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1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6)
2035년 4월 7일 토요일.
개관 이래 변화와 혁신을 거듭해 온 영국 최고의 미술관.
화이트채플 갤러리가 프리미어 전시회를 열었다.
근현대 미술을 주도했던 이들이 세계 무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던 만큼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 일대는 마은찬‧백설기의 공동 전시회를 보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일찍이 취재에 나선 기자들은 화이트채플의 수석 큐레이터 게리 무어를 둘러싸 질문을 쏟아냈다.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마 작가와 백 작가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매우 재기발랄한 미술가죠.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나오고 그것을 구성하는 열정은 누구보다도 강렬합니다.”
게리 무어가 진심을 담아 마은찬과 백설기를 치켜세웠다.
게리 무어는 여러 우려사항과 개인적인 고통에도 끝끝내 멋진 작품을 만든 두 미술가를 마음 깊이 흠모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영국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습니다. 굳이 그들을 초청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죠. 여러분도 전시회를 둘러보시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게리 무어가 씨익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마은찬과 백설기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다른 요소를 개입시키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초청 작가가 밝혀지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번 프리미어 전시회의 주인공은 벤 존슨이나 존 웨인일 거라 기대한 분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은찬과 백설기를 괴롭혔던 말이었다.
영국 미술 애호가 일부는 왜 동양인을 섭외했냐며 문제를 제시했다.
데미안 카터 사건으로 크게 흔들렸던 영국 미술계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라도 영국 출신의 젊고 인기 많은 작가를 조명해야 하지 않냐는 취지였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게리 무어가 정색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1939년,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영국에 처음 소개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나치군에 의해 폭격당한 스페인 마을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나치 독일에 의한 강한 비판을 보이면서도 초현실주의와 후기 입체주의가 결합된 걸작이었다.
“1956년 영국 팝아트가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고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가 영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팝아트, 추상표현, 색면추상 등.
모두 당대 미술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항상 새로운 작가를 소개해 왔습니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작품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 전시된 작품이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도왔죠.”
게리 무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 프리미어 전시회 이후에 마은찬, 백설기 작가의 작품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리라 확신합니다.”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의 위상이 워낙에 높은지라.
영국 출신 미술가, 미술 애호가들의 불만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리 무어는 화이트채플 갤러리가 주류에 편승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새 물길을 내는 주도적 공간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마은찬과 백설기가 미술계에 큰 거목으로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허. 이거 재밌구나.”
마은찬과 백설기의 작품 발표회를 기다리며 전시품을 구경하던 차.
할아버지가 마은찬‧백설기의 공동 작업물에 관심을 보이셨다.
레진 아트로 보이는데 투명한 물감 튜브 안에 장미를 그려 넣은 작품이다.
장미를 짜서 빨간 물감이 내는 형태다.
빨강뿐만 아니라 바다를 짜내는 파랑, 별을 짜내는 노랑 등 색과 물체를 연관지은 작품이 여럿이다.
재밌다.
“……뭐야, 이건.”
“그러게. 마르지도 않았는데?”
옆에서는 앙셸 부부가 백설기의 <비 오는 밤>을 감상 중이다.
종이 위에 물감을 여럿 짜놓았는데 미셸의 말대로 표면도 마르지 않았다.
지표면에 닿은 빗방울을 표현한 건가?
여러 가능성을 염두하고 고민하던 차에 미술관 직원이 멋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감상에 도움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알면 귀찮게 굴지 마.”
앙리가 정중히 물어본 직원에게 무안을 주자 미셸이 팔꿈치로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플 것 같다.
“부탁드려요.”
미셸은 상냥하게 웃었지만 직원은 당황해서 왜 저 부부에게 말을 걸었을까 하고 후회하는 눈치다.
“제목은 비 오는 밤입니다. 종이 위에 짜놓은 여러 파란색이 지면에 닿아 뭉친 빗방울 같죠?”
“그러네요.”
진한 파란색, 어두운 파란색, 하늘색 등 여러 파란색 계열 물감을 방울 지게 짜 두었는데.
가운데는 하얀색 물감이 원형으로 넓게 펴발려져 있다.
웅덩이인가?
아직은 이 작품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가장 의문인 건 물감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아주 흥미로운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밀대를 잡아보시겠어요?”
작품 앞에 작은 밀대가 놓여 있다.
“이제 그걸로 작품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주시면 돼요.”
“네?”
미셸이 놀라 되물었다.
“참여형 작품이니 걱정 마세요.”
관람객이 참여하는 작품은 흔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우 희소하다.
관객이 완성된 그림에 변형을 가하면 다음 사람은 원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원이 거듭 종용하니 미셸도 안심하고 밀대로 <비 오는 밤>을 쓸어내렸다.
“어?”
순식간에 밤 배경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짜놓은 여러 파란색이 아래로 쓸리면서 비 내리는 밤을 이루었고.
하얀색 물감으로 감춰져 있던 작품 한가운데에 우산을 쓴 아이가 드러났다.
아이 밑에는 하얀색 길이 나 있다.
단지 그림을 쓸어내렸을 뿐인데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직접 물감을 쓸어내린 미셸은 물론이고 나와 할아버지, 앙리, 아르센 모두 깜짝 놀랐다.
“뭐야.”
앙리가 <비 오는 밤>을 자세히 관찰했다.
