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60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5)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르네상스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개나리가 피었다.
‘귀엽다.’
앙증맞은 노란 꽃잎이 거리를 물들였듯이 EIE 정신도 우리 삶에 자리잡고 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처럼 집회가 계속 이어지진 않지만, 차별과 증오, 혐오 범죄를 심각하게 인지하려는 노력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상대로 서로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 교육하여 다름을 존중하는 인성 교육 과정이 신설되었고.
사회에서는 인종차별 또는 노동자의 권익을 침해한 기업을 상대로 불매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기업에서도 직원을 채용할 때 업무 능력 평가 기준에 집중하고 출신 국가, 나이, 성별 등은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사실 아직도 거리에 나서면 괜히 시비 거는 사람이 있으나 중요한 건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만. 은찬이 전시회가 다음 주구나.”
아침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할아버지가 마은찬의 전시회가 가까이 왔음을 상기하셨다.
“네. 고생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럴 테지. 그 나이에 당뇨 판정을 받았으니 충격이었을 게야.”
처음 연락받았을 땐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젊은 나이에 지병을 얻어 심하게 좌절했던 탓인데, 그가 나쁜 일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했다.
“그 상황에서 결국 잘 준비했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백설기 작가님 없었으면 못 했을 것 같대요.”
“음. 이번에 가서 많이 축하해주자꾸나.”
그럴 생각이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한 마은찬과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했던 백설기.
그 두 사람 모두 축하받아 마땅하다.
“그건 그렇고. 학교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가지 않는 편이 나아 보여요.”
앙리 4세 중학교를 정말 즐겁게 다녔지만 그 이상 진학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싶다.
여러 행사를 하면서 등교하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마지막 학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20일만 출석했다.
푸생 교장 덕에 편의를 많이 봤지만 사실 졸업을 못 할 뻔했다.
앞으로 더욱 바빠질 테니 학교 생활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래.”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답이니 이젠 그걸 지켜야겠구나.”
할아버지는 항상 내 의견을 존중하셨다.
하나뿐인 손자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하면 말리는 게 보통이겠지만, 할아버지는 걱정대신 함께 고민해 주셨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반대하지 않으셨다.
걱정이 앞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할아버지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가능성과 의지를 꺾을 수도 있다며 말이다.
“네. 학교 그만두면 작품할 시간도 늘어나니까요. 다른 일도 할 수 있고.”
“그래. 세상에는 학교랑 그림만 있는 게 아니란다. 학교 가는 시간에 꼭 붓을 잡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옳은 말씀이다.
“그렇지. 운동 시간을 더 늘릴 수도 있겠구나.”
하루 2시간씩 함께 운동하는 걸로는 부족하신 모양이다.
“그보다는 여행을 좀 다니고 싶어요. 공부하고 싶은 것도 있고.”
“여행?”
“도시에서만 있으니까 답답하더라고요.”
“하긴.”
“또 미술이 어디에 쓰이는지 깊게 알아보고 싶기도 해요. EIE 운동 일도 그렇고 비비안하고의 콜라보도 그렇고.”
두 일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림을 판매하는 것만 생각하던 나는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세우고 전시회로 소득을 얻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었는데.
EIE 운동과 비비안 이스트우드와 협업해 만든 패션 브랜드 G.O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해 주었다.
내 그림이 미술관을 벗어나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들다니.
그 감각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거라면 대학에서 많이 연구하지.”
“대학.”
“관련 세미나도 많을 테니 찾아보는 것도 좋겠구나.”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는데 또 학교가 앞에 놓였다.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그 나름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겠으나, 내가 바라는 지식만 공부할 순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는 그런 문제가 대학보다는 좀 더 심할 테고, 대학은 좀 더 자유롭다는 점이 다르려나.
“대학은 어떻게 가요?”
“시험을 봐야지. 고등학교 졸업도 해야 하고. 예전에는 미대가 연령제한이 있었는데 요새는 또 없는 것 같더구나.”1)
“그럼 못 들어가겠네요.”
“추천제도 있는 것 같더구나. 알아봐 줄까?”
“아니에요. 공부는 어디서든 할 수 있어요.”
책과 강의, 예술 작품은 수없이 많다. 대학에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아무리 좋은 스승이라도 한 사람이 아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지식을 받아 먹는 데 익숙해지면 폭 넓은 경험과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그건 나태했을 때 이야기 같구나. 대학에서도 공부하고 나와서도 열심히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요. 그래도 자격이 없는데 무리해서 들어가고 싶진 않아요.”
“훈이가 입학하고 싶다면 다들 손 벌려 환영할 텐데?”
매스컴에서 야단스럽게 다뤄질 것 같아서 꺼려진다.
“또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입학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자격이 없는데 들어가면 눈치 보일 것 같아요.”
“껄껄. 아주 생각이 없진 않구나.”
“그냥 그렇다고요.”
* * *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장이자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 협회장 셰바송 씨몽이 마르소 저택을 방문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대학에 인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네.”
프랑스 국립 미술 대학 보자르는 최근 몇 년간 9명의 교수가 퇴임하며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학 교수 교원난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고질적 문제였는데.
