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90화 (39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4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9)

“정말 축하드립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의 수석 큐레이터 게리 무어가 마은찬, 백설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세계 최대 미술 축제 ‘르네상스’를 앞둔 시점에서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 덕에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아요.”

백설기가 기쁨과 설렘을 다독이며 주변에 인사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의 가장 큰 전시회답게 이번 행사에는 화이트채플 내 최고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백설기는 수석 코디네이터, 유명 레지스트라, 아키비스트, 테크니션, 리셉셔니스트, 갤러리스트 등 모두가 최선의 결과를 내고자 노력했기에 오늘의 성공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1)

“두 분 덕분이죠. 준비를 아무리 잘해도 결국 작품이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요.”

게리 무어가 미소로 화답하다가 퀭한 얼굴로 앉아 있는 마은찬을 발견했다.

“많이 지쳐 보입니다.”

“네…….”

마은찬에게 최근 며칠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PT 트레이너의 거짓말처럼.

발표회를 마친 마은찬은 수많은 언론사에 이끌려 다녔고, 작품 준비 기간보다도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이제는 좀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또다시 일이 들어오니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레스터?”

게리 무어가 갤러리 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스터는 마은찬과 백설기 앞에 각각 얇은 서류 뭉치를 놓았다.

“정산서입니다.”

“벌써요?”

바로 어제 치러진 경매를 정산해 왔다는 데 백설기가 깜짝 놀랐다.

갤러리에서 일해 봤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정산서를 지급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작가님들께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서 확인해 보시죠.”

백설기가 마른침을 삼키며 정산서를 들었다.

전시회가 크게 성공했고, 경매 과정도 준수했기에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내심 기대하던 차였다.

백설기는 뛰는 가슴을 간신히 붙잡았다.

어제 경매 결과로 언론이 뜨거웠기에 대강 예상하는 금액이 있었다.

수수료와 세금을 떼더라도 전세 대출금을 갚고도 한참 남았다.

‘어디.’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을 넘긴 순간 총 합계란을 본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상보다 단위가 더 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크게 벌렸다.

‘100만?’

100만 2,400파운드.

한화로 약 15억 1,50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고 세금 및 수수료를 제외하고도 9억 6,800만 원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전신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

등줄기를 타고 오른 소름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말도 안 돼.”

백설기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편 마은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총액 86만 8,100파운드.

한화 약 14억 원에 달하는 거액으로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도 약 8억 4,000만 원이 정산될 예정이었다.

“누님…….”

“은찬아.”

시선을 마주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니임!”

“야아!”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철이 든 이후로 주어진 모든 시간을 미술로 보냈던 그들에게 처음 쥐어진 성공의 희열이었다.

“미쳤나 봐! 나 어떡해? 어떡해!”

“몰라요! 어떡해요?”

“나도 몰라!”

“제, 제육덮밥. 아니, 평생 제육덮밥 말고 제육볶음 시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지금 덮밥이든 볶음이든 그게 문제야?”

“그럼요?”

“그, 그럼이라니?”

“그럼 뭘 더 할 수 있는데요?”

백설기가 잠시 멈칫했다.

큰돈을 벌어본 적 없던 터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흑돼지!”2)

“네?”

“흑돼지로 만들면 되지!”

“저, 저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어요!”

“그래! 부위도 뒷다리살 말고 삼겹, 아니, 오겹살로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헤에엑!”

게리 무어와 화이트채플 갤러리 직원들은 한국말로 대화하는 두 작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 * *

“그래서 제주도 가서 흑돼지 오겹살로 만든 제육볶음 먹으려고요.”

마은찬과 백설기를 위해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열었는데.

파티 도중에 마은찬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흑돼지가 그렇게 맛있어요?”

“응! 엄청 맛있대!”

“제주도에 가서 먹을 만큼이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흑돼지 제육볶음은 서울에도 많이 팔 텐데. 굳이?”

방태호가 턱을 쓸며 새로운 정보를 전하자 마은찬이 테이블에 짚고 얼굴을 쭉 내밀었다.

“제주도에 가서 먹어야 의미가 있어요!”

“그, 그래?”

“네! 이건 열심히 한 저한테 주는 상이라구요!”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1년간 열심히 달려온 본인을 위해서라도 몸과 마음을 달랠 휴식이 필요하다.

“껄껄껄. 그래. 가는 김에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지.”

할아버지도 마은찬을 지지해 주신다.

흑돼지 오겹살로 만든 제육볶음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모르지만, 제육덮밥을 입에 달고 살던 마은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리라.

“그럼 일정 끝나면 바로 가려고?”

방태호가 물었다.

“네! 다음 주 월요일에 출발하려고요. 아아. 저 진짜 살아 있길 잘한 것 같아요.”

“흐흐. 비행기표는 내가 끊어줄게. 숙소랑.”

“정말요?”

“그럼. 이 정도는 해줘야지. 축하 선물이야.”

“대표님!”

마은찬이 방태호에게 달려들었다.

기쁘긴 기쁜 모양.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쭉 성장세를 보이긴 해도 이번 전시회처럼 크게 성공한 적은 없었다.

경매로 올린 작품이 완판되어 86만 파운드가 넘는 거액을 챙겼으니까.

