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88화 (38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2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7)

똑똑-

“네.”

화이트채플 갤러리 직원이 대기실을 찾았다.

어설픈 사망 플래그를 세워 좌절한 마은찬이 모자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시간 됐어요. 입장 가능하시죠?”

“괜찮아요. 지금 나가면 되나요?”

“네.”

백설기는 조금 나아 보였으나 목소리가 상당히 떨려, 긴장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자.”

“으으으.”

백설기가 재촉하자 마은찬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발표회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며칠 동안 다듬고 외웠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마은찬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 연설문을 확인하며 걸었다.

문이 열리고 무대 위에 올라서서도 오직 작품 설명과 인사말, 재밌는 농담을 적어둔 파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반면,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객석을 확인한 백설기는 가슴이 철렁였다.

십수 대의 카메라와 수백 명의 미술계 인사들 앞에 서자 수없이 반복했던 다짐이 흔들렸다.

‘세상에…….’

미국의 부호이며 미술품 수집가로 알려진 더블리 부부와 캐롤라인 스위드.

미술 애호가로 유명한 파인애플사 상임이사 리처드 필립스.

영국 왕실의 방계 종친이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찰스 브라움.

데미안 카터 이후 영국 미술계의 버팀목이 된 프랜시스 베이컨과 스페인 출신 미술가 프란시스코 미로 등.

언론을 통해서만 보았던 이들이 빼곡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저들 앞에서 작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작품이 저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영국 사람들의 비난이 더 커지면 어쩌지.

여러 부정적인 생각이 그녀를 잠식했다.

백설기는 안정을 찾고자 장미래와 유라임을 찾았다.

스승 고수열과 고훈이 눈인사를 해줄 뿐 객석을 아무리 찾아도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야.’

새벽 같이 화이트채플 갤러리를 찾은 백설기는 갑작스러운 화이트채플 일대 교통난을 예상할 수 없었다.

“곧 작품 발표회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직접 사회를 맡은 게리 무어가 행사 시작을 알렸다.

장내 분위기가 정리되어 가던 차.

연설문을 확인한 마은찬이 고개를 들었다.

“히엑.”

마은찬의 기이한 소리에 초청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백설기도 깜짝 놀랐지만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미술가를 그저 귀엽게 여길 뿐이었다.

“경애하는 미술 애호가 여러분. 2035년 화이트채플 갤러리 프리미어 전시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수석 큐레이터 게리 무어입니다.”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지난 134년간 새롭고 변화된 미술을 소개해 왔습니다. 피카소,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프랜시스 베이컨 등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했죠.”

화이트채플 갤러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오랜 세월 다양하고 멋진 작품과 작가를 소개해 준 화이트채플 갤러리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 이 두 작가를 소개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은찬, 백설기 작가입니다.”

게리 무어가 자랑스러운 두 작가를 소개했다.

초청객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고 뒤늦게 행사장을 찾은 장미래와 유라임이 펄쩍펄쩍 뛰며 호응했다.

“안녕하세요, 백설기입니다.”

백설기가 인사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두 친구의 주책 덕에 긴장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어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좋아하는 미술품에 대해서 기록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10살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20년 넘게 이어온 취미인데,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분류하죠. 제가 생각해도 정말 잘 정리할 정도로요. 그런데 최근 아주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설기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 거예요. 오래된 거라 아깝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록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거든요.”

백업을 하지 않아 중요한 파일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아보니 HDD나 SSD 모두 수명이 있더라고요. 클라우드 서버도 마찬가지라 업체에서 계속 보완을 하고 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백설기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준비했던 농담을 꺼냈다.

“이과였다면 제 파일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죠.”

“…….”

“흐히힛.”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마은찬의 웃음 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초청객들은 백설기가 농담을 건넨 것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백설기가 다급히 본론을 꺼냈다.

“제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짧든 길든 수명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씁쓸하더라고요. 모나리자의 원본은 어떠했을까. 렘브란트의 야경은 또 어땠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모습만을 볼 수 있고. 또 긴 시간이 지나면 그 모습조차 과거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영원한 미술품은 없었다.

백설기의 말대로 관리를 아무리 잘 하더라도 옛 모습을 되찾을 순 없었다.

실물 그림이든 디지털 파일이든 언젠가는 훼손될 터였다.

“그러다가.”

백설기의 목소리는 어느새 안정을 찾고 있었다.

“작년 겨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부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행사장을 찾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일순간 고훈에게 시선이 쏠렸다.

백설기 역시 고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변색되어 그 찬란함을 찾아볼 수 없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생명을 얻어 세계 곳곳에서 다시금 피어났죠. 작가 고훈의 그러한 행동은 제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백설기가 갤러리 직원에게 신호를 주었다.

갤러리 직원은 백설기의 <화무십일홍>을 무대 앞으로 조심스레 옮겼다.

“물감의 변색이나 작품의 변형 등 작품의 영속성은 형태에 있지 않다고요.”

백설기가 본인의 <화무십일홍>을 들고 높이 던졌다.

