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9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4)
한 차례 눈물을 쏟은 마은찬은 절치부심했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부모 형제 없이 자란 그에게 누군가의 품에 안긴 경험은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백설기에게서 가혹한 식단과 살인적인 작업량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원동력을 얻었다.
다만 아주 사소한 문제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것 좀 제발 치워!”
백설기가 소리를 빽 질렀다.
“속상한 건 알겠는데 뭐 하는 거야! 징그럽다고!”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그치만! 꿈에 나올까 무섭다!”
절망 속에서도 꿋꿋이 일상을 이어나가던 마은찬은 한 가지 이상 행동을 보였다.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다가 본인을 모델로 한 두상에 심는 일이었다.
어찌나 실력이 좋은지 채색까지 한 두상은 마은찬의 수급(首級)1)처럼 보였고, 매일매일 머리카락이 늘어나기까지 하니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불쌍하잖아요. 이렇게라도…….”
“미용실에서 잘린 머리카락도 그렇게 불쌍했어?”
“그건 아닌데. 주인 잘못 만나서 다 살지도 못 하고 빠진 게 불쌍하지 않아요?”
말문이 막혔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한 탈출구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나, 방법이 너무나 기이했다.
“네가 마크 퀸이야? 제발 병원을 가.”2)
“부끄럽단 말이에요. 남한테 두피를 어떻게 보여줘요.”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외출할 때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나한테는 잘만 보여주면서!”
“누님은 특별하니까…….”
“시끄럽고 당장 치워! 작품으로 낼 것도 아니면서 어디에 한눈팔고 있는 거야? 지금 시간이 남아 돌아?”
“너무해.”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걸 어떻게 전시해요…….”
백설기가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은찬아, 누나 말 들어. 탈모 부끄러운 거 아니야. 너 두상도 예뻐서 괜찮아. 병원 가서 약 처방 받으면 금방 나을 수 있어.”
“…….”
“그리고 이거 너한테도 안 좋은 거 같아. 차라리 시간 남으면 나랑 산책이라도 하자.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이런 거나 만들고 있으니까 더 안 좋아지는 거 아닐까?”
진실로 마은찬의 정신 건강이 걱정되었다.
부우웅- 부우웅-
마은찬의 스마트폰이 울려 대화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게리 형님이에요.”
“받아.”
화이트채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이자 마은찬‧백설기 전시회의 담당자였다.
“네, 형님.”
-요새 계속 목소리가 안 좋으시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잘 조절하고 있어요. 저 이런 거 은근히 잘 하는 편이거든요.”
-하하. 은근히가 아니죠. 정말 대단합니다.
마은찬이 쑥쓰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 연락 드린 게 오늘 작업 진행이 어떻게 되나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부담드리고 싶진 않지만 아시다시피 일정이 가까워졌으니까요.
“어…….”
마은찬이 몸을 떨었다.
그동안 믿는다며 전적으로 일을 맡겨준 만큼 거절하기 난감했다.
더군다나 이제 작품 배치부터 여러 사항을 고려해야 하니, 큐레이터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도리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형님, 잠시만요.”
마은찬이 본인 목소리를 차단하고 백설기에게 물었다.
“누님, 게리 형님 오신다는데 어떡해요?”
“오셔야지?”
“아직 우리 하는 거 완성 못 했잖아요.”
“일단 진행 과정은 보셔야 하니까. ……하아.”
백설기도 한숨이 나오긴 마찬가지였다. 마은찬과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자신있게 보여줄 작품은 아직 만들지 못했다.
“거절하는 것도 아니잖아. 혼자 하는 일도 아닌데. 언제 오실지 여쭤 봐.”
“네.”
마은찬이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네, 형님. 언제쯤 오시려고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지금 어떤가요?
“지금이요?”
놀라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이따 봬요.”
-그러죠. 1시간 정도 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통화를 마친 마은찬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 *
“좋은데요?”
화이트채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게리 무어가 작업실을 둘러보고는 감상을 내놓았다.
표정과 말투가 심각하지 않아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작업했던 마은찬과 백설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확한 목표를 두지 못한 채 작업을 이어오고 있던 탓이었다.
안개 낀 숲을 더듬거리며 걷는 기분이었다.
“정말로요?”
마은찬이 의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네. 백 작가님이 들어오시고 활력이 생긴 것 같네요. 건강 문제로 걱정했는데 안심했습니다.”
게리 무어가 빙긋 웃었다.
“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마은찬과 백설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니 게리 무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지금 이런 말씀드리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마은찬이 망설이자 게리 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호의적인 태도에 마은찬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작품들이 워낙 중구난방이라서요. 콘셉트도 없고. 제가 생각하기에 진짜 멋진 작품도 없고. 여러 가지로요.”
