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76화 (37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0화

-르네상스-

10. 크리스마스의 기적(2)

2034년 미국은 전에 없던 혐오 범죄로 열병을 앓았다.

백인 경찰관이 면허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잉 진압하여 흑인 대학 강사가 사망한 것이었다.

이는 흑인들의 대규모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이어졌고 흑인 사회는 경찰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 측은 과정상 문제가 없었다는 태도를 고수하여 흑인들의 분노를 샀고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그러던 차 시위 중이던 한 젊은 흑인이 한국계 노인이 운영하는 마트 기물을 훼손하고, 마트 주인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지만, LA 한인회는 인종차별에 반대한다고 시위하는 흑인들이 아시아 사람을 차별한다며 수위 높은 비판을 연일 이어나갔고.

흑인 사회는 개인의 탈선일 뿐이라고 규정하며 백인, 흑인, 아시안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뿐이었다.

유럽계 백인 57.8%, 중남미계 히스패닉 18.7%, 아프리카계 흑인 12.1%, 아시아계 미국인 5.9%, 아메리카 원주민 0.7% 등등.1)

250년 넘게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이민자들이 힘을 모아 건국했던 세계 최고의 강대국은 전에 없던 분열을 겪었고.

신문 헤드라인은 매일 혐오 범죄 관련 제목으로 채워졌다.

그러던 차 LA 한인회가 중심이 되어 하나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LA 한인 타운에서만큼은 피부색과 종교로 차별하지 말자는 뜻이었는데, 이에 동참하는 자영업자들은 본인들의 매장이 안전하다는 의미로 입구에 고훈의 <해바라기>를 붙였다.

“반갑긴 한데…….”

해당 소식을 전해 들은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좋은 의미로 사용되어 반가웠지만 왜 굳이 <해바라기>를 거는지 알 수 없었다.

“왜요?”

방태호가 싱긋 웃었다.

“여러 얘기가 있더라고. 캐롤라인 스트릭 씨는 해바라기가 보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해석하던데?”

“어떻게요?”

“우리는 해를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해바라기라고 이름 붙였잖아?”

“네.”

“영어로는 태양과 꽃의 합성어고. 독일하고 중국에서도 비슷해.”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도 태양과 돌다의 합성어고, 스페인에서는 돌다와 태양.”2)

“아.”

“많은 언어권에서 해바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명명한 걸 근거로 각기 다른 인종이라도 결국 생각하는 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대.”

고훈이 눈매를 좁히고 관련 기사를 읽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캐롤라인 스트릭이 의미를 너무 과하게 부여하지 않았나 싶었다.

“비싼 그림이라 못 부수게 하려고 붙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귤 과장이 끼어들었다.

“이사님 그림이 비싼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원본이 아니잖아요. 제 해바라기를 문에 붙일 리도 없고.”

“한 번이라도 고민하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시위가 격해져서 피해 보는 소상공인들이 많나 봅니다.”

“그런 이유라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인데.”

“네. 한인 타운 사람들 인터뷰한 영상이 있었는데, 해바라기를 걸고 확실히 사람들이 온화해졌다고 합니다.”

“아. 여기 기사 있어요.”

고훈이 성귤 과장이 전한 내용과 일치하는 기사를 찾았다.

평온하고 밝은 이미지의 <해바라기>가 안전한 장소라는 이미지를 주어 사람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다고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시작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해바라기를 거는 사람이 늘면서 여러 이유가 더 붙었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 그림이 혐오 범죄에서 안전하다는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거죠?”

“응. 해바라기를 거는 게 자기는 인종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더라.”

고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작품과 갤러리.

나아가서는 전시관과 대중에 이르기까지.

상대에게 한 발 내디딜 작은 용기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고훈은 LA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럼 가만있을 수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법무팀에서도 저작권 관련해서.”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고훈이 성귤 과장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하긴 이런 일에 사용되는데 잘못 대응하면 이미지에 타격이 생길 수도 있어. 법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단 대화로 풀어내는 게 좋지.”

방태호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무슨 말이야?”

“미리 연락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고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방태호와 성귤이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다가, 곧 그의 뜻을 이해했다.

“잠깐만. 설마 진짜 그려줄 생각은 아니지?”

“맞아요.”

“이사님, 그건 다시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긴 하지만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아요.”

“뭘요? 그림 가격이요?”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죠.”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희소성이었다.

고훈이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여럿 그리긴 했지만, 뿌려댈 정도로 많이 그리고 나눠준다면 앞으로 가격 형성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고훈의 작품을 사랑하고 또 고훈이 앞으로도 수익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성귤 과장이 걱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예전에 사인으로 해바라기 몇 백 장 그려준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사인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안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동안 또 바쁘겠다. 아, 판화로 할까?”

고훈이 그 많은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고민하자, 방태호가 성귤 과장의 등을 툭 하고 쳤다.

“대표님.”

“괜찮아. 훈이가 한다고 하잖아. 도와줘야지.”

“하지만.”

“재밌을 것 같은데 뭐. 미국 전역에 훈이 그림 걸리면 몇 억이나 몇십 억보다 훨씬 남는 장사 아닌가?”

“그렇게나 많이 못 그려요.”

“인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 정도 스케일은 보여줘야지.”

“그 정도로 하려면 판화로 해도 원본을 몇 개나 만들어야 할 텐데. 음……. 해볼까요?”

“흐흫. 뭘 물어봐. 어차피 할 거면서.”

“그건 그래요.”

