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4화
-르네상스-
9.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하객이 찾은 결혼식(3)
“1995년 4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신랑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르소와 1995년 8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신부 미셸 플라티니가 오늘 부부의 연을 맺고자 합니다.”
2034년 10월의 두 번째 토요일.
파리 시청사에서 앙리와 미셸의 결혼식이 열렸다.
미셸은 하얀 튤립을 입은 헤르세(이슬의 님프)처럼 아름다웠다.
만약 결혼 당일 신부와 신랑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풍습이 없었더라면, 만나자마자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앙리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미셸에게 푹 빠졌는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다.
보기 좋다.
“두 분, 이에 동의하십니까?”
삼색기를 두른 파리시장이 결혼 증인 신분으로 참석한 나와 니콜라스 푸생 교장에게 동의를 구했다.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대답하고 서류에도 서명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선포합니다.”
시장이 축복을 기원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앙리와 미셸에게 가족 수첩을 넘겨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기록될 거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박수를 보내자 앙리와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축하해요.”
나야말로 증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기쁘고 고맙다.
앙리는 여전히 미셸만 보고 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셸이 푸생에게도 인사했다.
“하하. 이 결혼의 증인이 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정말 축하한다.”
푸생 교장이 미셸과 악수를 나누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두 손을 포개어 흔드는 모습이 정말 기쁜 듯 보인다.
“뭐 해.”
앙리가 푸생 교장이 내민 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셸만 바라보자, 그녀가 눈치를 주었다.
“뭐가.”
“선생님하고 인사해야지.”
앙리가 고개를 돌리는데 누가 봐도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신랑이 신부한테 아주 푹 빠진 모양이야. 하하!”
“요즘 계속 신경 쓰더니 정신이 없나 봐요.”
푸생 교장이 웃자 미셸이 민망해하며 앙리를 탓했다.
“무리도 아니지. 이렇게 아리따운 신부를 맞이하는데.”
푸생의 말대로다.
앙리가 웨딩드레스 디자인 초안을 짜긴 했지만, 결혼 당일까지 신랑에게 웨딩드레스를 보이지 않는 풍습 때문에 오늘 아침에야 처음 봤을 거다.
정말 멋진 드레스다.
지식이 없어 자세히는 몰라도 상체는 체형에 맡게 디자인한 반면, 하체는 풍성히 내려와 우아한 곡선을 이루었다.
치맛자락이 길게 늘어진 트레인 부분은 진주색 실크와 레이스, 튤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것 같은데, 여러 번 접어서 만든 주름에서 기품이 흘러내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만든다고 하더니 허언이 아니었다.
“엄마.”
셰리가 다가가자 미셸이 금방 울먹였다.
“내 딸 너무 예쁘다.”
셰리가 미셸의 손을 잡고 흐뭇하게 웃었다. 살짝 눈물이 맺혔는데 분명 기쁨과 지난날의 기억 때문이리라.
“아들도 너무 멋있고.”
셰리가 앙리에게도 손을 뻗었다.
검은색 정장에 하얀 조끼, 근사한 넥타이를 한 앙리가 셰리의 손을 잡았다.
“울지 마.”
“얘는. 내가 언제 울었다고.”
셰리가 손을 빼내어 눈 주변을 찍어서 눈물을 닦았다.
* * *
시청 결혼을 마치고 곧장 벵센느 숲에 있는 마르소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별관 1층을 예식장으로 꾸몄는데 천장 스크린에 하늘을 비추어 개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존 전시관이 고대 그리스 신전을 모티프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또 꽃길을 이룬 하얀 살구꽃이 구름처럼 보여서 마치 천상에 세워진 결혼식장 같다.
“와. 예식장 진짜 예쁘다.”
마은찬의 목소리다.
앙리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잠시 파리로 돌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이 반쪽이 되어버렸다.
나도 할아버지도 방태호도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히힣.”
“은찬아.”
할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38㎏ 나가던 사람이 고작 서너 달 만에 턱이 하나가 되었으니까.
예전처럼 삐쩍 마르지도 않고 보기 정말 좋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래. 누가 보면 그림 그리러 간 게 아니라 단식원 들어간 줄 알겠다.”
방태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었다.
“아항항. 비슷해요.”
고개를 기울이니 한숨을 푹 내쉰다.
“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오늘 말문이 여러 번 막힌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그렇지. 이게 말이 돼요?”
“덕도날드밖에 먹을 게 없었거든. 근데 작업실이 교외에 있어서 걷다 보니까 빠지더라구.”
마은찬이 끼니마다 왕복 40분씩 걸었다고 덧붙였다.
맛없는 걸 먹을 순 없다는 일념으로 거구의 몸을 이끌고, 운동 삼아 매일 2시간씩 걸었다니.
정말이지 경의를 표한다.
화이트채플 갤러리 개인전뿐만 아니라 영국행이 마은찬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마은찬이 씩 웃었다.
“맞아. 나 운 좋은 편이니까. 근데 형님이랑 형수님은?”
벌써 형수님 소리를 한다.
“웨딩 사진 찍으러 갔어요.”
그림 그릴 때 참고하면 좋겠다 싶어서 웨딩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프랑스에서는 결혼식 당일에 촬영한다고 해서 난감했었다.
덕분에 오늘은 앙리와 미셸을 열심히 관찰해야 한다.