게리 무어가 백설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 작가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같은 생각이에요.”
게리 무어가 잠시 고민하더니 마은찬과 백설기의 공동 작품 앞으로 다가갔다.
<미소>라는 제목을 붙인 작업물로.
세로 격자의 각 면을 따로 작업하여 왼쪽에서 보면 웃는 얼굴이지만 오른쪽에서 보면 우는 얼굴로 보이는 작품이었다.
마은찬과 백설기는 이것을 전시실 입구에 설치하길 요청했다.
입장할 때는 웃는 얼굴로 보이나, 도중에 돌아서거나 퇴장할 때는 우는 얼굴로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두 분께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게리 무어가 입을 열었다.
“간혹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해석이 공감을 사기도 합니다.”
게리 무어는 간혹이라고 했지만 흔한 일이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가 있었다.
“이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회적 관계 때문에 웃고 있지만 실은 울고 있는 현대인을 표현했다고 말씀하셨죠?”
“네.”
마은찬이 답했다.
“제 눈에는 예술가의 고뇌처럼 보입니다.”
게리 무어가 마은찬의 단독 작품 <자화상>으로 눈을 돌렸다.
종이에 여러 번 칼집을 냈는데, 두께와 간격을 조절하여 명암을 표현해, 형태를 드러내는 고난도의 작업물이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실패하셨을지 짐작도 안 되네요.”
“…….”
“백 작가님의 이 작품도 정말 놀랐습니다.”
백설기의 <화무십일홍>은 게리 무어가 최근 본 작품 중 가장 놀라웠다.
판 위에 색 있는 모래를 잘 배치해 꽃을 표현했는데.
위로 던져서 완성하는 작품이었다.
판을 들어올릴 때 손목에 회전을 주어 앞쪽 모래가 높이 올라가고 뒤쪽 모래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머물러, 허공에 뜬 모래가 일정 시간 형태를 유지했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의 제목 <화무십일홍>을 표현한 것으로.
화려함은 오래 가지 못함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남긴 인상은 계속해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마은찬과 백설기는 여러 기법을 활용했고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한 전시회에 이렇게 많은 기법을 사용한 예술가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게리 무어가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작품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지만 두 분의 전시회는 100여 개의 작품이 한 장소에 있어야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것 같아요.”
“어떤…….”
“두 분의 고민이요.”
마은찬과 백설기는 게리 무어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인들조차 이 전시회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닥치는 대로 만들 뿐이었다.
그동안 미뤄왔던 작품은 물론, 과거에 만들었던 작품을 개선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없던 아이디어까지 끌어다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러다 건강을 잃을 정도로.
“첫 작품을 본 사람들은 작게 감탄할 겁니다. 혹은 무심하게 지나칠지도 모르겠네요.”
“으으.”
마은찬이 신음했다.
“첫 전시실을 둘러본 뒤에는 흥미를 느끼겠죠. 워낙 다양한 작품이 있으니까요.”
백설기는 게리 무어가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했다.
혹은 낙심한 본인과 마은찬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두 번째 전시실을 둘러보곤 이상함을 느낄 겁니다. 대체 두 분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하고요.”
갤러리가 답을 얻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게리 무어는 작품을 마주한 사람이 작은 의문을 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큐레이터였다.
“세 번째 전시실을 감상하면 대체 이 많은 걸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라고 생각할 겁니다.”
영국에서 손에 꼽히는 갤러리의 수석 큐레이터의 말이었지만, 마은찬과 백설기는 안심할 수 없었다.
프리미어 전시회를 열었던 거장들을 떠올리며 그들에 한참 못 미치는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으로 답을 내리겠죠.”
게리 무어가 마은찬이 힐링 삼아 만든 소조상 앞으로 다가갔다.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서 심은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이 빠질 만큼 고뇌하고 괴로워했구나 하고요. 장담하죠. 이 작품은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힐 겁니다.”
마은찬과 백설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눈만 깜빡였다.
“정말 명석합니다. 이 두상은 두 분이 만드신 모든 작품을 아우릅니다. 이 작품만 제목을 알려주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되나요?”
마은찬이 백설기의 눈치를 보다가 냉큼 대답했다.
“차, 창작의 고통이요!”
“거짓말!”
* * *
1)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2)마크 퀸: 영국 출신 예술가.
1991년 본인의 피 4.5ℓ를 뽑아서 응고해 만든 두상 로 유명하다.
이 충격적인 작품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회에 출품되어 말 그대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이끌었다.
이후 마크 퀸은 본인의 피를 조금씩 뽑아 연작을 이어나갔다.
피로 만들어진 자각상이기에 응고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여 냉동상태에서 보관‧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