2001년 프랑스에서 재직하던 정교수 17,000명 중 약 8,500명이 2010년이 되기 전에 퇴임하였다.
그런 와중에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비교적 적은 연봉과 강한 사명감이 요구되는 교수직은 비인기 직업으로 인식되어 프랑스 정부와 대학은 교원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
“자네 나이도 벌써 39이야. 후학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나.”
앙리 마르소는 무릎에 앉힌 반려견 빠삐용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앙리 군!”
씨몽 협회장이 재차 부르자 앙리가 심드렁하게 굴었다.
“몇 년 전에 푸생한테 속아서 꼬맹이들을 가르쳤어. 2년이나.”
“……?”
“그 귀찮은 짓을 또 하라고?”
앙리 마르소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학생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뼈저리게 느낀 그는 대학 강단에 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우리 프랑스 미술계를 위한 일이야. 자네가 강의를 열면 학생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놈들에게야 영광이겠지.”
“그래! 이제야 알아주는구만!”
“무슨 소리야. 벌써 노망났어?”
“뭐?”
“작업 시간 빼앗겨. 말귀 알아듣는 놈은 없어. 대체 왜 내가 나서야지?”
대학 교수를 충원하기 위해 급여 개선을 하긴 했지만, 15만 유로의 연봉으로 앙리 마르소를 움직일 순 없었다.
“말했잖나. 후학을 양성할 때라고.”
앙리가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짓이야.”
“의미가 없다니!”
“가르치는 건 한계가 있어. 내게 배운 놈이 다른 공부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말을 절반이라도 이해할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장담하는데 날 충족시킬 놈은 고훈 그놈 말곤 없어. 어중간한 애들 데려다가 아무리 가르쳐봤자 내 속만 터지지.”
“…….”
“그런 놈들이 다른 공부, 다른 생각하면 내가 그걸 보고만 있을 것 같아?”
그럴 놈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그놈들은 평생 내 뒤만 쫓게 돼. 위대한 앙리 마르소의 열화판으로 살게 된다고.”
앙리가 빠삐용의 목에 리본을 달아주었다.
“그게 그놈들에게 좋은 일일까?”
셰바송 씨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얼토당토 않는 말 같지만 앙리 마르소는 본인의 강의 방식과 대학 교육 자체에 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예술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야. 잘할 놈은 알아서 잘하게 돼.”
“자네 생각이 전부 틀린 건 아니나 그렇다고 옳은 것도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셰바송 씨몽을 응시했다.
“스승이란 지식만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닐세. 학생이 각자의 목표를 설정하고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존재지.”
“내 취향 아니야.”
“앙리 군!”
“혈압도 높다면서 왜 이렇게 흥분해? 아르센, 영감한테 케일 주스 한 잔 줘. 내 것도.”
“곧 준비하겠습니다.”
앙리는 교수직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케일 주스 타령이나 하니 더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가겠네. 이거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셰바송 씨몽이 교수 임용 관련 서류를 두고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흔들의자에 앉은 채 빠삐용을 쓰다듬던 앙리 마르소는 아르센이 가져다준 케일 주스를 마셨다.
‘스승이란 지식만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닐세. 학생이 각자의 목표를 설정하고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존재지.’
삐져서 돌아간 셰바송 씨몽의 말을 곰곰이 곱씹게 되었다.
앙리 마르소가 교수 임용 관련 서류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 * *
“이게 뭔데요?”
앙리가 아침부터 뭔가를 가져왔다.
인적사항을 적는 서류 같은데 무엇에 쓰는지 얘기도 없이 들이밀었다.
“대학 다니라고.”
“대학이요?”
며칠 전에 할아버지랑 대학 이야기를 나눈 건 어떻게 알고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추천서예요?”
“그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서 일단 자리를 권했다.
“왜. 관심 없어?”
“고민하고 있긴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요. 절차도 복잡하고.”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기왕이면 하는 게 좋겠죠. 대학 다니면서 다른 공부를 못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해.”
“왜요? 갑자기 권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사람이 없어.”
“네?”
서류를 보니 파리 보자르라고 적혀 있다.
“보자르에요?”
“어.”
프랑스에서는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국립 미술 대학에 학생이 없다니, 인구 감소가 심각하긴 한가 보다.
“그럼 정원이 없어서 난 자리예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입학함으로써 다른 학생이 입학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음……. 그럼 이것만 쓰면 돼요? 다른 절차는요?”
“알아서 처리할 거니 신경 꺼.”
의심스럽다.
“왜?”
“웬일로 이렇게 친절해요?”
“싫으면 하지 마.”
여전히 툴툴대긴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사람이 많이 유해졌다.
“아니에요. 해볼게요.”
“이름 적어.”
“주소도 써야 해요?”
“적기나 해.”
* * *
1)프랑스 국립미술학교 등 예술 관련 대학은 입학 연령을 만 26세로 규정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이러한 나이 제한이 차츰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고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예술대학의 연령 제한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설정을 적용했다.
2)참고자료: 프랑스 ‘대학 교수 수급’ 적신호, UNN, 200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