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66화 (36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0화

-르네상스-

8. 그가 내린 결말(7)

“뭐가 아까워요?”

마침 방에서 나온 고훈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오솔길 말이다.”

곱씹어 생각해도 철거하기에 너무나 아쉬운 작품이었다.

제작에 들인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오솔길>은 공공예술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한 상징적 작품이었다.

고수열은 손자가 도심 한가운데에 만든 동화 같은 공간을 어떻게든 보존하고 싶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서울광장에 계속 두기엔 아무래도 힘들지 않습니까. 옮길 장소도 마땅치 않고.”

“음.”

방태호의 말대로 서울광장은 이미 많은 사람이 예약해 둔 장소였다.

돈을 들인다고 기간을 연장할 순 없었다.

“땅이 있기야 하지.”

방태호와 고훈이 고수열을 보았다.

“왜. 훈이가 예전에 사 둔 땅이 있잖은가.”

“아. 그랬죠.”

방태호가 고훈이 어릴 적에 사 두었던 남양주 조안면 일대를 떠올렸다.

접근성은 떨어질 테지만 해바라기밭과 <오솔길>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안 옮길 거예요.”

고훈이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며 말했다.

“오솔길은 철거되어야 의미가 있어요.”

처음부터 공공예술 관련 규정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만든 작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야만 충격이 클 테고, 비로소 시민들이 공공예술의 존속과 규정 개선의 필요성을 느낄 터였다.

“끄응.”

고수열이 앓는 소리를 내며 손자가 따라 준 주스를 들었다.

손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이 이해하면서도 아쉬움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개벽에 이미 저장되어 있지 않나? 철거해도 다시 출력할 수 있잖아. 아, 고마워.”

방태호가 포도 주스가 든 유리잔을 넘겨받았다.

“오솔길의 의미는 시민들과 공간을 공유한 데 있네. 다시 출력해도 복제품일 뿐이지.”

“개벽이 기존 디지털 작품이랑 다른 점이죠.”

“하긴. 그렇기도 하네.”

여러 디지털 예술품이 NFT(대체불가토큰)로 거래되고.

개벽으로 만들어낸 작품 역시 NFT를 통해 원본 파일을 입증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구현해낸 작품은 <오솔길>처럼 원본 파일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도 했다.

고수열은 아이들이 뛰어놀며 자연스레 밟혀 부러진 풀과 나뭇가지, 본래 있던 곳과 다른 곳에 놓인 다람쥐와 시민들이 그 다람쥐 주변에 놓아 준 도토리 모두 <오솔길>의 한 요소로 생각했다.

“사실 옮기려고 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네.”

“네.”

“끄응. 아까워.”

고훈이 이토록 완강히 나오니 고수열과 방태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본인 작품에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고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부우웅- 부우웅-

두 사람이 아쉬워하던 차 방태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방태호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의아해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방태호입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성찬호 시장님 비서 박준길이라고 합니다.

성찬호라면 서울시장 이름이었다.

뜻하지 않은 연락에 놀란 방태호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아, 예. 안녕하세요. 어떻게…….”

-다름이 아니라 시장님께서 고훈 작가님께 감사 인사 드리면서 관련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가능하면 내일 오전이나 점심 정도로요.

방태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서울시장이 직접 나설 정도라면 시청 내부에서도 <오솔길>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미팅 날짜를 내일 점심 중에 잡으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오솔길>이 철거되기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은 듯했다.

여론도 <오솔길>을 폐지하지 말라는 쪽으로 이뤄지고 있으니 시청에서도 부담을 느껴 대안책을 마련한 눈치였다.

방태호가 포도 주스를 마시는 고훈과 안타까운 나머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고수열을 보곤 씩 웃었다.

어쩌면 고훈이 <오솔길>을 철거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야기 나누고 이 번호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그리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방태호가 의기양양해하자 고훈이 어디서 온 전화인지 물었다.

“무슨 전화예요?”

“서울시청 비서실장.”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내일 시간 괜찮냐고 하더라고. 시장님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고.”

고훈이 피식 웃었다.

“그 사람 위해서 한 일 아닌데요. 거절해 주세요.”

“인사 정돈 받을 수 있잖아. 내일 딱히 다른 일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선생님?”

방태호가 침울해진 고수열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고수열이 고개를 들어 방태호를 보니 뭔가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래. 인사 정도는 받을 수도 있지 않겠니.”

“그래. 혹시 몰라? 공공예술 관련해서 네 이야기 듣고 싶은 걸지도.”

“그럴까요?”

