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3화
-르네상스-
9.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하객이 찾은 결혼식(2)
스마트폰을 보던 미셸 플라티니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청첩장 디자인이 그리도 중요한지.
앙리 마르소는 오전 내내 작업실에 틀어박혀 펜만 움직일 뿐이었다.
“쯧.”
펜을 놓길래 이제 끝났나 싶었더니 혀를 차고는 또 한 번 스케치북을 찢어서 구겼다.
그가 무심히 던진 종이는 이미 가득 찬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하고 책상 주변 바닥을 어지럽혔다.
미셸은 오늘 작업실 청소 담당자의 허리를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앙리가 집착하는 건 청첩장 디자인만이 아니었다.
웨딩드레스, 결혼사진 기사, 부케, 메이크업 업체, 결혼식 장소와 진행까지.
결혼식에 관련한 모든 일을 미셸이 지칠 정도로 꼼꼼하고 까다롭게 준비했다.
그가 결혼에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터라 처음에는 감동했으나.
몇 주째 결혼 관련 이야기만 나누니 답답하기도 했다.
“날씨 좋던데.”
미셸이 말을 붙였다.
“애들 데리고 산책이나 할까?”
앙리가 키우는 아홉 마리 강아지는 모두 산책을 즐겼다.
빠삐용을 제외하면 모두 퇴역 군견으로 노쇠하거나 다리를 잃은 아이도 있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햇볕과 풀 냄새, 흙의 촉감을 즐겼다.
“아침에 했어.”
새벽 운동을 함께한 모양.
미셸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일을 제안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나간 김에 쇼핑도 하고.”
“무슨 쇼핑.”
“선물 사게.”
“선물?”
“씨몽 회장님하고 아르센 씨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주례를 서 주기로 한 씨몽과 사회를 맡아 줄 아르센에게 성의를 표하자는 말이었다.
현금을 주려고 했던 앙리 마르소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꼭 물건으로 해야 해?”
“같이하면 더 좋지?”
예비 신랑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미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 여가를 작업실에서 보낼 순 없었다.
앙리는 미셸이 유도한 대로 이내 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기다려.”
앙리는 외출 채비를 하고자 작업실을 나섰고 미셸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괜찮은데.’
단순하고 깔끔해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었으나, 미학에 관해서는 병적으로 집착하는 앙리를 만족시키진 못한 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미셸이 미소 지었다.
지금은 세계가 열광하는 천재 미술가지만, 그가 하나의 작품을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인 이상 항상 번뜩이는 발상을 내보일 순 없었다.
90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수천 점의 소품과 수만 개의 아이디어를 폐기해야 했고.
발표한 작품 중에서 높이 평가받은 작품은 50여 점뿐이었다.
그중 역사에 기록될 작품이 몇 작품이나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역사에 기록될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많은 미술가가 젊음을 보내고 또 평생을 바친 것처럼.
앙리 마르소는 매일, 매시간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그 집착이야말로 앙리 마르소란 미술가를 존재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결혼식 청첩장 디자인에 며칠을 고민하는 그가 귀엽기도 했다.
‘그때도 그랬지.’
미셸이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 * *
2010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앙리 4세 고등학교는 다소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급별로 작은 공연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앙리와 미셸의 반은 ‘Douce Nuit - Sainte Nuit(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로 했다.
연습 도중 한 학생이 음을 이탈하자 웃음꽃이 피었다.
“웃어?”
무대 연출을 맡은 15살의 앙리 마르소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반 아이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던 라비오가 나섰다.
“너무 심각하잖아, 마르소. 그냥 즐기는 거야.”
“개소리 마. 이따위로 해서 누가 즐겁다는 거야.”
학생들의 얼굴이 굳었다.
축제와 준비 과정을 즐기고, 잘하든 못하든 함께 무엇을 하는 것에 의의를 둔 아이들로서는 앙리 마르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뷰그레넬리 들를까?”
“저녁까지 게임 할 사람?”
“카페 가자.”
학생들은 앙리를 무시하곤 무리를 지어 하교를 준비했다.
“연습 안 끝났어.”
앙리 마르소가 반 아이들을 막아서려고 하자 라비오가 또 한 번 나섰다.
“이미 30분이나 연습했잖아. 내일도 있고.”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라비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소, 그거 알아? 네게 그런 말 들으면서까지 합창 연습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맞아.”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해.”
반 아이들이 라비오에게 동조하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복싱 클럽 일정을 마치고 반을 찾은 미셸이 망치 소리를 듣고 의아해했다.
노래 대신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판넬, 톱, 망치, 색종이, 페인트통, 붓으로 가득한 교실에 앙리만이 있었다.
미셸은 다른 애들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한순간도 같이 있기 싫었다.
서둘러 짐만 챙겨 나가려고 하는데, 쩍 하는 파열음이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앙리가 망치로 판넬을 부수고는 새 판넬을 꺼내고 있었다.
“놀랐잖아.”
“근데.”
어처구니없는 대꾸에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앙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세 번째 날부터였다.
매일 교실에 홀로 남아 뭔가를 만드는 그가 이상했다.
반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합창 발표는 안 하기로 한 듯한데, 혼자서 뭘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너 뭐 해?”
“보면 몰라?”
“모르겠는데.”
“머리가 나쁜 거야 시력이 나쁜 거야.”
“죽을래?”
“성격도 나쁘군.”
누가 누구보고 성격이 나쁘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돌아가려던 차.
