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1화
-르네상스-
10. 크리스마스의 기적(3)
LA 한인 타운 사람들에게 해바라기 그림과 깃발, 티셔츠를 나눠주고 얼마 뒤.
인종차별 반대 집회를 처음 시작한 EIE(Everyone is equal)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EIE의 앤드류 박 회장이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캘리포니아 10구에서 당선되어 미국 제118대, 제119대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던 한국계 미국인인데 할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분이 이러시니 기쁘기도 하나 부담스럽기도 했다.
“별말씀을요. 좋은 일인데 도와야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다음 주 집회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 일은.”
영상 통화를 나누던 앤드류 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청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말씀하신 자리는 사양하겠습니다.”
EIE는 내가 집회에서 연설을 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런 자리에 나설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하핳하!
앤드류 박이 호탕하게 웃었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따로 자격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매주 집회마다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합니다. 정돈된 말은 아니지만 진심만은 분명히 전달되지요. 또, 말씀도 잘하시던데.
작게나마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좋은 뜻을 가지고 시작된 집회에 나서서 거들먹거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자리는 아닌 모양이다.
“그런 일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게요.”
통화를 마치자 곁에 있던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이 많구나.”
“그러니까요. 르네상스 준비도 못 했는데.”
“그동안 쌓은 덕 때문이니 좋게 생각하자꾸나. 이 기회에 버뱅크에 있는 집도 들르고.”
그러고 보니 버뱅크 집을 오래 비워두었다.
부모님의 변호사였던 토마스 아서가 관리해 주고는 있지만 오랜만에 가서 어머니가 키우던 선인장이 잘 크고 있는지 들여다봐야겠다.
* * *
집회 일정에 맞춰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다.
G.O 관련 일과 연말 전시회 때문에 바쁘기도 해서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단둘이 찾았는데.
변호사이자 EIE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는 프랭크 오닐이 마중 나온 덕분에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한국말이 조금 해서.”
프랭크 오닐이 어눌하게 한국말을 썼다.
“영어도 괜찮아요.”
민망한지 웃는다.
“배우고 있는데 어렵더라고요. 빨리 공부해야 부모님 찾으러 갈 텐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눈만 깜빡이는데 프랭크 오닐이 개인사를 밝혔다.
“아기 때 입양되어서 왔거든요. 혹시 박솔로라는 분 아세요? 제 어머니예요.”
“못 들어본 이름이에요. 할아버지는요?”
“나도 처음 듣는구나.”
“마음 쓰지 말아요. 한국에서 오신 분 만나면 혹시나 싶어서 한 번씩 여쭤보거든요.”
“꼭 찾으실 거예요.”
“고마워요.”
아주 어릴 때 입양해 왔다면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을 텐데.
변호사란 번듯한 직업을 얻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한국말을 공부하며 언젠간 낳아준 부모를 찾는다니.
프랭크 오닐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어렸을 적부터 다른 사람과 다른 생김새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이 왔을 테고 그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찾았으리라.
“훈아, 저기 봐라. 여기도 있구나.”
“그러게요.”
LA 시내로 들어서자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해바라기가 걸려 있어 깜짝 놀랐다.
“정말 엄청난 일이죠.”
프랭크 오닐이 고개를 저었다.
“해바라기를 걸기 전에는 밖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어요. 시위가 아니라 폭동이었죠. 그런데 고작 2주 만에 이렇게 평화롭게 바뀐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고.”
“훈이라고 해주세요.”
거리마다 붙은 <해바라기>를 보고 있자니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굳이 왜 제 그림이었어요?”
프랭크 오닐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해바라기도 많잖아요. 반 고흐라든가 모네라든가. 클림트랑 에밀 놀데도 유명하고.”
나만큼 해바라기를 많이 그린 사람은 드물지만 해바라기를 다룬 작가가 나뿐만은 아니다.
“제 경우에는 당신의 해바라기가 고향 느낌을 줬기 때문이에요.”
프랭크 오닐이 뜻하지 않았던 이유를 꺼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해바라기 그림은 정말 많지만 훈의 해바라기는 그중에서도 독특해요. 마치 동서양이 함께 담긴 것 같았죠. 절 보는 것 같았어요.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첫 전시회에 출품한 <해바라기>를 말하는 거다.
한국화를 처음 보고 그 기법을 살려 그렸던 한 송이 해바라기.
입양되었던 프랭크 오닐과 재미교포들에게는 본인을 투영한 작품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신기해요. 누가 먼저 걸자고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다들 훈의 해바라기를 걸었거든요. 제가 모르는 이유도 있었을 테고요.”
누군가가 먼저 제시한 게 아니라 각자가 한 행동이 유행처럼 번졌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EIE가 결성되고 나서는 명확한 의미를 부여했어요.”
“어떻게요?”
“달리다 광장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거죠.”
“아.”
생각지도 못한 연결점이었다.
프랑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달리다 광장에 해바라기를 그렸는데.
벌써 몇 년 전 일을 기억하고 이번 일에 반영했다니 놀랐다.
“사실 이슬람 쪽은 저희도 무서워요.”
프랭크 오닐이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 사람들은 유럽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무슬림을 무서워하죠.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럴 수밖에 없다.
IS와 탈레반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테러를 당한 유럽과 미국인들이 이슬람을 꺼리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안다.
지금도 미술 커뮤니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내가 이슬람을 옹호한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달리다 광장을 비롯해서 뷰그레넬리 쇼핑몰이나 이번에 하신 론강 사업까지. 훈과 함께 해바라기를 그리는 무슬림 아이들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어떻게요?”
