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59화 (35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33화

-르네상스-

7. 파란 나무(3)

“응…….”

차시현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부끄러운 듯, 걱정스러운 듯한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시현이 그림이야?”

성현주가 아들에게 물었다.

“네.”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재우와 성현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백 숲속의 파란 나무는 아름다웠다.

어딘가 슬프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신비로운 빛이 따뜻하기도 했다.

미술을 모르는 자신도 마음이 동했으니 틀림없이 이름난 화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언제 이렇게.’

그림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 언제 이 많은 그림을 그렸는지, 언제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공부를 해야지 이런 걸 하고 있으면 어쪄? 응?”

“할머니.”

“그 늙은이 망령이 기어이 지 새끼한테 들린 거야. 이 일을 어쩌냐, 재우야. 응? 어떡해!”

나무에 매달려 평생 사람 구실도 못 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잘 죽었다고 여겼거늘.

귀신이 되어서도 손주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어떻게 진정을 해!”

“어머니.”

“할아버지 때문 아니에요.”

차시현이 어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빠 생각하고 그린 거예요.”

차시현은 고훈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그냥 할아버지랑 아빠가 화해했으면 싶었어요. 매일 할머니랑 아빠가 힘들어했으니까.”

차시현의 말에 차재우가 크게 충격받았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본인과 어머니가 받은 상처를 아내와 아들에게마저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관련한 일은 전부 숨겨 왔고 죽음마저 감췄거늘.

차시현이 그 고통을 보고 있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렸을 땐 별생각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나무를 그렸고. 아빠가 파란색을 좋아하니까. 파란 나무를 그리면 두 분 다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했어요.”

성현주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자라주어서 너무나도 고맙고 기특했다.

“저 알아요.”

어머니에게 안기자 씩씩하게 말하던 차시현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빠 욕하는 거. 알지도 못하면서. 히잉.”

“시현아.”

차재우가 아들을 안쓰럽게 보았다.

똑똑한 아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로 상처받은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그래서 오늘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할머니한테 사과해 줬으면 싶었어요. 그럼 아빠랑 할머니 더 안 힘들어도 되니까.”

“…….”

차재우와 성현주가 탄식했다.

어린 아들이 아빠와 할머니를 위해 이 많은 걸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시현아. 시현아.”

손자의 속마음을 들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특한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이미 죽었단 사실을 어찌 전해야 좋을지.

말문이 막혀 이름만 부르다가 흐느낄 뿐이었다.

잠시 후.

차시현이 엄마의 품에서 나왔다. 눈물을 닦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파란색은 슬픈 색이래요.”

차시현은 아빠가 파란 나무로 보였다.

함께 있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였지만 돌아서서는 아픔을 홀로 삭이는 외롭고 우울한 나무였다.

그러나.

“아빠의 파란색이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정하고 멋지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

차재우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독한 인연이었다.

가족이 삼 일간 아무것도 못 먹어도 물감부터 샀던 차상철을, 과로로 쓰러진 어머니를 두고 산에 올라 나무나 그리던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절연하기로 다짐했건만.

혈연이라는 게 무엇인지 차마 완전히 손을 놓지 못했었다.

어머니가 마지못해 생활비를 부쳐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몇십만 원을 어머니 지갑에 넣어두었다.

그러다 작년 아버지가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오랜 세월 폭음으로 간에 무리가 갔고 끝내 눈도 뜨지 못한 채 사망했다.

만약 매몰차게 굴지 않았더라면.

병원에 미리 데려갔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차재우는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두었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버지를 가족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단 생각으로 죄책감을 억누를 뿐이었다.

몇몇 이들이 아버지를 저버린 패륜아라 손가락질해도 그저 받아들일 뿐, 부정하지 않았다.

한데.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들이 나서서 위로해 주니 오랜 세월 가둬 둔 설움이 북받치고 말았다.

차재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들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 * *

서로 꼭 안고 조용히 우는 부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같은 나무라도 차상철의 그림은 가족을 불행히 만들었고, 차시현의 그림은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

장미래와 최규서의 논개 영정도 마찬가지.

그림은 외견만이 아니라 무엇을 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새삼 곱씹게 된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히히. 3년 정도?”

“히이. 그렇게나 오래?”

“돈도 많이 들었겠는데.”

“많이 안 들었어요. 최소 대여 기간이 일주일이라고 해서 그건 어쩔 수 없었는데 홍보할 필요는 없었거든요. 액자도 안 했고. 재룟값 정도? 아, 대신 가벽을 세웠어요. 도배는 못 한다고 해서요.”

“돈이 꽤 들었겠는데?”