“그래. 미래 씨 혼자만 움직이게 할 순 없잖아. 이럴 때 도와야지.”

“그런 거라면…….”

방태호가 지나치게 기뻐하는 모습이 석연치 않았지만, 방태호의 말대로 공공예술의 필요성을 정치인에게 곧장 전달할 좋은 기회였다.

“그래. 그럼 내일 점심에 약속 잡을게.”

“네. ……다른 이야기 있는 건 아니죠?”

“그럼. 그럼.”

* * *

고훈이 <오솔길>의 철거 소식을 전하고 불과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에 인터넷 여론이 들끓었다.

서울광장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부터 자리가 문제라면 서울시가 나서서 적당한 위치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오솔길>을 유지해 달라는 글이 서울시청 응답소에 줄을 이루었다.

트래픽이 갑작스레 몰린 탓에 홈페이지 접속이 원활해지지 않자, 시민들은 개인 SNS와 뉴튜브 등을 활용했고.

<오솔길>을 지키자는 목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일파만파 번져갔다.

└진짜 말도 안 된다.

└다음 주에 보려고 했는데.

└내 말이. 이번 주 너무 바빠서 다음에 가려고 했는데 왜 철거함?

└서울시가 의뢰한 게 아니라 장소 대여한 거라서 치워야 한대.

└오솔길이 그렇게 멋있음?

└나 공공예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던 사람인데 오솔길은 진짜 달랐음.

└멋있다기보단 진짜 신기함ㅋㅋㅋ 고흐 그림 안에 들어간 느낌임.

└출근하기 싫어 죽겠는데 서울광장 지나칠 때마다 기분 좀 나아지더라. 이번 주는 주말에 저기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공공예술의 순기능임.

└저런 걸 지켜야 함. 기껏 만들었는데 철거해야 하면 누가 또 만들겠음?

└이게 맞지. 훈이 말고 저런 거 만들 사람 없어. 돈도 안 되는데 누구 좋으라고 하겠냐?

└이 정도면 서울시가 나서서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다들 그렇게 문의하는데 주말이라 답변이 없나 봄.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이자 주말 저녁 뉴스에도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예술가 고훈의 오솔길이 25일 새벽 6시를 기점으로 철거되는데요.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건의가 빗발치고 있다지요?

-그렇습니다. 오솔길 철거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건의가 이어져 오늘 오후 5시 즈음 서울시청 홈페이지가 마비되었습니다.

-그동안 비판이 따랐던 경향과 사뭇 다른데요. 시민들이 오솔길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오솔길이 공공예술품으로서의 기능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화면이 전환되어 전 한국 예술인 조합장 서인호의 인터뷰 장면이 떠올랐다.

-공공예술에 대한 불만이 해소된 거라고 봐야죠. 흉물로 여겨졌던 다른 조형물과 달리 오솔길은 일상에 휴식을 가져다주었거든요. 아주 솔직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요 방송국에서 주말 8시 뉴스를 통해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오솔길>을 지켜야 한다는 여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공공조형물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과 대립한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백제당 민기철 의원은 개인 SNS 계정에 부정과 비리로 점철된 공공조형물을 없애고 고훈의 <오솔길> 같은 작품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국 예술인 조합에서도 <오솔길>을 지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예술가들은 한국 예술인 조합 사무실을 찾았다.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여야 해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지만 훈이 생각이 확고해서.”

“어떻게든 설득해야죠. 공공예술을 지키자는 여론이 모였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습니까?”

“맞습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에요.”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공공예술사업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조합장님.”

조합원들이 재차 설득하자 장미래가 손을 포개어 입 앞에 두었다.

확실히 이번 일을 계기로 폐지 위기에 놓인 공공예술사업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얘기해 볼게요.”

장미래가 조합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직원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섰다.

“조합장님, 서울시청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장미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 * *

“어?”

서울시장과 만나기로 해서 약속장소를 찾으니 장미래가 나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어야 할 아르센도 있어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서 앉아.”

장미래가 의자를 빼 주며 앉기를 재촉했다. 영문을 몰라 할아버지와 방태호를 번갈아 봤지만 두 사람 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르센에게 물었다.

“개벽 관리 감독 때문에.”

운송업체와 개발진이 잘 돌려놓을 테지만 아무래도 워낙 비싼 장비다 보니 앙리도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오늘 밤부터 <오솔길>과 함께 철거 작업에 들어가니, 아르센을 보내 작업 현장을 감독하게 한 듯하다.

“안녕하십니까.”

연륜이 묻어나오는 걸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성찬호 서울시장이 비서를 대동한 채 걸어왔다.

