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3화
-르네상스-
10. 크리스마스의 기적(5)
“하아. 하아.”
며칠간 잠을 얼마 못 자서 그런지 유독 쌀쌀하다.
졸음이 달아나 버린 건 좋지만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가면 밖으로 피어오르고 손끝이 아릴 정도로 춥다.
내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예정된 집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다만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했다.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 그림 300장을 그렸고 그림 뒤에 집회 장소를 적어두었다.
그 아래 ‘모든 해바라기와 고훈을 위하여’란 문구와 ‘괜찮다면 집회 장소에서 들어주세요’라고 썼는데 조금 과했을까.
하지만 지금 와서 되돌릴 순 없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잊고자 손을 비비며 보이는 벽마다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 붙였다.
다행히 크리스마스를 앞두어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많진 않다.
이 시간에 활동하는 건 처음인데 걱정했던 만큼 관심을 끌진 않고 있다.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기도만 해서는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하찮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야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다.
툭-
“빌어먹을. 어딜 보고 걷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조심해. 어? 이상한 가면이나 쓰니까 부딪히는 거 아니야.”
자기도 스마트폰 보고 있었으면서.
뭐라 한마디 쏘아주고 싶지만 일이 커지면 경찰이 올 테고 난감해지는 건 나다.
항상 그랬듯이 참을 수밖에 없다.
남자를 보내고 다시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를 붙였다.
과연 이게 효과가 있을까?
훈이나 선생님처럼 엄청나게 멋진 그림도 아닌데 사람들이 가져가 줄까?
뒤에 적어둔 집회 장소에 찾아와 줄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기숙사로 돌아가 따뜻한 침대 위에서 한숨 자는 게 더 나은 선택 아닐까?
가슴으로 파고드는 칼날 같은 바람 때문에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훈이랑 선생님, 대표님을 생각하며 버틴다.
나만은 나를 사랑하고 믿어야 한다고. 가만히 있어서는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고.
두려워도 한 발씩 걸어 나간다면 분명 길이 열릴 거라고.
기적은 실제로 일어났기에 생겨난 단어라고.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대어 마지막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를 붙였다.
간격을 두고 붙이다 보니 생각보다 멀리 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직 런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딘지 알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던 차.
어렴풋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수백 명의 천사가 노래하듯.
가슴이 뭉클해지는 목소리가 근처 건물에서 퍼져 나오고 있다.
“아…….”
현수막을 보니 런던 심포니가 이곳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베토벤의 아홉 번째 교향곡을 연주하는 모양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관악기와 합창단의 목소리가 공명을 이루어 가슴에 닿았다.
무슨 내용일까.
무엇을 노래하길래 이 추운 바람을 뚫고 내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온기를 전해주는 걸까.
“…….”
돌아가자.
내일은 집회에 참가해야 하니 푹 자야겠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데, 정말 많이 붙이긴 했다.
간격을 두고 붙이긴 했지만 300장이나 있었으니 제법 걸었는데도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가 보인다.
몇 명이나 가져갈까?
아니, 한 장이라도 가져가는 사람이 있을까?
미화원분들께 죄송하니 나중에 수거해야 할 텐데, 그때 알 수 있겠지.
부디 내 작은 노력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와 준다면 더 바랄 것 없을 텐데.
지금은 따뜻한 수프를 먹고 자는 것만 생각하자.
* * *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어렴풋이 들리는 핸드폰 소리에 머리맡을 뒤적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
-자고 있었어?
어머니다.
“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서요.”
-후우. 많이 힘들지? 저녁은 먹고 자는 거야?
저녁?
아침도 아니고 저녁이란 말에 놀라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7시였다.
공장.
집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반장에게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다.
메시지를 확인하면 당장 전화하라는 문자가 5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어머니, 저 늦어서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래. 끼니 거르지 말고.
황급히 전화를 끊고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다가 지금 연락해!
벼락같은 목소리로 꾸짖는다.
“죄송합니다. 잠들어버렸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 그걸 말이라고 해!
“죄송합니다.”
-……쯧. 오늘은 병가로 처리했으니 내일부터 늦지 마. 알아들어?
