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5화
-르네상스-
9.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하객이 찾은 결혼식(4)
본식과 피로연을 즐기니 하루가 금방 지나고 말았다.
맛있는 음식과 멋진 음악,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미셸은 정말 많이 웃었다.
앙리는 결혼식 내내 미셸에게서 눈을 못 뗐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놀리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미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마은찬은 왠지 미셸을 보는 게 아니라 드레스를 관찰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신혼여행은 평소 자주 가보지 않았던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 보내다가 마지막에 한국을 추가했다고 한다.
정말 <오솔길>을 보러 갈 줄은 몰랐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운영하는 초호화 크루즈 푸르트벵글러호가 마침 그런 코스로 운영한다고 해서 느긋하게 여행할 생각이란다.
해상에서 듣는 오케스트라라니 언젠가는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
아무튼 돌아올 시간에 맞춰 약속한 그림을 전해줘야 할 텐데.
마침 오전에 주문한 거울이 도착했다.
“조심조심.”
“턱 있는지 잘 봐.”
운송업체 직원들이 잔뜩 긴장한 채 가로 500㎝ 세로 270㎝ 대형 거울을 작업실 가운데에 놓아주었다.
크기도 엄청나지만 무게도 어마어마해서 단단히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위에 어제 장면을 담고자 한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는다.
신랑이 어머니와 함께 입장하는 풍습에 따라, 앙리는 셰리와 함께 입장했다.
장모와 사위 관계가 되기 이전에.
셰리는 앙리를 친아들로, 앙리도 셰리를 친어머니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부의 어머니가 신랑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모습이 얼핏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1)
인상적이었던 건 푸생 교장과 함께 입장한 미셸을 바라보는 앙리의 표정이었다.
비록 미소는 아니었지만, 항상 차갑고 딱딱했던 그의 얼굴에 온기가 들어선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회를 맡은 아르센의 장난도 빼놓을 수 없다.
아르센은 신랑에게서 신부를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함께 들어야 한다며 앙리를 몰아붙였다.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미셸이 강력히 지지하고 결혼식에 참석한 20여 명 모두 환호하는 바람에 앙리는 어쩔 수 없이 미셸을 사랑한다는 말을 꺼냈다.
아르센이 들리지 않는다며 크게 외치라고 요구했을 땐 하객 모두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부케를 받은 블랑쉬.
결혼식을 마치고 함께 걸어 나오는 앙리와 미셸을 향해 다 같이 라벤더 씨를 뿌린 일.
내 키보다 큰 슈크림 케이크 타워와 파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던 마은찬과 셰리.
순간순간이 다 소중해서 도대체 어떤 장면을 그려야 할지 좀처럼 정할 수 없다.
긴 고민 끝이 두 사람이 서약을 나누는 장면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즐거운 일이 많았지만 결혼식 그림이니 역시 기본에 충실한 게 가장 좋다고 판단했다.
시점은 주례자 위치다.
앙리가 왼쪽 미셸이 오른쪽에 있고 그 두 사람 뒤로 앉아 있는 하객을 그리고자 한다.
주례를 선 푸생 교장은 그림에 등장하지 않겠지만 사회를 맡은 아르센과 가장 앞에 앉은 셰리, 신랑신부의 지인들 모두 그릴 예정이다.
가장 중요한 건 자리를 조금씩 비워두는 건데.
작업실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거울 앞에 놓아보았다.
“음.”
너무 가깝나.
의자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는데 좀처럼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다.
똑똑-
누가 좀 도와주면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훈아, 들어가도 돼?”
마은찬 목소리다. 마침 잘 됐다.
“네.”
“히. 무슨 거울이 이렇게 커?”
“잘 왔어요. 여기 좀 앉아 봐요.”
“응?”
마은찬을 의자에 앉히고 보니 확실히 느낌이 온다.
“뒤로 좀 가볼래요?”
“이렇게?”
“조금 더요. 여기까지.”
“응.”
이 정도면 기본 구상에 크게 영향을 안 끼치면서도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될 것 같다.
“가만히 있어 봐요.”
유성펜을 가지고 현재 의자 위치를 표시하고, 거울 위에도 마은찬의 형상을 땄다.
몇 번 더 반복하자 마은찬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혹시 거울 위에 그리려는 거야?”
“맞아요.”
“형님 결혼식?”
“네.”
“와. 아이디어 진짜 좋다. 그림 보는 사람도 하객이 되는 거네?”
“얀 반 에이크 작품에서 아이디어 따왔어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말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 거울에 하객을 그리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게 그려서 관찰자가 하객처럼 느끼도록 한 얀 반 에이크의 발상을 살려서.
진짜 거울 위에 자리를 비워둘 생각이다.
거울 앞에 놓은 의자에 앉으면 그림 속 결혼식에 참여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해서요.”
“멋지다. 형님이랑 형수님 다 엄청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러면 좋겠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젠 가도 돼요.”
“응. 열심히 해.”
도움이 필요할 때 마침 찾아와 줘서 잘되었다.
“아니.”
마은찬이 작업실을 나서려다가 돌아섰다.
“이거 때문에 온 게 아니라 혹시 백설기 작가님 연락처 알아?”
고개를 저었다.
“미래 이모한테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 왜요?”
“이번 작업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렇다.
마은찬의 레진 아트가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화이트채플 개인전을 꾸미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설기 작가님 생각이 난 거야.”