“왜 나프탈렌이 있지?”
“컿!”
자리에 앉은 마은찬이 유리병에 담은 드라제 마리아쥬(Dragées Mariage: 코팅한 아몬드, 초콜릿)를 들고 헛소리를 꺼냈다.
덕분에 물을 마시던 방태호는 사레가 들렸고 이한나 작가는 소리 죽여 웃었다.
“나프탈렌이 왜 있어요!”
“그럼?”
“결혼식 와줘서 고맙다는 답례예요.”
“……나프탈렌이?”
“나프탈렌이 아니라 아몬드예요.”
코팅한 아몬드는 중세부터 불멸을 상징했다.
부부의 행복을 바라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의미로 프랑스에서는 오래된 전통이다.
“정말?”
하나를 꺼내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아몬드도 프랑스가 더 맛있어.”
마은찬의 기행이 이한나 작가의 웃음 코드를 완벽히 만족시킨 것 같다.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비다랑 블랑쉬는 안 왔어?”
“비다는 사정이 있어서 못 왔고 블랑쉬는 들러리 한대요.”
“사정?”
앙리를 신보다도 존경하는 비다가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고향에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흐응. 큰일 아니면 좋겠는데. 아픈 건 아니야?”
“네. 그러지 않아도 마음 쓰더라고요. 비다 성격 잘 알잖아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더 그럴 것 같아서 자세히 묻진 않았어요.”
대충 얼버무리자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어떻게 기자들이 한 명도 안 보인다.”
“자기 결혼식에 파리 날리게 할 순 없다고 하더라고요.”
기자 출입을 금하려고 일부러 사유지에서 경호업체까지 불러 관리하고 있다.
“그래, 일은 어떻게 잘 풀리고 있어?”
할아버지가 마은찬의 개인전을 궁금해하셨다.
“네. 아는 사람도 없고 컴퓨터도 설치 안 하니까 작업만 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에요.”
“하핳. 좋지. 좋아.”
“그래도 한국에는 가보고 싶더라고요. 미래 선생님 논개 영정이랑 훈이 오솔길 보고 싶은데.”
“뭐,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보면 되지.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니.”
어지간하면 부담을 주지 않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화이트채플 개인전은 의미가 남다르다.
그들도 현재 마은찬을 보는 게 아니라 미래의 거장을 기대하고 섭외한 것이니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일로 미술계에 이름을 떨칠지 아니면 큰돈을 들인 전시회에 실패한 작가로 남을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있어요. 예전에 유행했었는데 레진 아트라고 아세요?”
“알다마다.”
“그걸 얇게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펴 바르고 또 그림을 올려서 그리고 있는데 엄청 재밌어요.”
“본 기억이 있구나.”
“어떤데요?”
“이런 거야.”
모르는 일이라 물어보니 마은찬이 작업물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레진이라는 투명한 반고체 상태의 물질 위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레진을 바르고 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림에 층이 생겨서 아주 재밌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컴퓨터 작업을 할 때 레이어 여러 개를 겹쳐서 보이는 원리와 같다.
마은찬은 이것으로 가능한 여러 표현법을 연구 중인 듯하다.
“근데 이거.”
“멋지지?”
“개벽으로 할 수 있잖아요?”
마은찬이 눈을 깜빡였다.
“어?”
“무슨 느낌인 줄 알겠는데. 모형 같은 거 넣어서 만들 수도 있겠고. 입체적으로요.”
“응.”
“개벽으로 쉽게 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레진이란 걸 써요?”
마은찬이라면 분명 내가 생각지 못한 기막힌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게. 한 14~15년 전이야 개벽이 없었으니까 유행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잖아. 다른 이유가 있겠는데?”
방태호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관심을 보였다.
할아버지도 굳이 묻진 않았지만 궁금해하시는 눈치다.
“……그. 질감이라든지.”
“질감은 개벽으로도 표현할 수 있잖아요.”
“이게 틀을 어떻게 짜는지에 따라서 엄청 달라지거든.”
“개벽은 틀도 필요 없잖아요.”
마은찬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누가 밝기를 조절하는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네?”
마은찬이 고개를 숙이더니 중얼거렸다.
“네 달 동안 뭐 했지. 나…….”
비상사태다.
* * *
미셸은 앙리의 눈빛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평소에도 강렬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뚫어지게 바라보는 탓에 부담스러웠다.
웨딩 사진을 찍느라 창가에 마주 보고 걸터앉으니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만 좀 봐.”
“왜.”
“부담스럽잖아. 그렇게 예쁘냐?”
미셸이 민망함을 감추고자 농담을 건넸다.
“어.”
“어어?”
앙리를 알고 지낸 지 20년이 지났지만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새 옷을 입든, 미용실을 다녀오든 트집만 잡던 인간이 오늘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안 하던 짓을 했다.
“저……. 신랑님.”
두 사람이 꽁냥대는 탓에 촬영이 지연되자 카메라 기사가 조심스레 앙리를 불렀다.
앙리 마르소는 매우 불쾌한 눈초리로 기사를 흘겨보았다.
“아니. 그냥 촬영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거 아닌지 해서요. 식도 하셔야 하니까.”
“그래. 그만 좀 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눈 좀 그렇게 뜨지 말고. 웃어 봐.”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좁혔다가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세상 어색한 미소에 미셸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