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6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2)
-그래서 유학도 준비하려고.
화가로 활동하고자 마음먹은 차시현이 여러 학교를 알아보고 있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꼭 미술대학을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공부는 의지에 달린 거야. 어디서든 할 수 있어.”
-그러는 너도 파리 보자르 간다며.
앙리가 권했던 국립 미술 대학이다.
“아무래도 정보가 모여 있는 곳이니까. 커리큘럼도 괜찮아 보이더라.”
-나도 알아봤어.
“너도?”
-응. 5년제고 학년 상관없이 수업 들을 수 있고. 29개 아틀리에가 있대.
“맞아.”
29개 아틀리에는 연구실 같은 느낌으로 작품을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근데 입학하려면 대학 합격증 필요할걸?”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아니라면 한국에서 대학 합격증을 따야 어떻게 된다고 알고 있다.
-올해 수능 치면 되지.
“어?”
-수능은 초등학생 때도 만점 받았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블랑쉬, 비다와 대화하려고 프랑스말도 금방 익혔고, 무리 없이 대화를 하니 조금만 준비하면 DELF B2나 TCF NIVEAU 4 정도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준비하려고?”
-으음. 사실 너 간다고 하니까. 나도 유학 알아보는 중에 같은 학교 가면 좋지 않을까? 해서.
“하긴.”
-그치? 수업 같이 신청해서 듣고 그림도 같이 그리고 그럼 좋겠다. 예전처럼.
한국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일 그랬다.
녀석도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고 나도 학교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다니기 편할 것 같긴 하다.
“그렇긴 하네.”
-진짜? 진짜 좋아?
“응. 뭐. 학교도 괜찮은 곳 같고.”
-그럼 나 진짜 파리 보자르 들어간다?
“들어간다고 해서 쉽게 입학할 수 있는 곳은 아니야.”
-난 그럴 수 있어.
공부로는 정말 천재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녀석이 하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다.
-넌 언제 입학하는데?
“글쎄. 올해는 좀 힘들 것 같고. 내년 정도?”
-잘 됐다! 완전 같이 다닐 수 있겠네!
목소리에 생기가 흘러넘친다.
* * *
앙리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작업에 열중하느라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는데, 먼저 전화를 걸어주니 반갑기 그지없다.
-모레 오전에 데리러 갈 테니 시간 비워 놔.
일정표를 확인하니 딱히 다른 일정은 없다.
“시간은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대학 다닌다며.
“네.”
-명칭은 자격심사인데 얼굴 보는 자리야.
“아, 교수님들하고요?”
-총장도.
입학하려면 대학 총장과 만나야 하는 건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님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일단 추천과 특례로 입학하는 거니 면접으로 자격 요건을 파악하려는 것이리라.
교수진뿐 아니라 총장도 나온다는 건 여전히 이상하지만 말이다.
“알겠어요. 아, 혹시 피에르 일 알고 있어요?”
-사업 축소?
“네. 그제 가니까 정리 중이더라고요. 일을 그만두진 않겠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은퇴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럴 일 없어. 그런 사람이야.
그만큼 그림을 사랑한단 말이다.
피에르 말로도 나와 앙리의 그림을 계속 보고 싶다고 말하긴 했다.
-피에르에게 갔으면 본선 출품작이 완성되었단 말인데.
“맞아요. 앙리는요?”
-아직.
출품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
이것저것 준비할 일이 많아서 적당히 간격을 두었고 그건 앙리도 마찬가지다.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기다.
-처음엔 내 승리였지.
“네?”
-아르누보 공모전.
첫 번째 아르누보 공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걸 자랑하는 거다. 몇 년이 지난 일인데 계속 언급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고.
“흐흫. 두 번째는 언젠데요?”
-베네치아.
“그때는 상 같이 받았잖아요?”
황금사자상을 공동 수상했었다.
-다른 인간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앙리다운 생각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눈 크게 뜨고 기다려.
“그래요. 응원할게요.”
-뭐?
“응원한다고요.”
-……빌어먹을 자식.
앙리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진심으로 경쟁에 나서지 않아 속이 상한 것 같지만, 앙리 본인이 말한 대로 이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판단해야 한다.
2017년 4억 5,000만 달러에 낙찰된 레오나르 다 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가 2019년 1억 1,070만 달러에 낙찰된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보다 가치 있는 건 아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심사위원들이 나와 앙리에게 황금사자상을 주었다고 해서, 장미래보다 나와 앙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작품을 산 사람과 심사위원에게 좀 더 다가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앙리가 나를 또다시 이기겠다고 선언한 이유와 그것에 약이 올라서 내가 그를 도발한 이유는 단순하다.
서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고.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다.
“쉽지 않을 텐데.”
앙리가 이번 작품을 어떻게 볼지, 또 그가 어떤 작품으로 날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 * *
“……?”
앙리와 함께 프랑스 국립 미술 대학, 파리 보자르를 방문했는데, 특례생 자격 심사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여기는 건물 입구에 카페트를 깔아둬요?”
“글쎄.”
자세히 보니 먼지도 거의 묻어 있지 않은 새 물건이다.
이런 걸 관리하려면 대체 손이 얼마나 갈지 감조차 안 잡힌다.
“아이고. 어서 와요.”
나이가 꽤 있음에도 얼굴이 반지르르한 노인이 십수 명의 사람을 대동하고 마중을 나왔다.
“마르소 군, 고 군. 정말 반가워요.”
