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35화
-르네상스-
8. 그가 내린 결말(2)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논개 표준영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비관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울증 때문이라니.
그럴 리 없다.
한 가지 증상만으로 사람의 죽음을 전부 설명할 순 없는 법이다.
내가 알기로 최규서는 자존심이 몹시 강했다.
지금껏 비대해진 자아를 다스리지 못해서 화를 초래해 왔고 남을 죽일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 없는 사람이다.
그런 최규서가 자결하다니.
분명 뭔가 있다.
“말도 안 돼.”
장미래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최규서를 만나러 갔다. 정신이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괜찮아요?”
“어? ……어. 아니. 어.”
장미래가 들고 있던 전어를 내려놓았다.
“어제.”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장미래는 간격을 길게 두었다.
“규서가 이상하긴 했어요.”
할아버지와 함께 장미래를 보았다. 동공이 몹시 흔들리는 게 한눈에 봐도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저한테 자기 아빠하고 일한 사람들 명단 주면서. 알아서 하라고…….”
“알아서 하다뇨?”
“고발하라는 말 같았어.”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행동 같다.
“다른 말은 없었고?”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네. 왜 이러나 싶어서 혹시 뉘우치고 싶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했는데.”
장미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거기서 끝났는지, 좀 더 이어졌는지 모르지만 좋게 결론 나진 않은 것 같다.
드륵 의자 긁는 소리가 나 고개를 드니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좀……. 쉬어야겠다.”
터벅터벅 힘없이 침실로 향하는 뒷모습이 안타깝다.
못된 일을 정말 많이 했지만 직접 가르친 사람이라 일말의 정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빠바바바- 빠바바바-
장미래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서울서초경찰서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 * *
최규서가 사망하고 이틀 뒤.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 요청을 받은 장미래가 변호사를 대동하고 서울서초경찰서를 찾았다.
혹시나 기억과 진술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변호사와 사전에 상황을 정리하고, 해당 사건과 무관함을 적극 소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핸드폰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까?”
“자기 아버지랑 거래한 사람들 명단이 있다고 했어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패턴이 걸려 있어서 보진 못했어요.”
넘겨준 핸드폰에 잠금 패턴이 걸려 있어서 확인하지 못했단 말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변호사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하니 수사관이 고개를 저었다.
“정황을 확인하고자 부른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규서 씨가 학장님께 유서를 남기셨어요. 거기에 패턴도 적혀 있었고요.”
유서라는 말에 장미래가 또 한 번 당황했다.
피의자로 의심받을 거라 예상했던 장미래는 1시간가량 간단한 조사를 마친 뒤 귀가할 수 있었다.
최규서가 남긴 유서로 피의자로 의심받을 이유가 없었고.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한국 예술인 조합장이란 확실한 신분 덕이었다.
장미래가 경찰에게 넘겨받은 최규서의 유언을 쥐고 차마 발을 못 떼자 변호사가 물었다.
“뭔가 다른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왜 굳이 유서에 패턴을 적었을까 해서요.”
변호사가 잠시 고민했다.
“조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위험한 사람들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학장님께 핸드폰을 전해 주기 전에 누군가 훔칠 수도 있었을 테고, 아니면 학장님께 넘어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
“사고 직전에 만나셨으니 당연히 조사를 받으실 테고 그때 경찰을 통해 전달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부 제 추측일 뿐이지만요.”
“네.”
장미래가 힘없이 답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고맙습니다. 연락드릴게요.”
“네.”
변호사와 헤어지고 차에 오르자 백설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조사 끝났어? 괜찮아?
“괜찮아. 그냥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서 그대로 대답했어. 넌?”
-일단 언니 말대로 선생님 댁에 있어.
“그래. 나도 그리로 갈 거니까 이따 얘기하자.”
통화를 마친 장미래가 고수열의 서울 자택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동운행을 설정해 두고 숨을 길게 내쉰 뒤 유서를 열었다.
봉투에 적힌 ‘장미래에게’라는 단어가 수신인을 밝히고 있었다.
네가 물었지.
이기고 지는 일에 왜 그렇게 집착하냐고.
최규서가 남긴 유서는 흔들린 획 하나 없이 정갈했다.
올해 예술창작지원 예산으로 720억 원이 책정되었어. 매해 조금씩 늘었으니 내년에는 아마 더 늘겠지.1)
장미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각예술 창작 육성, 공연예술 창작 육성, 국제예술 교류, 예술과 기술 융합, 아르코 청년 예술가 지원, 기초예술 다양성 증진까지.
문학을 제외하고도 650억 원의 예산이 해마다 떨어져.
이 작은 시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놈들이든, 돈 좀 가진 사람이든, 누구든 탐나지 않겠어?
장미래는 잠시나마 최규서를 동정했던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힘 있는 사람은 많아. 독차지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서로 피곤해질 뿐이지.