“그래. 그럼 이 벽이 다 새로 붙인 거야?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용돈 받은 거 전부 주식으로 갖고 있었거든요. 많이 불었어요.”

차재우와 성현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그래. 그 정도는 아빠가 줄게. 얼마나 들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씁.”

“그래. 시현아. 아빠가 고마워서 주고 싶대. 말해 봐.”

“정말요?”

“그럼.”

화목한 가정이다.

나도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저런 식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

“천만 원이요.”

“……얼마?”

화목한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근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건 어떻게 알았어?”

성현주가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집 찾아갔었어요. 어제.”

“잉?”

세 사람 모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특히 할머니는 곧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라셨다.

“거기는 어떻게 찾아갔어. 응?”

“아빠 초등학교 어디 나왔는지 찾아봤어요.”

“그건 어떻게 알았고.”

“아빠 등본이랑 생활기록부 찾아봤어요.”

“……그건 어떻게?”

“아빠 주무실 때 지문 유리에 대고 복사했어요.”1)

“…….”

“……아빠?”

난 모르겠다.

* * *

할머니에게 잔뜩 혼난 차시현의 입이 잔뜩 나왔다.

“심하긴 했어.”

“멋있게 하고 싶었단 말이야.”

온갖 전시회를 다녀봤으니 적당한 물건이 눈에 찰 리 없긴 하다.

그림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를 꾸몄으니, 천만 원으로 끝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가족을 위한 이벤트에 돈 천만 원을 태워버린 아들을 혼내야 할지, 칭찬해야 할지 망설이던 차.

할머니만이 가만두면 집안 기둥 뽑아다 엿 바꿔 먹을 녀석이라며 혼을 냈다.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용돈 모아서 한 건데.”

“했잖아.”

“그게 제일 빨랐단 말이야. 탐정사무소에 의뢰하면 200만 원이나 든댔어.”

오늘 일로 단단히 혼나서 다행이다.

세상에 어떤 자식이 아버지 지문을 훔쳐서, 아버지 등본과 생활기록부를 열람할까.

“그리고 이젠 안 그럴 거야.”

“그래.”

녀석이 또 입을 내밀었다.

“기분 풀어. 나중에는 잘했다고 하셨잖아.”

할머니와 반대로 차재우와 성현주는 아들을 자랑스레 여겼다.

아직 16살밖에 안 먹었으면서 정보 수집, 자금 조달, 계획, 실행에 이르기까지 완벽했으니까.

잘못한 일은 분명히 혼내고, 잘한 일은 확실히 칭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근데 내 그림 어땠어?”

“좋았어.”

“좋았어?”

“응. 좋았어.”

“으으으응.”

녀석이 도리도리 고개 젓는다.

대체 대학생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길래 초등학생 시절보다 귀여운 척이 늘었는지 모를 일이다.

“자세히 말해줘.”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전문가의 감상! 솔직하지만 기분 좋은 말.”

칭찬해달라는 말이다.

“내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 이미 아버지랑 충분히 교감했잖아. 그러기 위한 그림이었으니 성공한 작품이지.”

아버지를 위한 그림이었다.

차시현이 바랐던 대로 차재우는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았을 것이고, 그 이상으로 행복했을 거다.

“히히.”

녀석이 싱글싱글 웃길래 덤을 얹었다.

“만약 네 할아버지가 보셨다면 분명 느낀 게 있었을 거야.”

“그랬을까?”

“응. 그렇게 그림에 미쳐 있었는데, 네 그림을 몰라볼 리 없거든. 분명 그랬을 거야.”

“……응.”

차시현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귀여운 척을 하던 녀석이 제법 의젓한 표정을 짓는다.

기특하여 머리를 쓰다듬자 금세 앙탈을 부린다.

“뭐야! 하지 마!”

“기특해서 그래.”

“또!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실제로는 38살 정도 차이가 나지만 이 기특한 친구를 결코 어리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보다 나으니까.’

빈센트로 살 적에 아버지와 끝내 화해할 수 없었다.

내가 붓을 든 순간부터 아버지와의 관계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목사가 되길 바랐던 그분은 평생 나를 눈 밖에 난 자식처럼 여겼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마저 인정할 수 없으셨는지 끝내 헤어지길 요구하시다가 뇌졸중으로 눈 감으셨다.

할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듣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렇게 영영 할 수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거늘.

장례식장을 찾은 집안 어른들이, 아버지를 죽인 놈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냐고 물었을 때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오직 테오만이 내 편이 되어주었다.

차재우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는, 오늘 차시현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안다.

그 어떤 위대한 화가의 전시회 못지않은 행사였다.

“잘했어.”

“또!”

차시현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 * *

1)공인인증서가 사라졌단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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