마은찬이 스마트폰으로 백설기의 작품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물을 채운 작은 어항에 물감을 떨어뜨린 것 같은 작품이다. 어떻게 조절했는지 각 나라의 국기 형상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붓에 물감을 묻혀서 찍더라고.”
제작 영상을 찾아보니 과연 그렇다.
물에 물감이 번지는 걸 상정해서 붓마다 서로 다른 물감을 발라두고, 그것을 물에 그대로 꽂는다.
일시적으로 일정 모양이 유지되었다가 없어지는데.
그걸 영상과 사진으로 남겨서 작품으로 발표한 것 같다.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구상과 우연이 만나서 태어난 결과물 또한 멋스럽다.
“이거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레진은 굳는 거 아니에요?”
“종류가 많아. 온도만 높이면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상품도 있거든.”
“아.”
“그래서 이거 설기 작가님하고 얘기해서 공동 작업 해보려고.”
“같이하려고요?”
상황이 다급하긴 하나 단독으로 조명받을 기회를 포기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응. 내 작품을 덜 올리는 것도 아니고. 설기 작가님하고 같이하면 더 좋은 작품 나올 것 같아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는지보다,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를 더 앞에 두는 것 같다.
“좋네요.”
“그렇지?”
스마트폰을 꺼내 장미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아!
몇 번의 수신음 뒤에 장미래의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한국 미술계의 폐단을 없애느라 몹시 피곤할 텐데, 목소리는 밝다.
논개 표준영정 일 이후로 정신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듯해 안도했다.
“전화 괜찮아요?”
-그럼. 우리 훈이 전화면 회의 정도야 빠질 수 있지.
인제 보니 지루한 회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서 반가워하는 것 같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백설기 작가님 전화번호 알 수 있어요?”
-설기?
“네.”
-안 될 건 없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야?
눈썹을 좁히자 장미래가 깔깔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근데 왜?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은찬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안녕하세요. 누구시더라?
“저 은찬이에요! 마은찬!”
장미래가 입을 크게 벌렸다가 황급히 가렸다.
-말도 안 돼.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몰라보겠다.
“영국 음식이 너무 맛없더라고요.”
-맞아. 런던에서 활동한다고 했지. 세상에. 아무리 맛이 없어도 어떻게 그렇게 돼?
말이 안 된다.
음식이 맛없어서 살이 빠진다면 영국에는 체중미달만 있을 거다.
“다이어트하고 싶으시면 영국에서 살아보세요. 엄청 도움 될 거예요.”
자각 없는 거짓말이다.
-진짜 너무 놀랐어. 보기 정말 좋다.
“흐흥. 감사합니다. 아, 실은 저 화이트채플에서 전시회 준비하거든요.”
-응. 훈이한테 얘기 들었어. 너무 잘됐지.
마은찬이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근데 조금 문제가 생겨서 백설기 작가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혹시 물어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설기한테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알려줄게. 훈이한테 보내면 되지?
“네! 감사합니다!”
마은찬이 허리를 연신 숙였다.
-조합장님!
-아, 나 들어가 봐야겠다. 나중에 또 얘기해.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정말 회의 중이었던 모양이다.
“근데 백설기 작가도 일정이 있을 텐데 괜찮을까요?”
“그게 문제야. 엄청 바쁘실 텐데 영국까지 오실 여유가 있으실까.”
백설기만의 고유한 창작 방법을 활용하고자 하는 거니 가능하다면 마은찬의 생각대로 공동 전시회로 가닥을 잡는 편이 좋다.
마은찬도 표절 시비에서 자유로울 테고, 외부에서 보기에도 두 미술가가 만나서 어떤 결과를 내는지 기대될 테니 말이다.
한데 백설기 또한 이름을 알린 작가라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다.
“조건이라도 좋게 이야기해 봐요. 화이트채플 전시회가 작은 일도 아니고.”
“그거야 그럴 생각인데 해주실지 모르겠어.”
* * *
TV 리모컨을 움직이던 백설기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뉴튜뷰, 웹플릭스, 왓츄를 둘러보다가 오늘도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한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이거 다 구독 끊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콘텐츠를 감상하는 시간보다 고르는 데 시간을 더 들이게 되니 구독료가 아까웠다.
“아아아아.”
백설기가 기지개를 켜고 소파에서 굴러 내려왔다.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대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이름을 알렸지만 이후 마땅한 일이 없었다.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고도 큰 이슈를 만들지 못했고, 조금씩 불러주는 곳도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상황을 타개하고 본인을 홍보하고자 만든 뉴튜브 채널은 영상을 100여 개 게시하는 동안 구독자 4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큰 반응이 없으니 의욕이 줄어 최근 두 달은 영상 업로드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백설기는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 점차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자 노력했고 작품 활동에도 충실했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생겨 드라마, 영화를 보는 시간마저 안절부절못한 것이었다.
“하아.”
백설기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장미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마은찬 알지? 걔가 전시회 일로 네 연락처 알려달라고 하던데 괜찮아?]
백설기의 머릿속에 제육볶음맛 밥버거를 먹던 남자가 떠올랐다.
* * *
1)프랑스에서는 신랑과 신랑의 어머니가 가장 먼저, 함께 입장한다.
이후 신랑 측 아버지와 신부 측 어머니가 함께 입장하고 마지막으로 신부와 신부의 아버지가 함께 입장한다.
셰리는 양친이 사망한 앙리의 어머니 역할로, 푸생은 부친이 사망한 미셸의 아버지 역할을 맡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