그래서 적당히 나눠 먹기로 했어.
말 잘 듣는 사람한테 일을 주고 그들이 챙길 몫을 나눠 가졌지.
그렇게 올린 수익 일부는 예산을 편성하는 사람들에게 넘기고 그들은 내년에 예산을 증액하고.
효율적인 거래 관계였어.
아마 내가 준 스마트폰을 열어보면 놀라겠지. 네가 존경했던 이름이 반드시 있을 거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다 작은 문제가 생겼어.
네 덕분에 아버지가 징역에 살게 되었잖아.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은 모른 척하기 바빴지.
사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들 모두를 데리고 함께 죽을 바에야 차라리 훗날을 기약하는 게 나으니까.
아버지가 출소하면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점을 활용할 수도 있고.
서로 건들기 부담스러운 거지. 어찌 되었든 상생 관계니까.
장미래는 가슴에 번지는 불쾌한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났어.
최만수.
아주 큰 문제였지.
‘최만수?’
장미래가 기억을 되짚었다.
미술계 인사가 아니라 바로 떠올리진 못했지만, 핸드폰으로 검색해 얼굴을 보니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최영수 전 협회장의 동생이자 최규서의 작은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수감되자 놈이 본색을 드러냈어.
아버지가 관리하던 걸 차지하려고 날뛰더라고.
그들에게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거야. 수감된 아버지를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내세워 그동안 해 먹던 일을 이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내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땐 이미 모든 일이 그놈 입맛에 맞게 진행되고 있었지.
장미래가 상황을 돌이켜봤다.
최영수가 수감되고 예술기금은 상당부분 개선되었다. 한국 예술인 조합이 편성 과정에 참여해 생계가 어렵거나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 공공예술 등 수천만, 수억 원이 오가는 굵직한 사업은 여전히 이름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중요도가 높은 사업일수록 알려진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논리라 조합으로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최만수는 그런 일을 몰래 챙겨왔던 것이었다.
상황을 돌려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대출금을 상환할 상황도 아닌데 그런 와중에 최만수가 아버지 재산과 내 시클라멘까지 먹으려고 들었고.
하나 방법이 있다면 아버지와 그놈들, 최만수까지 엮어 보내는 일이겠지만 혼자서는 무리였어.
상황을 돌려보려는 시도가 논개 표준영정임을 모를 수 없었다.
한국 최고의 화가라는 장미래와의 경합에서 이김으로써 거래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존재감을 내비치고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그 외에 논개 표준영정 집착할 이유가 달리 없었다.
네가 말했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글쎄.
화폭 안에서라면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작품만으로 갤러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너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야.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태되고 약점을 보이면 잡아먹히지.
힘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거야.
“…….”
최규서의 말은 궤변이었다.
예술로는 생계가 이어지지 않기에, 권력을 쥐고 다른 예술가들을 부리며 살았던 범죄자의 자기합리화였다.
최영수 일가와 그 무리가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혼자 가기엔 억울하지.
장미래.
네가 옳다고 증명하고 싶으면 그놈들을 발라내. 눌어붙은 살점 하나 하나 실수 없이.
아래 잠금 패턴이 그려져 있을 뿐, 유서에 다른 말은 없었다.
장미래는 시트에 등을 파묻고 이마에 팔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했고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살 방법은 분명 있었다.
최규서 본인이 말했듯 혼자서는 무리라도 조합과 함께했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터였다.
하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최만수에게 굴복해 재산과 힘을 모두 잃을 바에야 본인과 최만수 모두 얻을 수 없길 바랐다.
차라리 목숨을 던질지언정 평생을 적으로 삼았던 장미래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싶진 않았다.
‘대체 자존심이 뭐라고.’
장미래는 끝까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만 세웠던 최규서를 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장미래가 집으로 돌아오고 할아버지, 백설기와 함께 유서를 읽었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어 어이가 없는데.
마지막에 뒷일을 부탁한 사람이 그토록 싫어했던 장미래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살아서 전달했으면 됐잖아.”
백설기가 중얼거렸다.
살아서 조합원들과 함께 실태를 고발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그 외에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용기가 없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용기가 없어 도망친 거다. 다들 마음 쓸 것 없다.”
할아버지 말씀대로다.
최규서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조합이 찾아올 미래에서 살아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만수와 최규서 모두 같은 인간이다.
* * *
1)2021년 기준, 문화예술 분야 예산은 1조 5,081억 원이었으며 예술창작지원 지원금은 481억 8,600만 원이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일부 내용을 참고해 적용했다.
출처: ‘2021년 문화복지 확대하고 지역문화·예술 생태계 복원한다’, 건강신문, 김승연 기자, 2020.12.14.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자료 ‘2021년도 문화예술진흥기금 예산’ 1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