평소에는 장갑을 끼고 다니고 사람과 접촉하는 것마저 꺼리는 결벽증 환자가 땀까지 흘리며 먼지 구덩이 속에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애들이 안 한대.”
일종의 변덕이었다.
합창이 취소된 걸 모른 채 무대를 준비하는 그가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앙리는 개의치 않고 톱을 들었다.
“혼자 할 거야?”
“그런 놈들 필요 없어.”
매일 늦게까지 남아 축제를 준비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했다.
“……왜? 무슨 이유라도 있어?”
“없어.”
“근데?”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궁금한 거야.”
“그렇잖아. 다들 안 하겠다고 하는데 굳이 이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잖아.”
크리스마스 축제는 그저 하나의 유흥이었다.
칼같이 동선을 맞추고, 완벽한 화음으로 노래하고, 근사한 무대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런 행사가 아니었다.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그저 추억을 남기기 위한 일이었다.
“그럼 내가 묻지.”
앙리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떻게 모든 일을 대강대강 하지? 본인 이름이 걸렸는데.”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야. 그냥 축제라고.”
“학교 강당이든 공원이든 루브르 박물관이든 내 이름을 걸고 전시되는 건 똑같아.”
앙리가 다시금 톱을 잡았다.
고집스러운 소년은 본인이 하는 일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설픈 톱질과 못질에 손을 다치기 일쑤였으나 스스로 부끄러운 작품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멋진 무대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줘 봐.”
미셸이 앙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걸 혼자 언제 다 하게. 선 따라서 자르면 되지?”
앙리가 미셸을 바라보았다.
폭력적인 로랜드 고릴라의 눈에서는 조금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와준다니까?”
미셸이 손을 내밀어 재촉하자 앙리가 눈매를 좁혔다.
“치워.”
“뭐?”
“망칠 생각 말고 꺼지라고.”
* * *
“갑자기 그날 생각이 났어.”
보조석에 앉은 미셸이 옛이야기를 꺼내자 앙리가 인상을 썼다.
“기억나?”
“잊을 리가 없잖아.”
“그치?”
미셸은 그날을 무척 간질간질한 분위기로 묘사했지만, 앙리는 당시를 몹시 폭력적인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더니 기어이 복싱 링 위에 올라가 강제로 시합을 하게 된 탓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그때 미셸에게 허용한 훅을 잊을 수 없었다. 자칫 방심했다가 마우스피스를 놓칠 뻔 했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청첩장 누구누구한테 보낼 거야? 명단은 만들어 놨어?”
“셰리, 씨몽, 푸생, 말로, 아르센, 숌즈, 페르디난트, 고수열 경, 고훈, 방태호, 이한나.”1)
“아.”
엄마 셰리를 포함하지 않고도 10명이나 되었다.
앙리를 찾는 사람이 없진 않을까 걱정하던 미셸이 안도했다.
“왜.”
“생각보다 많아서.”
사회성이 결여된 예비 신랑에게도 청첩장을 보낼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비서 아르센과 변호사 숌즈.
마르소 가문과 교류가 잦았던 페르디난트 가문의 상속인 귄터 페르디난트와 셰바송 씨몽 협회장, 니콜라스 푸생 교장, 피에르 말로는 그렇다 쳐도.
고수열, 고훈, 방태호, 이한나는 몇 년 전만 해도 결혼식에 초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고 보니 훈이가 그림 그려준다며?”
“어.”
“바쁜데 무리하는 거 아닐까? 보니까 방송하면서 그리려고 하는 것 같던데.”
“하지 말라고 했어.”
“뭘? 그림을?”
앙리 마르소가 무슨 헛소리냐는 시선을 보냈다.
“방송 중에 그리는 거.”
“왜? 시간 아끼고 좋잖아.”
다른 그림도 아니고 웨딩 그림을 남들과 같이 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내비칠 수 없는 노릇.
미셸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저번 방송 보니까 얀 반 에이크 그림 설명하던데. 얼마나 잘 그려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 훈이 선물도 같이 사야겠다.”
“피자면 돼.”
“또 심술부린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말 돼.”
* * *
“포테이토 피자면 되겠어?”
“네.”
작업에 쓸 프레임을 짜는 도중에 할아버지가 저녁을 물어보셨다.
포테이토 피자는 항상 옳은 선택이다.
“후우.”
틀을 대충 만들고 보니 앙리가 말했던 200호는커녕 가로 500㎝ 세로 270㎝가 되어버렸다.
아마 내 회화 중 가장 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이 넓은 공간 채우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 팔과 허리도 제법 아플 듯하고.
“으음.”
사실 이 정도로 큰 작품은 눕혀놓고 그리는 게 편한데, 재질 특성상 그렇게 했다간 피를 보기 십상이라 고민이다.
물감을 두텁게 쓰면 마르기도 전에 흘러내릴 수도 있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실험을 해봐야겠다.
정 안 되면 아크릴 물감을 써도 되니 큰 걱정은 없지만 말이다.
“어이구. 아주 대작을 하려는 모양이구나.”
“네.”
피자를 주문하신 할아버지가 프레임을 보시더니 깜짝 놀라셨다.
“이 정도면 캔버스를 몇 개는 이어야겠다.”
“캔버스 아니에요.”
“아니야?”
“네. 얀 반 에이크가 멋진 아이디어를 빌려줬어요.”
머릿속에 담긴 이미지가 제대로 구현될지 기대된다.
* * *
1)귄터 페르디난트. 26화에 첫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