키가 큰 편이고 이마가 훤하여 건강한 인상이다.

“해송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네요. 성찬호입니다.”

“반갑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찬호가 할아버지와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누고 내게도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고훈 군.”

“안녕하세요.”

“이번에 정말 멋진 작품을 만들어 주어서 내 굳이 이렇게 자리를 청했어요. 응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아, 장미래 학장님도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장미래도 학장님으로 부르며 존대하는 걸 보니 나이가 적고 많은 것을 떠나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 바로 식사하며 이야기 나누죠. 박 실장.”

“네. 바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신호를 보내자 직원들이 곧장 음식을 내왔다.

호박죽이 처음 나왔는데 진득한 단맛이 일품이다.

“저번 주 월요일이었나요. 출근하는 길에 깜짝 놀랐습니다. 잔디광장에 갑자기 사람이 몰렸으니까.”

“네.”

“시민분들이 그리 좋아하는 걸 처음 봤어요. 시장으로서 고맙다고 꼭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시장님이 인사하실 일은 아니에요. 말 그대로 시민들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요.”

방태호는 짐짓 놀란 눈치고 할아버지와 장미래는 큰 반응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서울시장이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를 위해 한 일도 아닌데 인사받는 자리가 편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요?”

“네.”

“하하.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네?”

“실은 오솔길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남기고 싶어서요. 고훈 군도 알겠지만 다들 오솔길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잖아요?”

이제야 왜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이 자리에 나오자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오솔길>을 보존하고 싶었던 거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솔길은 현재 공공예술 사업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에요. 철거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 이미 많은 분이 공감하고 있으니까.”

장미래가 나섰다.

“굳이 충격을 줘야만 하는 법은 없잖아? 공공조형물이 지금까지 잘못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려졌고. 오솔길 같은 작품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굳이 철거할 필요 있어?”

“순간적인 반응일 수도 있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준길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시장님께선 서울시가 주최하는 공공예술 사업의 자격 요건을 완화하기로 하셨습니다. 공모가 공평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장미래 조합장님과 의견을 나누고 있고요.”

“……그래도 서울광장에 계속 둘 순 없잖아요?”

“청계천 한빛광장 일대를 후보로 두고 있습니다. 원래 공공조형물을 둔 장소도 마련되어 있어서 그 주변으로 꾸미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가서 보니 배치를 조금만 바꾸면 괜찮을 듯싶더구나.”

할아버지가 박준길 비서실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언제 가보셨어요?”

“크흠. 방 대표랑 아침에 그냥 심심풀이로 가봤지.”

인제 보니 할아버지, 방태호, 장미래, 서울시가 짜고 <오솔길>을 이전해 보존하려는 모양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것 같아요.”

서울시장과 할아버지, 장미래, 방태호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아니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오솔길>은 처음부터 없애려고 만든 작품이다.

“오솔길은 필요 이상으로 큰 규모로 만들었어요. 서울광장이 아니라면 서울시 어디에 두어도 과하다 싶을 정도죠.”

이목과 관심, 참여를 끌기 위함이었다.

“청계천 한빛광장이라면 처음 오솔길을 둘 장소를 찾아볼 때 고려했던 곳이에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배치를 손보면 가능하겠지만 아마 위화감이 들 거예요.”

할아버지가 이마를 짚었다. 저놈 고집을 어쩌겠나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셨을 거다.

“그럴 바에는 처음 생각대로 철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예정대로 오늘 밤부터 철거할 거예요.”

서울시장이 아쉬운 듯 입을 모았지만 별 방도가 없다.

파리에서 데려온 개벽 개발진과 관련 인력을 더는 붙잡고 있을 수도 없다.

“그건 어려워.”

다소 어색한 한국말에 고개를 돌리니 아르센이 빙그레 웃었다.

“작가님이 직접 관람하기 전에 철거하지 말라고 했거든.”

“……네?”

“오솔길을 서울광장에 둘 수 없으니 한빛광장으로 옮기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아르센이 묻자 서울시장과 비서실장, 할아버지와 방태호, 장미래 모두 반색했다.

“아니. 철거할 거라니까요? 내 작품이에요. 앙리가 뭔데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거예요?”

아르센이 빙그레 웃었다.

“맞아. 작가님도 훈이 네가 스스로 오솔길을 철거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셨어.”

“그런데요?”

“개발진과 운송업체는 작가님이 고용한 사람이니까. 철거하고 싶으면 혼자 해보라고 하시던데?”

어처구니가 없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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