부모 없이 홀로 유학 생활을 버티고, 건강을 잃으면서도 끝끝내 용기를 잃지 않은 그에게 좋은 결과가 따라 나 역시 기쁘다.

“제주도는 혼자 가요?”

“어?”

마은찬이 되묻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한다. 우물쭈물거리는 게 뭔가 있는 눈치다.

“혼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조용히 다닐 수 있고.”

“그게…….”

“같이 갈 사람 있어?”

방태호의 질문에 마은찬이 손가락만 꼼지락대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백설기 작가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로 원샷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장미래가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백설기와 유라임이 환호하며 손뼉을 치고 있다.

조금 부럽다.

“설마. 너.”

“아, 아니에요. 아직 얘기 못 했어요.”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은 있는 거네?”

“허허. 이거 좋은 소식이 겹겹이 들리는구나.”

“아아아아아아. 아니에요.”

마은찬이 얼굴을 감싸고 몸을 꼬았다. 몹시 부끄러워하는데 왜 이럴까 싶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미래 이모 좋아해요?”

뭐가 문제지.

마은찬이 고개를 들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할아버지, 방태호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으로 날 보다가 마은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여행 같이 갈 생각할 정도면 뭐 있는 거 아니야?”

“끄으아으어.”

마은찬이 목을 꺾고 괴로워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 좋아하는데 누님은 마음 없으신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알기로 장미래와 마은찬 사이에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둘이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나이 차이 때문에 마은찬을 남자로 생각하긴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13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 아닌가?3)

나라도 응원해 주고 싶다.

“마지막은 나!”

장미래와 유라임이 한 잔씩 비우자 이번에는 백설기가 일어서서 맥주를 마셨다.

세 사람 다 즐거워 보인다.

“미래 이모 어떤 점이 좋아요?”

할아버지, 방태호, 마은찬이 또 날 이상하게 보다가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나갔다.

“얘기는 해봤고?”

“전시회 잘 되면 한국 놀러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그런데?”

“사망 플래그 세우지 말라고…….”

“어?”

“그 뒤로 다시 얘기를 못 했어요.”

“왜. 흑돼지 제육볶음 이야기도 설기 씨가 먼저 꺼냈다며.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면 되지.”

백설기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아,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단둘이 여행 가자고 해요.”

“아직? 아직인 거야?”

방태호가 저렇게 능글맞게 누군가를 놀리는 건 처음 본다.

“아아, 그만하세요. 전 심각하다고요. 저 이런 거 잘 못하는 편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미래 이모가 아니라 백설기 작가님을 좋아한다는 말이죠?”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자꾸.”

마은찬이 투정을 부린다.

남녀 사이의 일은 꽤 경험이 있고 이한나 작가의 작품 등 연애 소설은 꽤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건만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잘못 짚긴 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백설기가 다가왔다.

“너 방금 뭐라 했어?”

“네, 네?”

“뭐라고 했냐고.”

백설기가 싸늘한 눈빛으로 마은찬을 내려다보았다.

“크흠.”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셨나.”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아니. 그게. 어.”

“똑바로 말해.”

“뭐, 뭐, 뭐, 뭘요?”

“내 이야기 아니야? 내 이야기를 왜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먼저 해?”

“그게 아니라.”

“아니야?”

마은찬이 눈을 꼭 감고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쳤다.

“좋아해요! 엄청! 엄청 좋아해요!”

백설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축하 파티 하려고 빌린 룸에 적막이 흐르다가 이내 장미래와 유라임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1)전시 코디네이터(Exhibition Coordinator):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요청을 받고, 또 의견을 타진하여 전시 공간을 직접적으로 꾸미는 직업.

레지스트라(Registrar): 작품 상태를 관리하고, 손상되었을 시 복구하는 직업.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라 보통 일이 발생할 경우 전문 인력을 단기 고용한다.

아키비스트(Archivist): 도록, 팸플릿, 리플렛 등 인쇄물 전반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또한 전시회‧작가와 관련한 언론 보도를 관리하여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국내외 모두 훈련된 인원이 적은 탓에 겸업하는 경우가 다수이나 현재는 전문 아키비스트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테크니션(Technician): 조명, 스피커, 스크린 등 전시에 필요한 장비를 관리, 설치하는 직업.

리셉셔니스트(Receptionist): 방문객 안내 및 문의 업무를 담당하는 직업. 단순 대응뿐만 아니라 고객과 갤러리 사이에서 소통이 원활하도록 돕는 역할을 맡는다.

갤러리스트(Gallerist): 아트딜러. 작가와 작품, 고객을 관리하여 작품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직업.

2)제주 흑돼지는 천연기념물 제550호 지정되어 260여 마리가 살아 있다.

현재 제주도 흑돼지로 유통되는 흑돼지는 영국 버크셔종과 재래흑돼지 사이의 교잡종이다.

맛있다.

3)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성은 대부분 연상이었다.

이모, 이모부의 딸이자 본인보다 7살 연상이었던 케이 포스스트리커르.

1881년에 만나 동거했던 3살 연상의 클라시나 마리아 후르닉(시엔).

반 고흐와 사랑을 나누다가 비극적으로 헤어지게 된 12살 연상의 마르홋 베헤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