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7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3)
“하하하!”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는 찰나 쥘 로카르 총장이 크게 웃었다.
“원래 강의 계획이란 게 다들 어려워하는 일입니다. 여기 계신 교수들도 고심하니 지금 당장 말씀하기 저어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총장이 동의를 구하자 몇몇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호응하지만, 대부분 떨떠름한 표정이다.
“총장,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훈 작가가 이곳에서 무엇을 가르치려는지 알 권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잠시만요.”
처음부터 마음에 걸렸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자리에서 나눈 말들이 특례생 입학에 정말 관련되어 있나요?”
쥘 로카르 총장과 교수진들이 나를 향한 채 굳어버렸다. 눈만 껌뻑일 뿐이지 도통 대답이 없다.
“특례생이라고요?”
샤를로트 메스키다 교수만이 되물었다.
“네.”
선뜻 대답하자 도리어 저쪽에서 고개를 갸웃한다.
“뭔 소리야.”
맨 뒷 줄에 앉아 있던 앙리가 나섰다.
“앙리가 그랬잖아요. 대학 다닐 생각 없냐고.”
“그래.”
“그래요. 여기 커리큘럼 좋아 보이고 공부할 것도 많겠다 싶어서 부탁했고.”
앙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학생으로 다니겠다고?”
“그럼요?”
“네가 뭐 배울 게 있다고?”
일단 심호흡하여 답답한 마음을 다스렸다.
“아까부터 대화가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요. 대학 다니라고 한 건 앙리잖아요.”
“그래. 가르치라고.”
“……네?”
순간 말이 막혔다.
일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이상했던 지난 대화를 곱씹은 뒤에야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부족하다면서요.”
“교수가 없다고.”
“학생이 없는 게 아니라요?”
“학생이 왜 없어.”
“인구 감소 문제 때문에요.”
“지방 대학은 문제가 되겠지.”
“…….”
“이 대학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는 건 인구 감소가 아니라 멸종이야.”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다.
프랑스의 여러 국립 미술 대학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파리 보자르에 학생이 부족하기도 힘들다.
다시 생각하면 분명 그런데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자리가 특례생 입학 자격 심사가 아니고 교수 임용 적격 심사. 뭐 그런 거예요?”
“그래.”
“이분들이 전부 제가 교수직에 적합한지 확인하러 오셨다고요?”
“어.”
“앙리도 다 알고 진행했고?”
고개를 끄덕인다.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은데,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제멋대로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다.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좋아요.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당신 잘못이지만.”
“네가 멋대로 잘못 이해했잖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장소다.
한 번만 더 참자.
“왜요?”
“뭘.”
“왜 교수직에 추천했냐고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몇 번을 말해.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였냐고요.”
“너 가르치는 거 좋아하잖아. 쫑알쫑알.”
“뭐요?”
“그래서 방송 하잖아. 한 번 켜면 서너 시간씩 계속 말하더만.”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거 좋아하고 시청자들한테 뭐 알려주는 거 좋아하니까 권했다?”
“그래.”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내가 하기엔 귀찮기도 하고.”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셰바송 영감이 부탁하는데 귀찮잖아.”
“이 자리가 원래 앙리가 있을 자리였다는 말이에요?”
“그래.”
“왜 이렇게 당당해!”
버럭 소리치자 면접실에 모인 사람들이 움찔했다.
“아니, 고등학교도 안 다녔는데 교수는 무슨 교수야!”
“네가 뭐 배울 게 있다고?”
“많지! 너무 많지! 당신이 상식부터 배워야 하는 것처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너야말로 뭔 생각으로 입학하겠단 말이야?”
“뭐요?”
“네가 앉아 있는데 편하게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왜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일을 키우는데!”
“했어.”
“안 했어! 안 했으니까 지금까지 계속 물었잖아!”
“대학 다니라고 했고 너도 그런다고 답했잖아.”
“그러니까! 고등학교도 안 다닌 16살한테 대학 다니라고 하면 당연히 입학하라는 말로 이해하지!”
“황금사자상 받은 놈이 미대 입학을 해?”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죠!”
“하기 싫어?”
“싫어요! 아니, 학위도 없고 누구 가르쳐본 적도 없는데 하면 안 되죠!”
“하지 마.”
“……뭐라고요?”
“싫으면 하지 말라고. 너 싫다는 거 강요할 생각 없어.”
머리가 아프다.
설명만 제대로 했으면 이 많은 사람을 부를 일도 없고, 헛걸음하게 두지도 않았을 텐데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자, 잠깐. 마르소 군, 고 군. 진정하시게.”
