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7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2)
잠시 후.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쪽으로도 해보고 싶어요.”
마은찬은 전시회를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새로운 기법 이야기는 많이 하셨는데 주제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차분히 귀를 기울이던 백설기가 의문을 제시했다.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백설기를 만나 흥분했던 마은찬이 멈칫했다.
“레진 아트, 전위적인 채색법, 공간을 활용한 옵아트. 말씀하신 방법이 너무 많은데. 여러 기법을 활용하는 게 목적이에요?”
대답할 수 없었다.
생애 첫 대규모 개인전에 들뜬 터라 터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고.
특별한 작품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여러 기법을 연구했지만 정작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생각지 않았다.
마은찬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무리였나 봐요.”
그는 지적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왜 불안해했는지 자각했다.
압박과 부담에 밀려 작품은 여럿 만들었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에는 정신, 철학, 감정, 미학이 녹아 있을 리 없었다.
만족할 수 없으니 수십, 수백 점을 만들어도 불안했던 것이었다.
“제겐 너무 과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갑작스러운 고백에 백설기가 당황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노력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간은 부족하고 작품은 안 나오고. ……그래서 자꾸 새 기법에 집착했나 봐요.”
“…….”
백설기가 고개를 숙인 마은찬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자꾸만 줄어드는 관심에 무리해서 여러 기법을 연구했지만 냉담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고작 25살 나이에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를 열게 된 천재 중의 천재 마은찬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니 마음이 복잡했다.
“작가님 말씀이 맞아요.”
마은찬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저것 많이 시도하긴 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것만 만든 거예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분수에 안 맞는 일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에요. 오시자마자 알아보셨잖아요. 관객분들도 다 알아채실 거예요.”
대중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어도 아무 의미 없는 작품에 열광할 리 없었다.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라는 타이틀과 강력한 마케팅으로 일시적인 효과는 볼 수 있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라고 판단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야겠어요.”
“무슨 얘기요?”
“못하겠다고요. 아직 늦지 않았을 거예요. 저 말고도 다른 분들 많으니까 그중에.”
“안 돼요!”
백설기가 냅다 소리쳤다.
좌절감에 빠졌던 마은찬이 흠칫 놀랐다.
“이 전시회가 어떤 자린지 알고 말하는 거예요?”
“아, 알아요. 그러니까 저 말고 다른 재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해야.”
“무슨 말이에요!”
겨우 붙잡은 기회였다.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는 저조한 지난 성적에 마침표를 찍고, 단숨에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일이었다.
“잘할 생각을 해야지 인제 와서 포기한다면 다음에 누가 작가님을 찾겠어요?”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그치만이에요!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어요!”
최규서에 의해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었다.
‘정말 괜찮겠어?’
‘한 번 발표하면 거기서 끝이야. 사람들은 그 작품으로 널 기억할 거야.’
‘그래. 한번 가져와 봐.’
‘이거야? 조금 아쉽지 않아? 너라면 더 좋은 작품 그릴 수 있잖아.’
‘다 네 생각해서 그래. 나도 초기에 발표한 작품 후회되더라. 조금만 더 준비해서 완벽해지면 그때 가서 하자. 돌아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잖아.’
‘그래. 잘 생각했어.’
한 번, 두 번 이어지던 일이 5년이 지나고 천재 미대생 백설기는 어느새 잊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대학 졸업 후 가끔씩 들어오던 연락도 끊겨, 언젠가 전시회를 열어준다는 최규서의 거짓말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기회를 다음으로 이어나가야 한다는 걸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벅찬 자리에요. 그런 기회를 화이트채플이 먼저 제안한 거라고요.”
“하지만 시간이.”
“발표작을 줄이더라도 해내야죠.”
백설기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고민할 시간은 지났어요.”
* * *
-[미대입시준비중 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같은 학원 친구가 흔히 말하는 천재인데 자꾸 비교하게 돼요. 전 재능이 없는 걸까요? 지금이라도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꾸 고민돼요.
인터넷 방송을 하던 중에 한 시청자가 고민을 보내왔다.
“어……. 미대 입시는 할아버지가 잘 아실 텐데.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부르고 아차 싶다.
르네상스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셔서 오늘 심사위원단 모임에 가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깜빡 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지금 집에 안 계시는데. 재능 이야기라면 제 생각을 이야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입시랑은 다른 이야기니까 감안해서 들어주세요. 그전에 절대, 절대 제 말만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주시고요.”
포도 주스를 한 모금 마셔서 목을 풀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음……. 천재가 진짜 있긴 할까요?”
└라고 12살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 받은 사람이 말합니다.
└내 말잌ㅋㅋㅋ 누가 누구한테 천재라는 거야
└너요. 너.
“제가 천재라고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시청자들이 마구 화를 낸다.
“진정하세요. 어.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있는 것 같아요. 남들도 천재라고 하고 본인도 스스로 천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앙리?
└앙리네.
└앙리 요즘 뭐 함?
앙리는 요새 달고나 뽑기에 빠져 있다.
“맞아요. 앙리랑 미래 이모예요. 근데 천재라는 게 사실 어떤 건지 잘 모르잖아요? 그것부터 정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분야의 상위 1% 정도면 천재라고 해도 될까요?”
의견이 분분하다.
1%면 분명 엄청난 상위권이지만 0.1%는 되어야 천재라는 사람과 0.001%가 진짜라는 사람도 있다.
또 넉넉하게 10% 정도면 천재 소리 들을 만하다는 사람도 있다.
역시 각자 기준이 다르다.
“또 여쭤볼게요. 또 예술가나 예술 작품에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요?”
모두 없다고 답했다.