“네, 네!”
-다음부턴 용서 없을 줄 알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급한 불을 끄고 대충 옷만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어제 유독 춥더라니 눈이 내린다.
제법 쌓여서 걸을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난다.
많이들 찾아갔을까?
눈이 내려서 사람이 많이 안 왔으면 어쩌지.
사람이 많이 모여야 언론에도 소개되고, 그걸 통해서 또 EIE 운동이 더 알려질 텐데 나라도 참여해야 하지 않았을까.
왜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자책하며 발을 재촉했다.
“……어?”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여기서부터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를 붙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 장도 보이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뱅크스 씨가 말한 대로 미화원분들이 전부 걷어간 걸까.
“……그럼 그렇지.”
앞선 발자국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가 드러났다.
살짝 녹은 눈에 흠뻑 젖어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아마 어젯밤 바람이 강해 떨어진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붙여 놓은 그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리 없다.
“하.”
늦잠을 잔 데다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마저 드니 우습다.
미술을 하겠다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쓰레기나 만들어 또 민폐를 끼치다니.
한심하다.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가 정말 그림을 그리는 게, 어려운 사람에게 힘을 준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하아.”
뿌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점점 커진다.
이런 날씨라면 집회 장소에 가도 소용없을 거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서로 사랑하자는 집회에 나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미 시간도 한참 지났고.
“어, 애송이.”
“비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같은 공장에 다니는 테리와 로저가 함께 있었다.
“뭐야. 오늘 아프다고 공장에도 안 나오더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반장님이 내가 아프다고 얘기해 준 모양이다.
“아, 그게. ……사실 늦잠 잤어요.”
“크핳학핰! 이거 보기보다 배짱 좋은데?”
“요새 계속 피곤해 보이던데. 진짜 몸 안 좋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 서 있을 힘도 없다.
힘들다고 해봤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훈이랑 선생님, 대표님이 이상하고 대단한 사람일 뿐이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고 지금까지 쭉 그래왔는데 오늘은 유독 버티기 힘들다.
“그럼 너도 저쪽에나 가자고.”
“네?”
“몰라? 저 앞에서 EIE 운동인지 뭔지 하는 걸 하고 있어.”
집회 장소를 가리키는 테리의 손에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가 들려 있다.
“그걸. 어떻게…….”
“이거? 뭔가 싶어 보니까 포스터 같은 거던데. 이거 들고 집회에 참가해 달래.”
“…….”
“몸 안 좋으면 다음에 가고.”
로저가 말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에요. 가요. 갈래요.”
“이야. 네가 웬일로 우리랑 어울리냐. 핑계만 대더니.”
“……그러는 테리야말로 이런 데 무슨 일이에요? 관심 없었잖아요.”
“난 그냥 저놈 따라가는 거야.”
고개를 돌리니 로저가 빙그레 웃었다.
“테리가 먼저 가보자고 했어. 아시아 사람하고 무슬림이라면 치를 떨지만 너는 괜찮은 녀석 같다고.”
“정말로요?”
“빌어먹을. 너나 나나 여기서 뭐 사람 취급받고 있어? 이민자들끼리 모여서 목소리 좀 내자 이 말이야. 착각하지 마.”
테리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직 얼떨떨했지만 그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아, 저기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자.
흩날리는 눈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고.
“봐, 저놈들도 다 들고 있잖아.”
연설하는 사람을 향해 <새벽을 앞둔 해바라기>를 흔들었다.
“여러분! 저는 식당 종업원으로 4년째 일하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친절하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런던에서 가장 성실한 종업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한심하다는 듯이 보면서 무례하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맞다!”
“자꾸, 자꾸 그러면 음식에 코를 박게 해줄 거예요!”
“와학핰학! 거,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더 해봐! 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종교나 인종뿐만이 아니라 직업과 학력, 모든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고 있었다.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것에 동조하여 함께 분노하고.
웃음으로 이겨냈다.
‘기적이란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아니요.’
‘실제로 일어나서.’
대표님.
대표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이었어요.
매일 다섯 번씩 기도했음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