쥘 로카르 총장이 나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쥘 로카르 총장이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이 학교, 아니,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럽다니?”
“말씀하신 것처럼 학생을 상대하는 일이잖아요. 전 여기 계신 분들처럼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 없고 아직 많이 부족해요.”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쥘 로카르 총장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말 말아요. 고 군 영상 몇 번 봤지만 정말 재밌고 유익하게 잘 하던데요, 뭘. 그리고 여기 있는 교수 모두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걸 추구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함께.”
“그래요.”
할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고 지켰던 교수법이다.
“마르소 군이 전달했다면서요. 지금 교수 인력이 너무나 절실한 상황이에요. 배우고 싶은 학생들은 넘쳐나고 그 열기도 대단한데, 스승이 없다는 건 너무 안타깝지 않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그래! 공부하고 싶다고 했죠? 원한다면 아틀리에를 하나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고 군은 거기서 자유롭게 공부하면 돼요. 학생들하고 같이.”
총장이 너무 간절해서 단칼에 거절하기 힘들다.
“물론 학점이다 시험이다 신경 쓸 게 많을 거예요. 그래도 여기 계신 교수 모두 자기 작품 활동 하면서 있어요. 그렇게 압박하는 곳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 규칙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교수나 학생들이 자유롭게 작품 활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거예요.”
“……총장님. 저.”
“그리고 요새 쇼콜라티즘 공부하고 싶은 학생 많은 거 알아요? 세상 어디에서 쇼콜라티즘을 배울 수 있겠어요. 여기 창시자가 있는데.”
내 작품 세계를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많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먼 발치에서.
책에서만 보았던 미술사조.
시대를 대표하는 화풍이 이런 방식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강의를 하게 된다면 내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많은 것을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자는 생각이 번질 수도 있는 법이다.
“동정심에 넘어가지 마. 네 일이야.”
날 여기로 끌고 온 인간이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한다.
“가만있어 봐요.”
총장의 손에 손을 얹었다.
“저 인간 때문에 헛걸음하게 해서 죄송해요.”
“고 군!”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갑자기 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황스럽다.
내가 정말 길을 비출 수 있는 사람일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다만 쥘 로카르 총장의 말처럼 누군가와 함께 걷는 일이라면, 그건 내가 평생을 추구해 온 길이다.
빈센트로 살 적에도.
지금의 나로서도 언제나.
“총장님, 고 작가가 이렇게 돌려 말하는 건 총장님 체면을 생각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교직원 중 체구가 작은 한 남자가 총장에게 다가가 위로했다.
“이렇게 거절하니 마음을 접으시는 게.”
“자네는 가만히 있어! 눈치도 없나? 왜 쓸데없는 말을 꺼내?”
쥘 로카르 총장이 남자에게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총장님도 알지 않으십니까.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또 헛소리할 생각이라면 당장 나가!”
남자를 꾸짖은 쥘 로카르 총장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말게. 파리 보자르는 자네가 너무나 필요하네.”
“고 작가 말고도 인재는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를 읽으니 아마 내가 교수직을 맡는 걸 꺼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굳이 누군가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진 않다.
미술로 사람들과 행복을 추구하고 나누고 사랑하는 일은 교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미술가의 삶으로 충분하다.
“총장님.”
“그, 그래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지.”
고개를 저었다.
“어리기도 하고 학위도 없으니 저분이 무엇을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아니.”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놀랐던 거니까요.”
“고 작가도 저리 말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자격이.”
쥘 로카르 총장이 남자를 밀쳤다.
너무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당장 꺼지라고 했네, 자크 퀴리! 내 앞에서. 아니, 고 군 앞에서 한 번만 더 실언했다간 용서치 않을 거야!”
자크 퀴리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파리 보자르는 지금껏 명예로운 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세상이 변해서 유학생을 받기도 하지만, 교수진의 명예마저 떨어뜨릴 생각이십니까?”
“닥치라고 했어!”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본인도 저렇게 분수를 알고 거절하는데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파리 보자르는 프랑스 상위 계층 사람들이 많이 입학하는 대학이다.
프랑스 사회에서 과거 귀족이었던 이들이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다니는 곳이다.
주변 시선 때문에 유학생 및 다른 계층 사람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나, 한국인인 날 교수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몇 번을 당해도.
이런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총장님.”
“아니. 이건 저놈 혼자의 생각일세. 고 군, 난 추호도 저런 생각을 가져본 적 없어. 믿어주게.”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손을 붙잡고 고개를 세차게 젓는 총장 뒤로 앙리 마르소가 보였다.
“살기 싫어?”
자크 퀴리의 멱살을 잡고 그를 들어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