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8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3)
해가 바뀌어 화이트채플 갤러리가 마침내 프리미어 전시회 마케팅을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마은찬, 백설기 두 작가는 필사적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작업 4주차.
아침 일찍 작업실을 찾은 백설기가 먼저 도착한 마은찬을 발견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엇인가를 쓸어담는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생수가 벌써 다 떨어졌네.’
커피를 내리려던 백설기가 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캔커피를 꺼내며 말을 붙였다.
“커피 마실래?”
대답이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좌절과 극복을 반복해 온 마은찬을 봤던지라 그녀는 개의치 않고 머그컵에 커피를 가득 따랐다.
오늘도 저러다가 다시 일어나 붓을 들 터였다.
“누니임…….”
한 달 내내 붙어 있어 가까워졌지만 누님이란 말에는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차라리 편하게 누나라고 하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방금도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호칭을 문제 삼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마은찬이 몹시 떨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히이이잉.”
“히익.”
마은찬에게 다가간 백설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은찬이 머리카락을 한 줌 가득 쥐고 있었다.
“뭐, 뭐야?”
“모르겠어요. 오늘 작품 뭐 할지 고민하다가 머리를 쥐었는데.”
“……그랬는데?”
“쑥 하고.”
백설기가 마은찬의 머리를 살폈다. 과연 머리 한쪽에 원형으로 머리카락이 비어 있었다.
스물여섯 살 먹은 다 큰 남자가 빠진 머리카락을 쥐고 울먹이는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도 없었다.
“저 병 걸린 걸까요?”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 거야. 괜찮아. 요즘엔 병원 가면 금방 고칠 수 있대.”
“이상하게 자꾸 목이 마르고. 너무 어지럽다가 갑자기 손이 떨릴 때도 있어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마은찬의 이야기를 듣던 작업실에 사 둔 생수가 너무 빨리 없어지는 걸 떠올렸다.
큰 페트병 10개가 하루이틀만에 없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생수를 활용해서 작품을 하나 보다 싶었지만 그게 아닌 듯했다.1)
백설기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살 갑자기 빠졌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말해봐.”
“네. 음식이 너무 맛이 없기도 하고 운동도 하다 보니…….”
“얼마나? 얼마나 빠졌는데?”
“138㎏였는데 지금은 92~3㎏ 정도일 거예요.”
음식 섭취량을 줄이고 운동을 병행하긴 해도 전시회 준비로 바쁜 마은찬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단기간 내에 40㎏ 가까이 빠질 리 없었다.
“설마.”
“네?”
“너 따라와. 병원부터 가자.”
“그럴 시간이.”
“헛소리 말고 일어나! 지금 다른 게 문제야?”
“저 심각한 거예요?”
대답할 수 없었다.
* * *
“당뇨병입니다.”
“……네?”
“공복혈당이 126mg/dL 이상이면 당뇨병으로 진단하는데 환자님은 240mg/dL나 돼요. 최근 살이 많이 빠지고 물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고 하셨죠?”
어안이 벙벙하여 마은찬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당뇨병 증상입니다. 지금부터는 매일 아침, 식사 후 2시간 뒤에 혈당 체크를 하셔야 해요.”
“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저 아직 이런 병 걸릴 나이가 아니에요.”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당뇨병은 환자의 의지가 없으면 방법이 없어요.”
“…….”
“당류가 들어간 음식은 철저히 절식해야 합니다. 식품성분표 보시고. 빵, 밥, 고구마 등 탄수화물이 많은 작물도 조심하셔야 하고요. 여기에 식단 관련 안내사항이 있으니 잘 확인해 보세요.”
마은찬이 의사가 준 책자를 힘없이 받았다.
최근 몸이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당뇨병이라니, 생각지도 않았다.
“저. 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당뇨는 그 자체로는 생명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합병증이 생기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
“매일, 매 끼니마다 혈당 체크하며 스스로 혈당을 조절해야 합니다.”
넋을 놓고 의사의 설명을 듣고 마은찬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을 수. 나을 수 있는 거죠? 그렇죠?”
현대 의학은 눈이 부시도록 발전했다. 몇 년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탈모 증상에 대한 특효약이 개발되었다.
당뇨병도 분명 방도가 있으리라 희망을 가졌다.
“당뇨병에 완치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의사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다만 당화혈색소를 6.5% 미만으로 3개월간 유지한 상태를 관해라고 합니다.”2)
“…….”
“일시적으로 증상이 완화되었지만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환자분의 의지가 중요하고요.”
완치될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진료실을 나선 마은찬은 맥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다.
벽에 기대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코앞으로 다가온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가 걱정되었다.
“……괜찮아?”
