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78화 (37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2화

-르네상스-

10. 크리스마스의 기적(4)

‘어쩌면 나 재능 있는 걸지도?’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감자를 반으로 가르길 어언 3개월.

비다 라바니는 통감자구이 공장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무수히 줄지어 나오는 감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칼집을 내니 작업반장은 특별히 비다에게 작업장 노래 선곡 권한을 주기도 했었다.

“크핳!”

작업을 마치고 마감 점검을 기다리는 시간.

치즈 라인의 테리 고르곤졸라가 콜라를 들이켜곤 음악에 불만을 내비쳤다.

“애송이, 내일부턴 음악 바꿔.”

“좋지 않아요?”

“염병할 블루스 들으면서 일하고 싶은 놈이 어디 있다고.”

“캐럴. 캐럴 듣자고.”

베이컨 라인의 로저 베이컨이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을 추천하자 테리가 잔뜩 성을 냈다.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자빠졌네. 휴가도 못 가고 이러는 것도 열받는데 캐럴까지 듣자고? 차라리 블루스가 낫지. 빌어먹을. 목화 뜯던 흑인 놈들 심정을 이제야 알겠군.”

“테리.”

비다 라바니가 테리를 꾸짖었다.

무슬림인 비다에게도 스스럼 없이 대하는 것으로 보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언행이 험악해서 대화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었다.

“뭐 어때. 나나 그놈들이나 다를 게 뭔데. 나도 노예라고. 감자 노예. 젠장할. 크리스마스에 고향도 못 가잖아.”

비다와 로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직장은 인력으로 가동되는 몇 안 남은 공장이었다.

이 일조차 하지 못한다면 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라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때문에 공장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직원들은 크리스마스에도 휴가를 받지 못하고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따가 맥주나 한잔하자고.”

로저가 테리를 달랬다.

“좋지. 이봐, 애송이. 너도 어때.”

“그만해, 테리. 비다는 술 못 마시잖아.”

“제길. 술도 안 마시면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 거야?”

“사실 마실 때도 있어요.”

“그래?”

“무슬림은 술 안 마시는 거 아니었어?”

“이집트나 요르단 쪽은 마셔요. 코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다르거든요.”

“그럼 뭐가 문제야. 가자.”

“미안해요, 테리.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요.”

“빌어먹을.”

매일 밤 가면을 쓰고 벽화를 그리는 취미를 포기할 순 없었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퇴근한 비다 라바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토마토 하나를 대충 썰고 베이크드 빈즈 캔을 하나 깐 뒤에 스마트폰으로 뉴튜브를 틀었다.

“어?”

무슨 일인지 추천된 영상이 전부 고훈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미술 관련 영상을 자주 보는 탓에 고훈이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비다 라바니가 그중 한 영상을 틀었다.

-저 역시 이곳에 모여주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겠습니다.

대로를 가득 채운 시민들이 저마다 고훈의 해바라기를 입거나 들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해바라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훈은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시민들 역시 고훈에 동조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해 외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해바라기밭 같았다.

태양을 바라보며 꽃피운 해바라기들이 태양처럼 눈부신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해바라기의 화가, 태양이 되다]

[고훈,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해야 한다.”]

[해바라기가 바라보는 가운데 우뚝 선 해의 화가]

그것은 비다 라바니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언론이 LA 집회에서의 고훈을 태양으로, 해바라기 그림을 들고 집회에 나선 이들을 해바라기로 소개하고 있었다.

[반 고흐의 정신을 이어받다]

화가 고훈이 최근 놀라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구호로 시작된 EIE 운동에 고훈의 <해바라기>가 상징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에 고훈은 본인의 판화 작품 2만 점과 해바라기가 그려진 티셔츠 1만 점을 기부하며 동조했고 EIE 운동은 미 전역으로 확산해 뜨거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을 뒤덮은 해바라기는 수해 전 고훈이 여러 인종의 아이들과 함께 꽃피운 달리다 광장을 연상케 한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본다는 특성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랑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혹은 생명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태양 그 자체를 의미하는 신성한 꽃으로 여기는 문명도 있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증오와 혐오에 맞서는 상징물로 고훈의 <해바라기>가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현상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었던 빈센트 반 고흐는 고훈 이전에 해바라기로 유명했다.

농부가 가꾼 밀밭에 빛을 내리는 태양이 되고 싶었던 반 고흐는 스스로를 해바라기와 동일시했다.

자애로움이 가득한 해가 되고 싶은 마음과 그런 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 밭에서 일하는 농부,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 등 당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이들을 위로하고자 붓을 들었던 위대한 화가와 현재 고훈의 행보는 여러 면에서 겹쳐 보이기도 하다.