“허허. 신기하구나.”
할아버지도 유심히 들여다보시더니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프린트한 종이에 짜놓은 거로군. 재밌는 발상이야.”
할아버지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과연 그렇다.
우산 쓴 아이 그림을 출력하고 그 위에 물감을 짜두어 감춰둔 거다.
그러고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쓸어내리니 순식간에 그림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쓸리는 걸 고려해서 물감을 짜놓을 위치와 색을 배치했을 테고, 물감 양도 조절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기법이다.
장미래와 마은찬이 백설기를 높이 평가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휘발성이 강한 작품이라 전시회에서 보이기엔 걱정되기도 한다.
나와 할아버지, 앙셸 부부야 이 순간을 직접 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화이트채플 갤러리와 이야기할 게 있다며 자리를 비운 방태호가 좋은 구경을 놓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어떻게 전시돼요?”
미셸이 갤러리 직원에게 물었다.
“시간 간격을 두고 새 작품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위치와 색이 정해져 있으니 누구나 다 완성할 수 있겠지.”
앙리가 답을 내놓았다.
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백설기뿐이라면 <비 오는 밤>만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 테지만.
프린트한 종이에 물감을 짜놓는 일뿐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강한 휘발성을 누구나 쉽게 완성할 수 있는 장점으로 보완한 것이다.
첫인상보다 훨씬 치밀하게 계산된 작품이다.
앙리는 <비 오는 밤>이 마음에 들었는지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구매 의사를 밝혔다.
“원본이 따로 있나?”
“NFT로 인증된 원본 파일과 백설기 작가님이 직접 만드신 작품이 있습니다.”
프린트를 했으니 원본 파일이 있을 터. 그걸 NFT(대체 불가 토큰) 기술로 인증해 거래하는 것 같다.
“아르센, 이 작품 사 놔.”
“네.”
앙리가 아르센에게 경매에 참가할 것을 지시했다.
“허허. 설기가 한 건 했구나.”
“그러게요.”
까다롭기로 소문난 앙리의 수집욕을 자극할 만한 작품이었다.
이런 작품들이 몇 점만 있어도 아주 크게 흥행할 테고, 백설기는 금세 유명 미술가로 알려질 거다.
“오우.”
앞쪽에서 누군가 탄성을 냈다.
돌아보니 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더블리 부부가 눈을 빛내고 있다.
느낌이 좋다.
* * *
“누님, 저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작품 발표회를 5분 앞둔 시점에 마은찬이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대기실에 함께 있던 백설기가 깜짝 놀라 마은찬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않은 마은찬이 숨 쉬기 어렵다고 하니 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었다.
“어떤데? 어? 구급차 부를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가슴이 막 답답해?”
“막 답답하고.”
“응.”
“손이 막 떨리고.”
“저혈당! 저혈당 아니야?”
“혈당은 계속 체크해서 괜찮은데.”
“응.”
“긴장돼서 죽을 것 같아요.”
백설기가 있는 힘껏 마은찬의 등을 때렸다.
“악!”
“죽을래! 놀랐잖아!”
“끄으윽……. 한 대 더 맞으면 진짜 죽을 것 같아요.”
마은찬이 몸을 틀어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긴장을 풀려고 건넨 농담인데 예상 외로 백설기의 손이 매웠다.
“그런 농담이 나와? 어?”
“죄송해요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영국 최고의 갤러리로 손꼽히는 화이트채플 갤러리가 1년 중 가장 공들인 행사이니 긴장되지 않을 리 없었다.
영국 미술계에서 아쉬움을 표하고, 영국 미술 애호가 일부가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마은찬과 백설기를 영국 미술가의 기회를 가로챈 불청객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으니.
그런 만큼 뛰어난 작품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부담이 어깨를 짓눌러 매일 밤 잠을 설쳤고, 그럴 때면 피로한 몸을 이끌고 작업실을 찾았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몸을 움직여 완성한 백여 점의 작품들.
그것을 소개하려고 하니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님.”
“왜.”
백설기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번 전시회 잘 되면…… 한국 놀러가도 돼요?”
마은찬이 목소리를 떨었다.
“한국 안 간 지 너무 오래됐는데 사실 가도 만날 사람도 없고 가서 할 것도 없거든요. 제육덮밥은 먹고 싶지만 그거 때문에 비행기 타기엔 아까우니까.”
마은찬이 부모 없이 자랐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근데 누님 보러 가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마은찬이 백설기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그대로 서로 말이 없다가, 마은찬이 다시금 물었다.
“이번 전시회 잘 끝내면. 놀러가도 돼요?”
백설기는 당황스러웠다.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막내 동생 같은 마은찬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잔뜩 목소리를 떨며 무엇을 전하는 것 같았다.
“너…….”
“네?”
“왜 하필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네?”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다 끝이 안 좋은 거 몰라?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백한다든가, 이번 일이 잘되면 부모님께 잘한다든가 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잖아!”
“아!”
마은찬이 소리쳤다.
여러 영화, 소설에서 수없이 많이 봤던 레퍼토리였다.
“취소! 취소!”
“이미 말했잖아!”
“아으으으. 망했어요. 우린 다 망할 거예요. 나 이런 거 잘 믿는 편이라구요.”
마은찬이 양쪽 뺨을 감싸고 좌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