“그럼 이제 다시 여쭤볼게요. 천재는 천재라서 무엇이든 잘할까요?”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가 현저히 늦어졌다.
“저는 어떤 멋진 일을 해낸 사람이 천재 같아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요.”
말장난 같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럼 멋진 일.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하겠죠?”
이번에는 대부분 긍정한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는 누구보다 잘한다, 누구보다 못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방송을 오래 해서 그런지 자꾸 목이 잠긴다.
포도 주스를 마저 마셨다.
“그럼 대단한 일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잘’이라는 채팅이 올라와서 웃고 말았다.
“정답은 차근차근이에요.”
다들 납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볼게요. 벤치프레스 100㎏를 드는 건 정말 어렵고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데 운동을 안 한 사람이 갑자기 100㎏를 들 순 없겠죠?”
당연한 일이다.
“처음은 누구나 다 봉만 드는 것부터 시작할 거예요. 그렇게 차츰 무게를 높여가면 100㎏에 도달할 수 있죠.”
└100㎏는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누구나 다 로니 콜먼처럼 200㎏ 넘게 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
└ㅁㅈ 재능 차이임.
└천재는 못 이김.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천재의 기준을 미리 물어보았다.
“아까 천재의 기준을 여쭤봤는데 기준이 다 달랐어요. 그래서 순위가 아니라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을 천재로 부르기로 했잖아요?”
다시 한번 상기해 주니 내 말에 동조해 주는 사람이 늘었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선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야 한다는 걸요. 재능 때문에 발전하는 속도가 다를 순 있지만 누구나 단계를 밟아야 해요.”
└사각형과 원을 극복해야 우산을 뽑을 수 있다.
└앙리다.
└저게 뭔 소리야.
└갑자기 무슨 말이얔ㅋㅋㅋㅋ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자기보다 먼저 나간 사람 때문에 좌절할 수도 있고요. 사람이니까. 근데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못 하리란 법은 없어요.”
└난 노력해도 안 되던데. 롤 4,000 시간 했는데 브론즈임.
└그건 재능의 영역이 아님.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긴 함.
└소설가 되고 싶었는데 아무도 원고 안 받아주더라 ㅠ
아를에서. 생레미에서. 오베르에서 수없이 반복해 온 고민이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어떻게 대단한 일을 해낼까를 고민해야 해요. 내 앞에 천재가 있어요. 그 사람보다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걸 알고 싶어서 듣고 있는데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죽여.
└앙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앙리 아니얔ㅋㅋㅋㅋㅋㅋ
└진짜 앙리가 말한 줄 알았넼ㅋㅋ 앙리 짭이잖아.
└폭력적이긴 해도 저런 말 할 사람은 아니지.
└앙리가 있는 방에서 앙리를 사칭하넼ㅋㅋㅋㅋ 너 그러다 큰일 난다
└ㅈㅅ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요. 이걸 어렵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사실 어떤 분야에서 상위 1%로 올라가는 건 너무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자기만의 기준으로 최고가 되는 건 본인만 극복하면 되거든요.”
└그건 훈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에요.
└나다운 게 뭔데 ㅠㅠ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아니에요. 여러분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과 달라요. 유화 좋아하고, 물감 브랜드 중에서는 쉬민케 좋아하고, 포테이토 피자 좋아하고, 짜장면 좋아하고, 한국 사람인데 할아버지랑 함께 파리에서 사는 분 혹시 여기 계세요?”
있을 리가 없다.
“여러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두 가지만 잘하면 돼요. 그 두 개를 함께 계속하면 그 분야의 1%가 될 수 있어요. 미대입시준비생 님은 그림이랑 또 뭐 좋아하세요?”
└게임이요.
└ㅋㅋㅋㅋㅋ게임 원화가 자리 박터지는뎈ㅋㅋㅋㅋㅋ
└훈이 말문 막혔닼ㅋㅋㅋ
“그럼 게임 중에서는 뭘 좋아하세요?”
└로봇물이요. 슈퍼로봇대전이라고 아세요?
└히익.
└아재 게임 ㄷㄷ
└미대입시 준비하는 50대 아재 아님?
“보세요. 10대 나이에 로봇물 좋아하는 미대 준비생 흔치 않아요. 미대입시준비생 님이 로봇을 계속 그려서 잘 그리면 그쪽 일이 엄청 들어올 거예요. 로봇물 게임을 만드는 회사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실제 로봇을 만드는 업체에 디자이너로 들어갈 수도 있죠.”
└어.
└로봇 디자이너란 직업이 있음?
└있는데 지금은 많이 신경 안 쓰다가 최근에 모집하더라.
└공대생 미적 감각으로 가사용 로봇 만들었더니 안 팔려서 뽑는다고 난리임.
“지금 말씀드린 거 말고도 자기를 가꾸고 닦다 보면 길은 반드시 생겨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건 다른 누가 좋아한다는 거고, 수요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무엇을 곁들이면 돼요. 미대입시준비생 님은 그게 로봇과 그림이고. 앙리는 조각과 달고나인 거예요.”
└마지막 문장이 좀 이상한데요.
└뭔 소리얔ㅋㅋㅋㅋㅋ 앙리 지금 달고나 하고 있음?
“저는 평범한 사람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미대입시준비생 님뿐만 아니라 본인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고민하고 그걸 어떻게 발전시키고 결합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대충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다.
“정리할게요. 폴 세잔은 43세가 될 때까지 인정받지 못하다가 관전에서 입선하고 56세가 되어서야 개인전을 열었어요. 평범했던, 아니, 다소 모자랐던 사람이 갑자기 천재가 되었던 건지. 아니면 노력이 그를 천재로 만들어주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사실 폴 세잔이 엄청나게 게으른 사람이었단 건 비밀로 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