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5화
-르네상스-
13. 르네상스(1)
5월이 가까워지자 주변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다음 달로 성큼 다가온 르네상스 관련 포스터를 파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할아버지는 예선 심사 보안 문제로 3주 동안 집을 비우셨다.
앙리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나오는 법이 없었고, 블랑쉬 역시 와인 바 일을 그만두고 마무리 작업에 매진했다.
두 사람 모두 예선을 통과했다고 가정하고 본선 작품을 준비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여름 열기에 못지 않다.
논개 영정 사건 이후 한국 내부 문제를 처리하는 데 주력했던 장미래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던 모양.
장미래의 참전 여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니 뉴튜브를 통해 불참 소식을 알렸다.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이 애석함을 토로하는 가운데, 장미래는 최근 작품 보고 싶으면 진주로 가라는 댓글을 해당 영상의 고정 댓글로 설정해 두었다.
놀랍게도 정말 진주를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는 소식이 뉴스로 전해지기도 했다.
마은찬은 한동안 무리한 탓도 있고 백설기에게 차인 충격이 큰지 르네상스에 참가하지 않겠단다.
백설기는 좋은 친구, 동료로 지내고 싶다며 거절했지만, 내가 볼 땐 나이 차이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다만 마은찬은 ‘탈모 때문에 그래. 머리카락이 자라면 다시 얘기할 거야. 나 조금 질긴 편이거든.’라며 열심히 병원을 다니고 있다.
어찌되었든 탈모와 함께 몸도 관리하니 좋은 일이다.
비다는 EIE 운동을 계기로 SNS 상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는 탈레반, IS와 같은 집단을 비판하는 사회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만큼 르네상스에 참가할 순 없지만, 꼭 우승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지막으로 미술에 진지해진 차시현이 쇼콜라티에 가입해서 르네상스를 포함한 몇몇 전시회에 작품을 보내고 있다.
당장 성과를 내긴 힘들겠지만 언젠가 분명 크게 주목받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 * *
“생각보다 크지 않네요. 50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맞아요.”
눈썰미 좋은 성귤 과장이 르네상스 본선 출품작을 보고는 곧장 크기를 맞혔다.
“너무 보고 싶은데요?”
“도착해서 같이 봐요.”
피에르 말로를 찾을 예정이다.
이번 경합에 상당히 진지하기에 최고의 액자 장인에게 도움을 받고자 따로 약속을 잡았다.
성귤 과장의 도움을 받아 차에 그림을 싣고 파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액자 매장 샤똥으로 향했다.
“뭔가 한산하네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성귤 과장의 말대로 매장 곳곳이 비어 있다.
진열된 상품 수가 줄어 있고, 항상 액자를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던 샤똥답지 않게 손님도 몇 없다.
“어서 와요.”
피에르 말로가 직접 마중 나와서 반갑게 고개를 돌렸는데 근사했던 콧수염이 오늘따라 더욱 잘 말려 있다.
“피에르.”
“안으로 드시지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럽고 여유로운 미소 뒤에 무슨 일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화려하기 짝이 없던 이곳도 군데군데 비어 있어 마치 매장을 정리하는 것 같다.
“놀라신 것 같네요.”
“네. 어떻게 된 거예요?”
피에르 말로는 차를 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매장을 정리하는 중이에요.”
“네?”
“다음 달이면 대강 마무리할 것 같아요.”
6대째 이어온 가업은 차치하더라도 피에르 말로 같은 명장이 액자를 만들지 않겠다니.
믿을 수 없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이라. 있었죠.”
잠시 고민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나와 성귤 과장에게 차를 따라 준다.
“포숑의 사과차인데 맛이 좋더라고요.”
차 맛이 어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된 건데요.”
“흐음.”
한 번 더 재촉하자 피에르가 드디어 속마음을 꺼냈다.
“최근 몇 년간 매출이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액자에 무엇을 보관하려는 이들이 줄었으니까요.”
“…….”
“나름대로 생각해 봤죠. 그럴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지금 파리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액자를 걸고 감상할 만한 공간을 소유하지 못했어요.”
파리의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 때문이다.
105㎢ 면적에 220만 명이 부대끼고 살고 있는데, 역사적 가치를 지닌 오래된 건물을 허물 수 없으니 주거 공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니 본인 소유 집을 가지기 힘들고,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니 짐도 줄이게 되었다.
피에르 말로는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책은 종이에서 벗어났잖아요? 단순히 편리하기도 하니까요.”
“편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실물의 장점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피에르의 액자라면 누구라도 원할 거예요.”
“그건 그렇지요.”
피에르가 콧수염을 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예술품이 더는 액자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더군요.”
“그건.”
“캔버스 그대로 전시하는 경우도 많고요. 몇 년 전부터는 실제 물품보다 NFT로 인증된 파일이 더 많이 거래되었죠.”
실물이 있는 예술품보다 디지털 파일 거래 수가 더 많아지긴 했다.1)
“또 미술관에서 벗어나 생활 곳곳에 자리한 작품이 늘어났죠. 훈의 해바라기에 꽃병은 필요없잖아요?”
내 해바라기에 꽃병은 필요없다고 말하는 피에르 말로는 아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내 바람인지는 몰라도 도리어 기뻐하는 듯했다.