백설기가 마은찬에게 다가갔다.
마은찬의 증상으로 그가 어떻게 아픈지 대강 짐작하고 있던 터라 행동과 말이 조심스러웠다.
“은찬아.”
“당뇨래요.”
백설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젊은 나이에 당뇨병 진단을 받은 마은찬의 심정이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최근 그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기에 더더욱 걱정되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관연 위로가 될까도 싶었다.
“관리하면. 관리하면 괜찮대요. 돌아가요.”
허세였다.
당장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잡을 수 없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 운 좋은 편이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 * *
마케팅 비용만으로 수십만 파운드가 책정된 대형 전시회.
자신 있는 작품은 만들지 못했고, 다가오는 압박 속에 병까지 얻은 마은찬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식단을 제한했다.
음료수와 과일 등은 물론.
쌀, 밀과 같이 포도당이 든 탄수화물과 감자튀김 등 포화지방을 많이 함유한 음식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작업시간을 줄일 수는 없어서 자는 시간을 줄여 밤 운동도 했다.
당뇨병 진단을 받은 당일 잠시 무너졌지만 마은찬은 강인한 의지로 일어나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음에도 당 수치가 조절되지 않는 걸 확인한 마은찬은 절망했다.
의사로부터 약 효과가 천천히 온다고 설명들었지만, 일주일 내내 고생했음에도 공복 혈당과 식후 혈당이 조절되지 않음에 억울하기까지 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
나쁜 행동 한 번 안 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도 않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은찬은 얼굴을 감싼 채 괴로워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순간 목덜미에 닿은 차가운 감각에 흠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백설기가 캔 콜라를 들고 웃고 있었다.
“누님.”
“마셔.”
“……먹으면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제로콜라는 괜찮대.”3)
백설기가 캔을 따서 마은찬에게 주었다.
마은찬은 머뭇거리다가 스마트폰으로 제로콜라가 정말 혈당과 무관한지 검색해 본 뒤에야 조심스레 입을 댔다.
아주 조금 입에 머금었을 뿐인데 일주일간 멀리 했던 탓에 청량감과 단맛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마은찬은 입 가득 음료를 털어넣고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봤을 땐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어.”
백설기가 입을 뗐다.
“네?”
“너.”
마은찬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잖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자리에 밥버거 들고 와서 먹었으니까.”
“아.”
마은찬이 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유학 생활에 지쳐 제육덮밥을 너무나 먹고 싶었는데, 가장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밥버거였다.
“근데 그런 애가 갑자기 화이트채플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거야. 믿기지가 않았어.”
“…….”
좋아할 수 없었다.
실상이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백설기는 분명 실망했을 터였다.
“근데 요 한 달? 한 달 반 정도 너랑 같이 있으니까 알 것 같더라.”
“뭘요?”
“너처럼 하면 성공 못 하는 게 이상하겠더라고.”
마은찬이 고개를 돌렸다.
“약한 소리해도 금방 또 일어서고. 아프고 힘들어도 끝끝내 오늘 하기로 한 작품은 완성했잖아.”
당이 오르면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사실 작품을 어떻게 완성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보려고 해도 몸이 너무 힘들어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 부족했다.
그런 것을 전시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먹는 거 좋아하면서 식단도 조절하고. 운동도 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작품을 만들고, 더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고 싶을 뿐이었다.
“대단해. 정말 멋져.”
백설기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채 마은찬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누님.”
“너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운 좋은 편이라며. 분명 잘 될 거야.”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발을 내디딜 힘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했다며, 분명 잘 될 거라는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눈물과 함께 터지고야 말았다.
“흐이잉이긱.”
“그래. 그래.”
“누이이이임.”
“괜찮아. 괜찮아.”
백설기는 두 팔을 벌려 다가오는 마은찬을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우는 다 큰 남자의 등을 기꺼이 쓸어주었다.
* * *
1)수채화를 그릴 때 수돗물을 사용하면 그림의 색이 빠지게 된다.
수돗물에 포함된 염소 때문.
불순물이 없으니 생수를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수 또한 수채화에 사용하면 안 되는 물이다.
생수에 포함된 다양한 미네랄이 물감과 반응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내기 때문.
수채화를 그릴 때 가장 좋은 물은 증류수 또는 정수기 물이다.
2)2형 당뇨에 한함.
ADA·EASD "2형 당뇨병 해소보단 ‘관해’가 적절", 메디컬 옵저버, 양민후 기자, 2021.09.03
3)사카린, 아스파탐 등 인공감미료는 혈당을 올리지 않는다.
다만 장내 균 환경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고, 장내 균 환경은 현재 의학계에서 분명히 진단할 수 없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