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38화
-르네상스-
8. 그가 내린 결말(5)
[고훈 서울광장에서 개벽 선보여]
[한국 첫 방문 몽모랑시, 개벽 운송이 목적]
[고훈, 공공조형물이 논란을 빚는 가운데 정면 돌파]
[서울시청, “장소를 대여했을 뿐 공공예술 의뢰는 없었다.”]
언론은 고훈의 작업 소식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정‧재계 유력 인사와 유명 작가 1,000여 명이 고발되어 공공예술 및 예술가를 향한 창작 지원금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가운데 고훈의 행동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훈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의 존재는 미술계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이란 이름조차 부족하여, 미술계의 대부로 알려진 해송 고수열의 손자였으며.
유럽 미술계를 평정하고 세계 미술 시장을 뒤흔드는 앙리 마르소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것 외에도.
본인 또한 아르누보 공모전 준우승,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 등 입지를 확고히 했으며.
크리스틴 노먼 감독과 함께 3부작 흥행수익 총합이 40억 달러에 이르는 <뤼팽 시리즈>를 견인하고.
제3회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앙리 마르소와 함께 마에스트로 배도빈의 <파우스트> 공연을 완성하는 데 일조하는 등.
미술, 영화, 음악 문화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대중은 그런 고훈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서울광장에 공공예술을 선보이는지 의아해했고.
이러한 경향을 포착한 NBC의 한 교양‧시사 프로그램은 저명한 인사를 모아 현재 예술계에 일어난 현상과 고훈의 행동을 분석하고자 했다.
“안녕하십니까. 똑똑한 사고, 사고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방송. 똑똑똑의 MC 우진입니다.”
진행자 우진이 담당 PD가 만류했던 인사말로 방송 시작을 알렸다.
“최근 미술계에 큰 사건이 생겼죠. 한국 예술인 조합이 천여 명의 미술계 관련 인사를 고발한 사건인데요. 그중 대학교수, 현직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수 포함되어 논란이 뜨겁습니다. 오늘은 각계에서 이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개선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우진과 패널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먼저 초대 한국 예술인 조합장을 맡으셨던 서인호 작가께 여쭤보겠습니다. 이번 일 어떻게 보시나요?”
고수열과 함께 한국 미술계의 거두로 존경받는 서인호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참하죠.”
“처참하다.”
“예. 사실 예전에 이미 정리했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예전이라면 혹시 최영수 전 협회장 사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서인호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시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알려졌고 이후 협회가 전시회, 공모전 등에 영향을 끼친 게 공론화되었습니다.”
“그랬었죠.”
“물론 지금 형을 살고 있습니다만 안일했던 거죠. 작은 승리에 도취하여 근본적인 일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좋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뒤에 여쭙는 걸로 하고. 김두곤 대표께 여쭙겠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21세기 미술 예술 진흥회의 김두곤 대표와 시선을 나누었다.
“방금 서인호 작가께서 근본적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내비치셨는데. 김 대표께서 생각하시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역시 공공예술에 관한 일이겠지요.”
“확실히 최근 공공예술을 폐지하자는 여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네. 사실 공공예술이 비판을 받아온 건 오래된 일입니다.”
“그렇죠. 도시 흉물이다, 세금 낭비다 하는 말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죠.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심스럽지만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간격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하하. 그렇게 말하면 표현이 너무 거칠고. 다른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조금 닫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이 문제와 결이 다른 것 같습니다.”
패널로 참가한 이인호 기자가 반론을 냈다.
“대한일보 이인호 기자시죠. 오랫동안 미술계를 취재해 오신 걸로 아는데, 바로 여쭤보죠. 이 기자께선 공공예술을 폐지하자는 말이 왜 나왔다고 보십니까?”
“실망해서죠.”
“실망.”
“네.”
이인호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공공예술은 말 그대로 공공의 영역에 행해지는 예술입니다. 불특정 다수가 보게 되고 비판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반응을 그들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김두곤 대표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예술의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저도 찬성합니다만 공공예술은 결이 다릅니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일이 시민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인호는 항상 의문이었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졌다.
예술 또한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나, 공공예술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거래관계라고 생각해 보면 시민들은 돈을 내고 터무니없는 물품을 받아온 셈이 됩니다.”
“그 기자님이 뭘 모르고 하시는 말인데. 예술인들은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김두곤 대표가 나섰다.
“말씀하신 대로 비판은 당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작품도 비판할 수 있어요. 비판 여론이 있다고 해서 공공예술이 잘못되었다는 건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시민을 위한 일이 시민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인호가 반론했다.
“한국 예술인 조합이 고발한 내용에 따르면 작년에 이뤄진 공공예술의 90%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본래 사업비보다 부풀려진 제작비용, 공정하지 못한 입찰 과정!”
목소리가 점차 격해졌다.
“시민들이 바보로 보이십니까? 공공예술은 특정 세력이 세금에서 부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뭐요?”
“두 분, 잠시 진정하시고요.”
진행자 우진이 이인호와 김두곤을 막아섰다.