이미 여러 사람에 의해 태양의 화가로 불리는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우리를 찾을지 가슴 설레어 본다.

-캐롤라인 스트릭

고훈과 관련된 글을 찾던 비다 라바니는 저명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이 본인 블로그에 적은 짧은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고훈은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달리다 광장과 뷰그레넬리 쇼핑몰, 론강 강둑까지.

유럽계 아이들, 아시아계 아이들, 이슬람계 아이들, 흑인 아이들 모두 가리지 않고 그림의 즐거움을 나눠주었다.

비다는 즐거움을 함께하면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덕분에 대학에 다니고 그림을 남에게 보일 수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꿈에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부우웅- 부웅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느덧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다 라바니는 벅찬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스프레이 방식으로 분사할 수 있는 래커를 챙겨 밖으로 향했다.

* * *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기를 얼마간.

곧 하얀 가면을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비다 라바니 곁으로 다가왔다.

뱅크스였다.

“뭘 그렇게 봐?”

“훈이요. 미국에서 난리래요. 알고 계셨어요?”

작게 웃는 소리가 가면 밖으로 새어 나왔다.

“모를 리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훈이는. 훈이는 그냥 화가가 아니에요.”

“그럼?”

“어……. 엄청난 화가?”

“크흐큭큭. 그래. 엄청나긴 하지.”

뱅크스는 실로 그리 생각했다.

익명성, 공간의 불균형 등 여러 방식으로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한 뱅크스 또한 이번 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시대적 흐름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또 모든 종류의 폭력과 차별에 저항해 온 그로서는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후우.”

“왜 한숨이야.”

“저도 뭔가 하고 싶은데. 아직 멀었나 봐요.”

고훈을 돕고 싶었다.

그 이전에 비다 라바니 역시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벽화를 그리고 이클립스란 아이디로 만든 SNS 계정에 그림 사진을 올리고 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필요에 의해 익명으로 활동하지만 인정받고 싶다는 원초적 욕구도 느끼고 있었다.

그 마음을 잘 아는 뱅크스가 입을 열었다.

“네 그림을 사람들이 보는지 궁금하다는 거지?”

“……네.”

“좋은 방법이 있지.”

“있어요? 어떻게요?”

“그림을 붙여. 여기저기에.”

비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날이든 그다음 날이든. 그림이 붙어 있으면 아무도 네 그림에 관심이 없다는 거지.”

“그럼 그림이 없어지면 누군가 제 그림을 갖고 싶었단 뜻이네요?”

“혹은 환경미화원들이 욕하면서 치웠거나.”

“그게 뭐예요.”

뱅크스의 싱거운 농담에 비다 라바니가 웃었다.

“나도 했던 방법이야. 누군가 내 그림을 원하는지 미치도록 궁금했거든.”

“가져간 사람이 있었어요?”

“나중에 뱅크스란 이름이 유명해지니까 올라오더라. 오래전에 길에서 봤다가 예뻐서 가져갔는데 내 작품 아니냐고.”

“그래서요?”

“정확한 눈을 가졌다고 댓글 달아줬지.”

비다 라바니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자 지켜보던 뱅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

“네!”

* * *

‘해볼까.’

깊은 밤 기숙사로 돌아온 비다가 뱅크스의 말을 떠올렸다.

열심히 그린 그림을 붙이는 게 아까웠지만, 그 이상으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고민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던 차.

런던에서도 해바라기 집회가 계획되어 있다는 글을 발견했다.

‘영국에도.’

대서양 건너 영국에도 영향을 끼친 고훈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만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조회 수도 적었고 그나마 달린 댓글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

관련 정보를 찾던 비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스탠드를 켰다.

고훈과 해바라기들이 모여 생겨난 따사로운 햇볕이 런던에도 닿았으면 했다.

파스텔지를 꺼내 그 위에 파란색 파스텔을 칼로 긁어냈다.

손으로 가루를 문질러 펴 바르니 곧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지우개로 길을 내고 하얗게 빈 곳은 하늘색으로 채웠다.

그 주변을 검은색 파스텔을 펴 바르고 하얀 파스텔을 가루 내어 뿌렸자 금세 밤하늘의 은하수가 완성되었다.

여명이 밝아오듯.

지평선과 맞닿은 부분은 노란색과 빨간색을 층을 이뤄 칠했다.

비다 라바니는 작은 붓을 꺼내 검은색 물감으로 지면을 그리고 그 위에 아주 작은 해바라기를 그렸다.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

여명을 등진 해바라기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듯.

어둠 속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본인의 그림을 한 번 살펴본 비다 라바니는 그것을 옆으로 치워두고 또 같은 방법으로 밤하늘 속 해바라기를 그렸다.

동이 트고도 계속된 작업은 출근 시간이 다가와서야 멈추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