“IS나 탈레반 같은 무슬림이 EIE가 비판할 대상이라면, 유럽이나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무슬림들은 함께 보듬어야 하는 존재라고요.”
프랭크 오닐과 눈을 마주했다.
“일부가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모두 비난한다면 우리를 혐오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잖아요?”1)
“네.”
“그래서. 그걸 알려준 당신의 해바라기여야 했어요.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훈.”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제삼자에게 듣는 건 처음이다.
이슬람을 옹호한다는 비난에 일일이 대처하지 못하고, 또 화가로서 작품으로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단 생각에 줄곧 내 부족함을 느꼈었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홀로 삭였던 고민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받으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하고 말았다.
사랑하자는 말이.
더욱 사랑하고 더 많은 걸 사랑하자는 내 말이, 주님의 가르침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혐오 범죄가 일어났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또 그러기를 노력하지 않는가.
그 목소리에 내 그림이 힘을 보태니 더는 바랄 것이 없다.
‘보고 있니.’
테오. 사랑하는 내 동생 테오야.
이 못난 형이 이제야 한 사람의 화가로 미술가로 예술가로 제 역할을 한 것 같구나.
어머니, 아버지.
다시 태어난 세상에 놀라기 바빴던 제가 드디어 이곳에서 할 일을 찾은 것 같습니다.
“훈아, 울어?”
“아니에요.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가 어깨를 감싸주셨다.
* * *
XYZ, LBC, WOLF 등 미국 주요 지상파 방송국은 4번째 집회에 참석한 고훈의 연설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나섰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할 때보다도 많은 카메라 앞에서 고훈이 눈을 깜빡이다가 함께 서 있던 앤드류 박 EIE 회장에게 물었다.
“누구나 다 올라오는 자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핳핳하하! 오전에 올라온 사람만 수십 명은 될 겁니다.”
“그럼 오전에도 카메라가 이렇게 많았어요?”
“크흠흠. 아, 저기 이미 촬영하고 있는 것 같네요. 스마일. 스마일.”
“…….”
EIE 운동의 메시지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고훈이 오는 시간을 언론에 알렸던 앤드류 박 회장이 밝게 미소 지었다.
고훈은 왠지 모르게 속았단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화가 고훈입니다.”
LA 평화집회장에 모인 시민들이 모두 해바라기를 흔들었다.
본인의 작품이 물결을 이룬 것을 본 고훈이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살았어요. 영국, 프랑스, 여기 미국에서도요. 정말 행복했지만 가끔 이해 못 할 일을 당할 때도 있었어요.”
인종차별은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하려고 하면 웨이터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1시간을 방치하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 의도적으로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고 대놓고 내쫓는 매장도 있었다.
“정말 속상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이겨낼 수 있었어요. 친절한 종업원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으니까요.”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달리다 광장을 보는 것처럼 거리 가득 핀 해바라기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저는 이 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합니다. 차별을 반대한다는 의미도 좋지만 그걸 넘어서서 서로를 사랑하자고요. 미움을 이겨내는 건 사랑뿐이라고요.”
누군가가 지지의 의미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여러분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건 여러분의 사랑뿐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저 역시 이곳에 모여주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겠습니다.”
전도사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화가로서도 사랑받지 못했지만 가능한 더 많이, 더 많은 걸 사랑하자고 말했던 남자가.
“사랑합니다.”
본인의 그림을 든 수십만 명 앞에서 사랑을 외친 순간이었다.
* * *
LA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혐오 반대 운동은 곧 미국 전역으로 확산했다.
-당연한 일이잖아요.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해요.
-범죄를 저질러서 증오한다면 세상 모든 인종이 차별받아야 하죠. 그게 옳은 일인가요?
-난 흑인이란 이유로 평생 갱 취급받아야 했어. 난 MIT 수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전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랐어요. 스시집 갈 때마다 대신 주문해 달라고 하지 말아요. 그리고 난 한국인이에요.
-맞아요. 난 무슬림이에요. 하지만 이젠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미친 IS 놈들하곤 관계없는 베이컨 치즈 버거에 미친 놈일 뿐이에요.
-백인 남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빌어먹을 마초들 때문에 정신병이 날 지경이야.
-내가 사무실에서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상관하지 마, 이 대머리야. 나도 네가 가발을 쓰든 마카칠을 하든 조금도 관심 없으니까.
-난 13살이고 이 영상을 보는 당신을 사랑해.
시민들은 저마다 차별 문제, 혐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SNS와 1인 미디어를 통해 발산했다.
혐오를 조장해서 조회 수를 모았던 이들이 있었지만, 전미로 뻗어나간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러한 흐름은 점차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전달되었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온 12월 20일.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 * *
1)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32명의 사망자와 29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큰 사건이었던 탓에 현지 한인 및 아시아인들은 신변을 걱정할 정도로 불안해했다.
해당 사건으로 한인 교포나 한국 유학생, 아시아인들이 인종적 차별 및 혐오 범죄를 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 같은 불안이 반영되어 ‘조승희는 한국인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모임에 500여 명이 가입, ‘조승희는 아시아인을 대표하지 않는다’라는 모임이 결성되어 1,500여 명이 가입하는 등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는 한국 정부가 공식 사과에 가까운 애도 표명을 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 사회 및 언론은 “그는 절대로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을 규정짓지 않으며, 조승희가 벌인 일 자체에 대해 비난할 뿐이다”라고 반응했다.
이 사건과 후일담으로 미국 내 인종차별이 존재하면서도(한인, 아시아인들이 불안해한 이유), 미국 사회가 얼마나 성숙해 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