“미술이 액자와 미술관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저는 이 변화가 아주 반갑고요.”
“…….”
“매장 규모는 축소하지만 액자는 계속 만들 거예요. 훈이나 앙리 군의 작품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특권을 내려놓긴 싫거든요.”
피에르가 턱을 잡아당기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동의를 구했다.
액자 자체를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라 일단 안도하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직원들은요?”
“작년부터 알려서 지금은 다들 각자의 길을 정했어요. 액자를 만든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일을 찾겠단 사람도 있고.”
피에르라면 그들이 새로운 삶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돕고 있을 거다.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어떻게 그래요.”
“변화를 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에요.”
피에르의 말대로 영원한 건 없다.
단지 많은 이들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며 살고 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다.
“그럼 그림을 봐도 될까요?”
“그럼요. 과장님.”
“네.”
성귤 과장이 포장을 풀자 피에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울랄라.”
검지를 들고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몇 분이 흘렀을까.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손뼉을 친다.
“프랑스에는 영웅이. 한국에는 왕. 영국에는 혁명가가 있다더니 이곳에 빛이 있네요.”2)
* * *
“이건…….”
프랑스 국립 미술 대학의 교무처장 자크 퀴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셰바송 씨몽이 앙리 마르소를 추천해 기대하고 있던 차에, 그가 예상치 못한 사람을 천거한 탓이었다.
“이건 고훈 작가 이력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앙리 마르소가 차갑게 답했다.
“고훈 작가를 우리 대학 교수로 추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알아들었으면서 되묻는 의도가 뭐야?”
“아니. 고훈 작가는 이제 겨우 16살이지 않습니까. 학위도 없을 테고.”
“사람이 없다더니 배가 불렀군.”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썼다.
“이 학교에 있는 누구보다 정통한 놈이야. 가르치는 일에도 익숙하고, 연구 실적은 논할 가치도 없지.”
자크 퀴리는 반박할 수 없었다.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고훈이었다.
고수열, 프랜시스 베이컨, 윌리엄 토마스, 하라 요시토모 등이 살아 있지만 작품 활동이 중단되어 사실상 앙리 마르소, 장미래, 뱅크스 등 신진 세력에 자리를 물려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훈은 미술과 대중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쇼콜라티즘을 확보하여 새로운 문화 조류를 이끄는 주도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학위가 없다는 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도리어 프랑스 국립 미술 대학 입장에서는 고훈이 교수직을 맡아준다면 맨발로 나서 반겨야 할 입장이었다.
다만 자크 퀴리는 이만한 일을 본인이 정할 순 없다고 판단했다.
“저. 일단 총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뭐?”
앙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르네상스 준비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었더니 답을 미루는 행태가 몹시 거슬렸다.
“그게. 자격인정심사도 거쳐야 하고 여러 문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자크 퀴리가 절차를 무기 삼아 시간을 벌고자 했다.
“누가 누굴 심사해.”
“예?”
“내가 맡는다고 해도 심사할 생각이었나?”
“아, 그게. 형식적인 일이라. 작가님이 와 주신다면 물론 어느 정도 괜찮겠지만. 고훈 작가는 학위랑 나이가 아무래도 걸리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크 퀴리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앙리 마르소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일어났다.
“내가 직접 소개한 일이야. 내 얼굴에 먹칠할 셈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크 퀴리가 진땀을 뺐다.
매년 거액의 후원금을 지급하는 앙리 마르소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총장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16살한테 교수직을…….’
자크 퀴리는 앙리 마르소를 배웅하고 곧장 총장실을 찾았다.
앙리 마르소가 회화과 교수로 고훈을 추천했다는 말을 듣자 쥘 로카르 총장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여, 역시 좀 그렇지요?”
“지금. 지금 마르소 군 어디 있나?”
“그게 너무 과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대고 일단 보냈습니다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
“아니, 감사하다고 어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해도 부족할 판에 돌려 보내? 자네 제정신이야!”
“아, 아니. 전 그냥. 자격심사도 해야 할 테고. 원칙적인 이야기를 했을.”
“그러지 않아도 교수가 없어 고생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돌려보낸 게야? 자네 고훈 모르나? 어?”
“그. 화가…….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동양인인데다 16살이지 않습니까?”
쥘 로카르 총장이 어이가 없어 숨을 들이켰다.
“당장 추천서 이리 내고 내 방에서 썩 나가!”
* * *
1)2021년 3월. 디지털 화가 비플의 <매일 : 첫 5000일>이란 제목의 NFT(대체불가토큰) 그림 파일이 한화 764억 원(6,93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미술계는 반 고흐, 고갱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보다 비싸게 책정된 가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부는 앞으로 미술 시장이 NFT 위주로 형성되리라 전망하고, 한편에서는 실체가 없는 NFT 파일의 거품이 곧 걷힐 거라고 전망한다.
정보 출처: 메타버스 날개 단 NFT..3분기 거래액 100억弗 돌파, 한국경제, 서민준 기자, 2021.10.11.
2)프랑스의 영웅은 앙리 마르소, 한국의 왕은 장미래, 영국의 혁명가는 뱅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