얼떨결에 악수를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힘있게 흔드는지 당황스럽다.
학생이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입학하면 홍보가 될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쥘 로카르. 이 학교 총장이에요.”
“네. 알고 있어요. 쥘 마자랭 추기경과 같은 이름이시라는 것도요.”
“오오. 우리 학교를 세운 분도 알고 계시고.”
“어떤 학교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봤죠.”
“하하하!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 나눕시다. 교수님들과도 인사 나눠야 하니.”
일단 환대해 줘서 고맙긴 한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면접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럽다.
안내를 받아 면접실로 향하는 도중에 몇몇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제라르 드뇌브입니다.”
“샤를로트 메스키다예요.”
“안녕하세요.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에서 전시회 재밌게 구경했어요.”
제라르 드뇌브, 샤를로트 메스키다 모두 재작년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냈다.
인상 깊게 봤던지라 인사를 건넸는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뇌브 교수님의 콜라주는 정말 멋지더라고요. 메스키다 교수님의 천 활용한 작품도 인상 깊었어요.”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내 작품을 언급할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이곳에 다니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이들 때문이다.
현장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이 교수로 재직하는 만큼 더 많은 지식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 해바라기는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샤를로트 메스키다 교수가 물었다.
“계속 그리고는 있어요. 작품이 모이면 전시회도 열고 판매도 하려고요.”
“경매에 출품하는 걸 꺼린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에요. 경매 대신에 정가로 하려고요. 500유로 정도?”
“500유로?”
샤를로트 메스키다 교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 모두가 나를 향했다.
말도 안 되게 비싸게 거래된 작품이 몇몇 있긴 하지만.
내 작품은 보통 100만 유로에서 200만 유로 전후로 낙찰되었다.
그걸 감안하면 500유로란 정찰가격에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작년에 멋진 경험을 했거든요. 같은 작품을 1,000점 만들어서 팔려고 해요.”
“에디션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설명하니 금방 이해한다.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개념인데, 공인된 복제품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작품 가격이 워낙 높아진 탓에 구매자의 부담을 낮추고자 판화처럼 같은 작품에 숫자가 붙여서 판매하는 걸 에디션 마케팅이라고 한다.
“온 세상이 해바라기로 물들었으니 무리도 아니죠. 작가님의 해바라기라면 1,000점이라도 완판될 테고요. 멋진 생각인데요?”
“그러길 바라야죠.”
사실 아무리 공식 복제품이라도 동일 작품이 1,000점이나 되면 소장 가치가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전문 수집가들이 눈독 들이진 않을 테고 순전히 내 그림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을 상대로 한 일인데.
잘 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모두 팔리게 된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들어가시죠.”
생각보다 면접실이 가까워서 대화를 아쉽게 마쳐야 했다.
면접실은 반원 형태의 계단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교수들이 강단을 둘러싸고 나는 그들이 보는 가운데 자리하게 되었다.
“자, 어디까지나 작가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마련한 자리니 편안히 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편안히.”
쥘 로카르 총장이 긴장을 풀어주고자 노력한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데 첫인상부터 참 좋은 사람이구나 싶다.
“그럼. 샤를로트 메스키다 교수님부터 말씀하시죠.”
조금 전 인사를 나눈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파리 보자르 대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형식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멋진 곳이에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의 계획서를 보니 학생들이 자신만의 철학과 사유, 개념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기술을 익히는 것도 좋지만,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깨우치고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파리 보자르는 균형을 이뤄 학생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부심이 느껴진다.
“바로 이어서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제라르 드뇌브 교수. 발언하세요.”
쥘 로카르 총장이 제라르 드뇌브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방금 말씀하신 학생들의 개성 발현은 이곳의 교육 이념이기도 합니다. 작가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들어보고 싶군요.”
무슨 말이지.
왜 학생인 내게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냐고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제라르 드뇌브 교수의 질문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면 역지사지일 거다.
내 개성을 찾는 것과 상대방을 돕는 일 모두 방법 자체는 비슷할 테니,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라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
질문하는 방식이 독특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개성을 키우고자 무엇을 가르친다는 건 대단히 조심히 접근해야 합니다.”
질문자 제라르 드뇌브 교수뿐만 아니라 교수진 모두가 진지하게 듣고 있다.
“학생이 관심을 보이는 일과 시도한 결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역시 학생이란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예술가니까요.”
내 생각에 동의하는 듯 또 몇몇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몇몇이 손을 들었다.
“피에르 몽퇴 교수. 말씀하시죠.”
쥘 로카르 총장이 피에르 몽퇴란 이름의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인상적인 답변이었습니다만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곳 교수들은 질문하는 방식이 참 독특하다.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입장을 바꿔서 물어본다.
“물론 다양성이죠.”
“다양성.”
“네. 모든 창작은 경험과 사유에서 태어납니다. 경직된 사고와 경험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순 없습니다. 학생들은 파리 보자르가 가진 29개 아틀리에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그것을 넘어서 사고 영역을 확장하고 감상의 기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거예요.”
“작가님의 생각이 저와 다르지 않네요.”
피에르 몽퇴가 빙그레 웃는다.
“어떤 강좌를 개설할 계획이신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네?”
정말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으니 또 같은 질문을 건넨다.
“쇼콜라티에 갤러리 채널을 보면 색채 이론에도 조예가 있으신 듯한데. 관련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요청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럴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는 거고요.”
이젠 정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