫고 TV도 껐다.
내 방으로 돌아와 관련 기사를 찾아보는데 볼수록 놀랍다.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가 추진한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전람회라서 그런지 다들 기대하는 눈치다.
관련 기사가 계속 쏟아지고 본선 진출에 성공한 300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오늘부터 방영한단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명단을 쭉 훑어보는데 반가운 이름이 있다.
Blanche Fabre
(프랑스, 회화, Age 22)
‘해냈구나.’
블랑쉬가 르네상스 예선을 통과했다.
첫 아르누보 공모전 때만 하더라도 금방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리라 주목받았지만, 언론과 대중은 블랑쉬의 외모에 시선을 모았다.
어떻게든 그런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여러 시도를 거듭했는데, 그게 도리어 블랑쉬만의 색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이번 기회에 멋지게 날개를 펼쳤으면 한다.
축하 메시지라도 보내놓자.
Lena Dzagoev
(러시아, 회화, Age 20)
“레나 자고예프?”
블랑쉬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아 검색해 보니 그녀의 아버지이자 러시아 전통 화풍의 대가, 미하일 자고예프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새하얀 얼굴과 붉은 머리카락을 보니 작년에 <금환>을 발표할 때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소개해 주셔서 인사만 나눴는데 이제 보니 대단한 화가였던 모양이다.
전 세계에서 단 300명만 선발하는 데 뽑혔으니 말이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울렸다.
비다가 보낸 메시지다.
{블랑쉬 본선 진출한 거 봤어?}
{진짜 대박이지!}
{아니, 아니야! 당연하지! 응!}
{무슨 그림 그렸는지 봤어?} 20:13
비다도 블랑쉬의 진출이 기쁜 모양이다.
예선 출품작은 봤다고 답장을 보내려던 차, 블랑쉬에게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도 축하해} 20:13
어지간히 기쁜지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양팔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흔드는 토끼가 제법 귀엽다.
{비다도 좋아하더라}
20:14 {축하한대}
{나 신났어}
{나한테는 연락 안 했어} 20:14
“…….”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다.
내게 연락했으니 당연히 블랑쉬에게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타이밍도 너무 좋지 않다.
블랑쉬가 신난다는 말을 꺼내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인데, 그 지점에 정확히 얘기하고 말았다.
서둘러 비다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는데 블랑쉬가 또 한 번 슬픈 문자를 보냈다.
{3일째 안 했어}
{내가 보낸 메시지 확인하고}
{답장도 안 해} 20:22
{어}
{문자 너무 늦게 확인해서 잠 깰까 봐 나중에 답장하려다가 깜빡하는 경우도 있잖아}
{비다 항상 네 이야기만 하던데?}
20:23 {정말로}
지금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어떤데? 무슨 그림인데?} 20:23
20:23 {당장 블랑쉬한테 전화해}
아무래도 언젠가 날 잡고 비다에게 오랜 세월 여러 경험과 드라마, 소설을 기반으로 집대성한 연애학을 전수해 주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