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67화 (36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1화

-르네상스-

8. 그가 내린 결말(8)

개벽과 개벽으로 만든 작품을 옮기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예민한 장비인데다 다뤄본 사람이 개발진 이외에 없으니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접착면과 깔끔하게 분리하기 위해서는 PP라는 특수한 용액이 필요한데, 그것 없이 마구 철거했다간 잔디밭이 훼손될 터다.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등을 쓸어내렸다.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말려무나.”

“하지만.”

“그림이 화판 위에 있을 때는 화가의 것이지만 벽에 걸린 순간부터는 관람객의 것 아니겠니?”

“…….”

“오솔길도 그러려고 만들었잖니.”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오솔길을 만든 근본적 이유는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미술이 지금 인식처럼 어려운 일이거나 사기가 아니라 음악, 영화, 문학 등 다른 예술과 다르지 않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쓸모없거나 혐오스러운 게 아님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다.

“맞아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많은 분이 네 뜻을 이해하고 오솔길을 지키려 하잖니. 그걸 네 손으로 부순다면 어떻겠니. 할아버지는 아주 서운할 것 같구나.”

“…….”

고민에 답을 내리지 못하자 장미래와 방태호도 한마디씩 거든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 다들 반가워하는 거야. 반가워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거고.”

“이미 뜻이 전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만 해도 공공예술 폐지하자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켜야 한다고 하잖아.”

할아버지, 장미래, 방태호뿐만 아니라 서울시에 앙리까지 나서서 말리고 있다.

철거를 반대한다는 글이 너무 많이 올라와 서울시청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라고 하니 나로서도 더는 방도가 없다.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해서 슬쩍 보니 차시현이 문자를 보냈다.

[줬다가 뺏는 게 어딨어!]

[치우면 화낼 거야!] 12:21

[나도 권리 있어!] 12:22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시현이도 협업자로서 권리가 있다.

“흫.”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훈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사실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서서 본래 철거해야 하는 <오솔길>을 지켜야만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할아버지 말씀대로.

내 손을 떠난 작품이 시민들에 의해 다른 의미와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것을 내 손을 해칠 순 없다.

“옮기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요.”

“그럼?”

성찬호 서울시장이 눈을 크게 뜨며 반겼다.

“네. 바로 가봐야겠어요.”

* * *

24일 일요일 오후 2시.

서울광장은 <오솔길>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몰려든 인파로 북적였다.

이젠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급히 찾은 이들과 사진 또는 영상으로나마 <오솔길>을 간직하고 싶은 이들이 한데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공예술 사업 논란의 중심인 만큼 여러 언론사가 나서 취재하는 가운데 개벽을 운송했던 업체와 개발진, 서울시청 공무원이 나섰다.

“실례합니다. 30분 뒤에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철거해요?”

“일단 오솔길 밖으로 안내하라는 이야기밖에 못 들었습니다.”

“안 하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공무원들의 안내에 시민들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 며칠 사이 공공예술이 일상에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경험한 덕이었다.

“고훈이다.”

시민들이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고훈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오솔길>을 철거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났다.

고훈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고훈입니다.”

여기저기서 났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알려드릴 이야기가 있어 올라왔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선 정말 감사합니다.”

고훈이 시민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의아해하는 표정, 간절한 눈빛, 무심한 얼굴,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시선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현대미술은 사기라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젊은 화가의 입에서 나오니 무게감이 느껴졌다.

“또 누군가는 말합니다. 미술과 대중 사이에 생긴 간극을 좁히려면 시민들에게 미술을 가르쳐야 한다고요.”

고훈이 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고훈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솔길은 본래 철거해야만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짐으로써 공공예술 사업 규정의 허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작품의 의도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하지만 제 예상보다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여러분이 예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말을 꺼내기 전만 해도 차분했던 마음이 벅차올랐다.

“제 의도와는 다르게 여러분이 의미를 부여해 주신 거예요. 철거해야 하는 작품을, 지켜야 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저로서는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고훈이 또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잘난 작품이고 못난 작품이고.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작품을 스스로 폐기하는 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철거하지 않아도 <오솔길>의 목적을 다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준 시민들에게 고훈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짝짝짝짝짝-

누군가가 시작한 박수가 너울처럼 밀려들었다.

“좋아요!”

“울지 마!”

“고마워요!”

고훈이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를 올렸다.

다시 태어난 이후 줄곧 현대미술과 대중의 단절에 고민했던 고훈은 비로소 답을 찾은 듯했다.

“누군가가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쁘게 본다고 말한다면 오늘 일을 전해주려고 합니다.”

다소 잠긴 목소리였으나 힘이 느껴졌다.

“미술적 지식은 없을지 몰라도. 미술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말할 겁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해를 요구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대중이 무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작품, 대중 사이에 감정적 교류가 없었던 것이다.

이해를 바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으나.

고훈은 슬픔, 감동, 분노, 즐거움, 사랑 같은 교감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큰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또 현대미술이 사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물어볼 겁니다. 이렇게 많은 분과 마음을 함께했는데 이조차 거짓처럼 보이냐고.”