“이인호 기자가 말씀하신 주장이 현재 힘을 얻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화제를 모으는 일이 있죠. 고훈 작가가 서울광장에서 공공예술품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서인호 작가께 여쭙습니다.”
서인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신중히 입을 뗐다.
“고훈 작가의 행적을 보면 분명 이번 일과 무관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시기적으로 너무 잘 맞아 떨어지니까요.”
“다만 무슨 의미로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류가 있지 않으신가요?”
“하하. 뭐, 해송 선생 통해서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왜 그러냐고 묻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그래서 어디까지나 제 추측인데. 혹시 공공예술이 시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보여주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공공예술의 가치를 보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김두곤 대표는 어떻게 보시나요.”
“고훈 작가가 저번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참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민상을 처음으로 받았었죠.”
“네. 그 시민상을 받았다는 게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고훈 작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압니다. 이번에도 관심이 있어 살펴보니 잔디밭 위를 숲처럼 표현하고 있더군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캔버스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요.”
“영화 러빙 빈센트가 현실이 되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죠. 시민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죠. 아마 이렇게 재밌는 작품도 있으니 공공예술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 그리 생각합니다.”
“이 기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두곤 대표가 말씀하셨죠. 고훈 작가는 정말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예술가입니다. 왜 좋아하겠습니까? 자기만 내비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고려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볼 수 있겠죠.”
“그런 점이 공공예술의 본래 목적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에 놓일 예술품이라면 모두의 공감을 살 순 없더라도 소통의 길은 열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의미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설명을 들어도 와닿지 않은 예술품이 공공예술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진 않았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2부에서는 미술계의 개혁 방안에 대해 의견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뒤 뵙겠습니다.”
* * *
개벽의 가장 큰 장점은 화가가 공간을 그려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익숙해지기만 하면 화가는 붓과 물감으로 입체적 조형을 그려낼 수 있고, 관찰자를 자신의 세계로 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개벽은 본인만의 세계를 공유하고, 경험을 나누는 화가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작업을 시작하고 나흘째.
장소가 예상 밖으로 넓어서 가득 채우진 못했지만,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를 몇 그루 그려냄으로써 도심에 자연을 옮겨놓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옛 화풍을 살렸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라면 이 공간이 반갑기도 신기하기도 할 거다.
완전히 새롭고 다른 것에는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익숙하지만 기존과 조금 다른 것에선 흥미를 느끼는 게 본능이니까.
“이걸 진짜 우리가 한 거야?”
차시현이 헤드셋을 벗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디밭은 어느새 세 갈래 길이 나 있거 단풍나무로 우거진 오솔길로 변모해 있었다.
“멋지지?”
“응……. 나 이거 갖고 싶다.”
“개벽?”
“얼마야?”
“글쎄. 애초에 두 대뿐이야. 아직 개선할 부분이 많아서 시판되려면 한참 걸릴 거야.”
지나치게 큰 게 문제고 오류도 잦다. 개발진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첫 번째 날에 작업이 중단되었을 거다.
“우와.”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한 일고여덟 살 정도 된 아이가 잔디밭 안으로 들어왔다.
“대영아! 빨리 나와!”
부모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대영이란 아이는 물감으로 그려진 단풍나무가 신기한지 손을 뎄다.
“대영아!”
“괜찮아요.”
부모에게 다가가 안심시켰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대영아, 엄마 말 안 들을 거야? 만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엄마가 꾸짖자 대영이 놀라서 주춤거렸다.
“괜찮아. 신기하지?”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님도 들어오세요. 가까이에서 보면 더 재밌을 거예요.”
“네?”
나흘 동안 사람들은 고맙게도 잔디밭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거리를 둔 채 둘러싸 구경만 할 뿐이었다.
혹시 개벽에 문제가 생길까 봐 경호원을 세워두기도 했고, 방해하면 안 된다는 시민의식과 예술품을 망가뜨리면 큰돈을 물어줘야 한다는 걱정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래선 의미가 없다.
“다른 분들도 들어오세요. 편하게 구경하셔도 돼요.”
처음 말하니 다들 나서지 않는다.
가까이에 있던 아이에게 손짓하자 머뭇거리더니 다가온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그렸어.”
“어떻게?”
“저거 보이지? 개벽이라는 건데,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만들어 주는 기계야.”
나름대로 설명했지만, 아이는 관심이 없는 듯 단풍나무를 탁탁 때렸다.
그러자 드디어 한두 사람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곧 오솔길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 너무 신기하다.”
“반 고흐 전시회 가면 디스플레이로 이렇게 하던데.”
“진짜 그린 거야? 어떻게 한 거지?”
“엄마! 여기 다람쥐 있어!”
“아빠, 근데 산은 이렇게 생겼어?”
가족과 친구 혹은 홀로 찾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솔길>을 즐긴다.
“……훈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차시현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나 그림 보여주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아픔을 달래고. 기쁨을 더하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즐거우나 그것을 나누는 일 또한 행복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모양이다.
“나, 할래.”
“환영할게.”
쇼콜라티에 회원이 한 명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