판 위에 꽃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던 모래들이 공중으로 떠, 아주 잠시 꽃 형태를 보였다가 떨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모래들은 더 이상 꽃이 아니었다.

작품을 스스로 없애다니.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인상, 메시지, 감정이야말로 작품을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백설기가 당황한 이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전했다.

“저는 순간을 그리는 미술가입니다. 찰나에 영원을 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색과 향, 형태를 잃더라도 그 메시지는 지속되듯이 앞으로도 좋은 작품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설기가 고개를 숙이자.

행사장이 천천히 박수로 물들었다.

* * *

갑자기 내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지만, 백설기의 작품 세계는 더더욱 놀랍다.

그녀가 설명한 대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 죽고 작품 또한 완성된 그 순간부터 부패된다.

말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건넨 말은 내 입을 벗어난 순간 상하기 시작하여, 남의 귀에 닿았을 땐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작품을 소유하려는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충격일 거다.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돈을 들여 사지만, 본인도 작품도 영원할 순 없다.

백설기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찰나의 작품을 추구했고, 대신 작품이 영원히 살아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

예술품이 주는 인상과 메시지, 감정만은 영원할 수 있다.

150~160년 전에 그렸던 내 해바라기들이 지금에 와 부활한 것처럼 말이다.

“고민이 많았겠구나.”

할아버지가 손뼉을 치며 짧은 감상을 내놓으셨다.

“정말로요. 저라면 저런 시도 못 했을 거예요.”

말 그대로 단 1초만을 위한 작품이다.

발표회 전에 보았던 <비 오는 밤> 또한 짜놓은 물감을 쓸어내릴 뿐이니 찰나의 작품이라 할 만하다.

완성된 <비 오는 밤>은 큰 의미가 없지만, 물감을 쓸어내린 관객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터.

내 작품이 인상을 남기고 사라진다니.

나는 아까워서 못 할 시도다.

소유욕이 강한 앙리도 마찬가지다.

“멋지다.”

“…….”

열렬히 박수를 보내는 미셸과 달리 앙리는 심각한 얼굴로 백설기를 노려보았다.

아마 본인과 정반대의 개념을 제시한 백설기를 내심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인상적인 발표였습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게리 무어가 백설기의 발표를 정리했다.

다음은 마은찬 차례.

건강까지 잃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저리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은찬이 몸을 벌벌 떨며 무대 앞으로 나섰다.

“마, 마, 마.”

마마마라고 말한 마은찬이 생수를 들이켰다.

“포덤가에 사는 마은찬입니다. 어. 원래는 파리에서 살았는데 전시회 때문에 임시로 살고 있어요.”

이마를 짚었다가 코를 만졌다가 손을 가만두지 못한다.

“그. 요 앞 큰 길에 있는 케밥 집 아세요? 거기 맛있더라고요. 신기하게.”

마은찬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영국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영국 음식 맛없다는 말에 웃다니, 본인들도 아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너그러운 건지 모를 일이다.

혹시 영국 최고의 갤러리에서 영국 음식이 맛없다고 한 마은찬을 배짱 좋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저는. 어. 그러니까. 어.”

“정신차려!”

백설기가 마은찬의 등을 냅다 때렸다.

“아파요오.”

준비 없이 올라오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설 콘셉트가 개그였던 모양이다.

멋진 만담 듀오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 붕 떴던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그. 저는 재능이 없어요. 설기 누님처럼 멋진 말도 못 하고. 훈이나 앙리 형님처럼 놀라 뒤집어질 작품을 만들 줄도 몰라요.”

잔뜩 떨리는 목소리에서 진정성이 묻어나온다.

나도 할아버지도 심지어 앙리도 마은찬의 재기발랄함을 인정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냥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큰 무대에 올라올 수 있어서.”

기쁘겠지.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멍청한 놈.”

앙리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열심히 만든 작품뿐이에요.”

마은찬이 고개를 돌리자 갤러리 직원이 곧장 천으로 덮은 작품을 끌고 왔다.

흉상인가?

마은찬이 조소에도 능한 줄은 몰랐다.

“제목은 창작의 고통입니다.”

마은찬이 직접 천을 벗겨냈다.

모습을 드러낸 작품은 본인의 얼굴을 표현한 두상으로 놀랍도록 정교했다.

멀리서 본 탓도 있겠지만 정말 마은찬의 머리를 복사해 둔 것처럼 현실감이 넘친다.

특히 듬성듬성 있는 머리카락은 실제 머리카락으로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다만.

만약 저 작품이 단순히 창작의 고통을 느낀 본인을 표현했을 뿐이라면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 힘들 거다.

저렇게 잘 만든 두상을 보고도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내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마은찬이 쓰고 있던 모자를 쓱 하고 벗었다.

“…….”

아무도 감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헛기침만이 간혹 들릴 뿐 경건해진 행사장의 적막은 계속 유지되었다.

짝- 짝- 짝짝짝짝-

작품을 구상하다가 탈모를 겪게 된 미술가를 향해서.

그 진정성을 향해서 모든 사람이 경애를 담아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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