고훈이 싱긋 웃었다.

“오솔길을 함께 완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틀 정도 뒤에 이 앞 한빛광장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솔길>이 철거되지 않는다는 말에 서울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취재 차 나왔던 언론을 통해 현장 상황이 전국에 중계되었고 커뮤니티 사이트, 미술 관련 포럼, SNS 등에서는 환영의 글이 줄을 이루어 올라왔다.

└우리 훈이 이름값한다!

└그러니까. 미술계 뉴스 보기만 해도 싫었는데 훈훈해지네.

└훈이 말 듣고 현대미술 다르게 보게 됐음.

└맞아. 솔직히 미술 진짜 암만 봐도 모르겠던데 예술의 본질이 교감에 있다는 거잖아.

└난 좀 다름. 예술이란 게 꼭 이해를 동반해야 하나? 공감받지 못한 작품도 나름의 이유가 있음.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처럼 모든 작품도 존중받아야 하는 건 맞음. 근데 훈이가 말하는 건 공감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작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함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창출된다는 거야.

└오솔길처럼 ㅇㅇ

└사람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는데 예술품도 마찬가지지.

└진짜 감동인 게 우리가 <오솔길>에 새 생명을 부여해 줬대 ㅠ

└엘리트화되어서 몇몇 사람만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향유하는 게 훈이가 추구하는 예술관인 듯.

└그래서 더 좋아

└근데 진짜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하는 거 오랜만인 듯. 하는 커뮤마다 전부 오솔길 얘기네.

└ㅇㅇ 저번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처음인 듯.

└솔직히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모르게 될 때부터 사람 만나는 게 불편해지더라. 싫은 건 아닌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헐 나도.

└이상하게 어릴 땐 무슨 말 해도 얘기가 통했는데.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래서 어릴 때 친구 만나면 추억 이야기 꺼내는데. 그땐 엄청 좋은데 자꾸 그 시절 이야기만 반복하게 되더라.

└난 친구들끼리 만나면 서로 아무말 대잔치하는뎈ㅋㅋㅋㅋㅋ 자기가 하는 일 이야기하는데 들어도 모르겠음ㅋㅋㅋ

└그러고 보면 진짜 신기하다. 다들 오솔길 이야기하는 거 보면.

└이래서 예술 보나 봄. 같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잖아.

공공예술을 둘러싼 여러 논란 끝에 고훈이 전달한 메시지는 가슴 깊숙이 다가갔다.

<오솔길>은.

예술가는 절대다수의 대중을 알 수 없고, 개인은 한 사람의 예술가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하지만.

서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작은 계기와 용기만 있다면 이토록 가까워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 사회로 인한 피로감,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삶의 변화, 1인 가구 증가 등 여러 이유로 개인의 인간관계가 점차 줄어들었고.

뉴튜브, 웹플릭스와 같은 콘텐츠 시장은 AI가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기존에 보던 것만 제공해 주었다.

잠들기 전 1시간마저 아쉬운 이들은 ‘실패’하고 싶지 않기에 AI가 제공하는 콘텐츠만을 소화하니, 개인과 개인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었다.

사회는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다원화를 이루었으나, 각 개인이 갈라파고스화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된 끝에 사람들은 점차 타인과의 교감을 갈구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몰았던 좁은 철창에서 벗어나 내가 느낀 즐거움과 감동, 슬픔, 사랑을 공유하길 바랐다.

그 원초적 본능을 <오솔길>을 통해 일부나마 충족시킬 수 있었다.

* * *

비비안 이스트우드와 계약 체결을 미루면서까지 한국에 남았는데 다행히 일이 좋게 풀린 듯하다.

<오솔길>을 한빛광장으로 옮긴 날.

성찬호 서울시장은 카메라 앞에서 서울시 내 공공예술 사업 규정과 과정을 공정하게 처리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장미래 한국 예술인 조합장이 고발한 정‧재계 인사 1,000여 명이 오늘로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규서가 남긴 명단에 있던 사람들이 수사 중이라는 뉴스도 보도되었다.

현직 국회의원 몇몇이 불체포 특권 때문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지만, 장미래는 증거가 명확해서 처벌을 피할 순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동안 공공예술 사업을 독점해 온 기업들도 대대적인 수사를 받을 예정이고, 정말 미술계가 제대로 돌아가는 순간이 다가온 듯하다.

이 가슴 벅찬 이야기에 <오솔길>이 한몫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다.

최근 마음고생 하느라 피곤했는데 파리에 도착하면 며칠 푹 쉬어야겠다.

“어……. 훈아.”

기지개를 켜고 한숨 자려던 차 옆좌석에 앉아 있던 방태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네.”

“도착하면 할 일이 좀 많겠는데?”

“네?”

“뉴튜브 영상 안 올라온다고 성화고. 웬델 수석도 내색은 안 하는데 뭔가 서운한 눈치더라고. 게다가 마르소 씨 웨딩 그림도 그려준다고 했잖아.”

“…….”

쉬기는 글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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