성귤 과장은 너무나도 거대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기사를 보고 찾아보니 정말 내 그림이라고 믿을까 싶을 정도로 대충 인쇄한 걸 붙이고 있었다.

또 혐오 반대 시위에 깃발처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문이나 벽에 붙이는 것뿐만 아니라 깃발도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다.

블랑쉬가 옷으로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주어서 옷도 만들려고 하니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쇼콜라티에와 하기에는 다소 벅찬 일이라, 아는 사람 중에 옷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비비안 공장에서 해바라기 티를 만들자는 말이죠?”

“네.”

“1만 벌이나 만들어서 무료로 제공하자고.”

“네.”

웬델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싫은 생각을 떨쳐내고 싶은 모양이다.

“G.O의 첫 번째 사업이 대서양 건너 미국 시위에 티셔츠 1만 벌을 무상으로 증정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맞다고요?”

“네.”

내 뜻이 정확히 전달된 듯해 고개를 끄덕이니 웬델이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비비안 이스트우드와 나 그리고 앙리 마르소가 합작해서 발족한 패션 레이블 G.O 관련 일로 많이 피곤해 보인다.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이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이름을 알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겠어요. 비용이야 마케팅으로 생각하면 괜찮을 테고.”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다만?”

“이런 일은 열기가 식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현재 가동 중인 상품을 멈춰야 해요. 오픈을 늦추면서까지 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래야만 해요.”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으로서 웬델이 이것저것 계산해 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돈 몇 푼과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일이다.

“제 이미지만 생각해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미국에서 시위하는 분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요. G.O는 세계를 상대하는 브랜드잖아요?”

“맞아요.”

“이번 일로 G.O는 어떤 마케팅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는 가치를 얻게 될 거예요.”

웬델은 잠시 고민하듯 티셔츠 시안을 살폈다.

그녀라면 분명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해 줄 거라 믿고, 사족을 붙이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결단을 내려주었다.

“좋아요. 진행해 보죠.”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 * *

비비안 이스트우드 내부에서는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며 크게 우려했지만.

웬델 수석 디자이너는 해바라기 티셔츠 사업이 G.O의 핵심 가치가 될 것을 강력히 주장하며, 고훈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사내 핵심 인력과 G.O 지분의 10%을 보유한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한목소리를 내자 비비안 이스트우드 경영진으로서도 더는 반대할 수 없었고.

G.O는 곧 미국 혐오 반대 시위단에 보낼 해바라기 티셔츠 제작에 돌입했다.

회사 역량의 대부분을 투자한 결과 일주일 만에 1만 벌의 티셔츠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고.

고훈이 직접 만든 판화 그림과 깃발이 배포되자 미국 사회가 크게 반응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화가 고훈과 비비안 이스트우드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나선 이들에게 티셔츠를 무상으로 증정하여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일부 소상공인들이 화가 고훈의 작품 해바라기를 프린트하여 매장에 걸어두었던 소식 기억하실 겁니다. 저작권 논란이 우려되었는데, 화가 고훈이 직접 만든 판화 2만 점을 기부하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황색 물결은 캘리포니아를 넘어 뉴욕주, 텍사스주, 애리조나주 등 미국 전역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반대, 혐오 반대 시위는 고훈의 지지에 힘입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했다.

거리에는 고훈의 해바라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미국인들은 <해바라기>를 사랑과 이해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와, 스케일 뭐임?

└나 LA 사는데 진짜 훈이 해바라기밖에 안 보임ㅋㅋㅋㅋㅋ

└그거 인종차별 반대한다는 의미 아님?

└ㅇㅇ 여긴 인종차별 안 해요란 뜻으로 붙였는데 이젠 학교고 회사고 다 붙이고 있음ㅋㅋㅋㅋ

└신기하네. 뉴스 보면 맨날 혐오범죄만 일어나던데.

└그런 뉴스가 워낙 많이 나와서 그렇지, 사실은 누굴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거 아닐까?

└근데 진짜 훈이 대단하다. 판화로 2만 장을 찍어서 보내주넼ㅋㅋㅋ

└그러니까. 경제적 이득 취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가게 문 앞에 붙이면 홍보수단처럼 사용돼서 저작권 침해로 문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훈이가 그런 점에서 진짜 대단하지. 더 큰 걸 보고 아예 확 뿌려버리니까 시위대가 돈 모아서 쇼콜라티에에 보냈다며.

└그 돈으로 시위대 햄버거랑 콜라 사 주는 거 보고 훈훈해지더라.

└우리 훈이가 이름값 좀 함.

└앙리 꿀벌 옷은 그렇게 입기 싫어하더니 해바라기 티셔츠 입고 홍보영상 찍은 거 개웃기넼ㅋㅋㅋㅋ

└그 영상 끝에 훈이 말이 더 웃김ㅋㅋㅋㅋ

└뭐라고 했는데?

└해바라기 깃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Yellow flag라는 의미로 YF라고 하잖아. 근데 이걸 황건당이라고 번역하더랔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분위기 삼국지ㅋㅋㅋㅋ

* * *

1)2020년 기준.

2)해바라기는 여러 언어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명명되었다.

일본에서는 태양을 뜻하는 ‘ひ’와 돌다는 뜻의 ‘まわる’의 명사형이 합쳐져 ‘ひまわり(해바라기)’.

스페인에서는 돌다는 뜻의 ‘girar’와 태양을 뜻하는 ‘sol’이 합쳐져서 ‘girasol(해바라기)’.

이외에 프랑스어, 이탈리어, 러시아어에서도 모두 ‘태양을 따라 도는 꽃’이란 의미의 합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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