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32화
-르네상스-
7. 파란 나무(2)
손때가 낀 낡은 수첩은 차상철이 남긴 기록으로 가득했다.
나무를 관찰한 내용과 그날 겪은 일을 적어놓은 일기였다.
4월 11일
구멍가게 박 여사에게 라면을 얻으러 갔더니 건넛집 김학열이가 외상값이나 갚으라며 소리치기에 면상에 라면을 던져 주었다.
괘씸한 놈.
4월 12일
배가 고프다.
후배 정진식이한테 보낸 그림이 돌아왔다. 착불로 보냈는데 받지 않았단다. 그럴 리가 없어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더니 없는 번호란다.
요금의 두 배를 내놓으라기에 내쫓았다. 돈 만 원이 없어 그림이 폐기되게 생겼다. 돈 부치라고 한 지가 한 달이 지났건만. 아들놈이고 마누라고 도움이 안 된다.
4월 14일
마누라가 누구 코에 붙이라고 20만 원을 보냈다. 구멍가게에 10만 원을 주고 라면과 소주를 가져오려 했더니 외상값이 부족하단다. 라면을 두고 소주만 2병 가져왔다.
저녁 무렵 밖이 소란스러웠다. 망할 놈의 촌구석.
4월 20일
종이와 아교를 샀다. 이번 작품만 완성되면 김학열이의 시건방진 입을 틀어막을 것이다.
정진식이도 할망구도 아들내미 모두 그동안 날 구박한 걸 후회할 거다.
5월 1일
정진식이가 운영하는 화랑을 찾았다.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말에 침을 뱉어주었다.
근처 몇 군데를 더 돌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최영수가 작당질하다가 내쫓겼다고 하더니, 아직도 못돼먹은 놈들이 판을 치는 것 같다. 이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날 죽이려 드는 게 분명하다.
차상철의 일기는 아집과 고독, 착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림만 잘 그리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음모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향한 사랑과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사랑받지 못한 예술가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차상철이 어떤 심경이었는지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으나.
그는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예술가로서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면 아빠가 용서해 줄 수도 없잖아.”
차시현이 눈물을 닦아내며 울먹였다.
녀석의 등을 쓸며 위로하다가 밖으로 나섰다. 택시를 호출하니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람들이 아빠 욕하는 거 들었어.”
“뭐라고?”
“어떻게 자기 아버지랑 연을 끊을 수 있냐고. 독한 사람이라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할아버지가 회사에 찾아갔었대. 돈 달라고. 여기 사장이 자기 아들이라고.”
끔찍하다.
“아빠가 계속 내쫓으니까 그런 말이 돈 것 같아.”
차시현이 바닥을 찼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사과해 줬으면 했어. 그럼 아빠도 용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수 없더라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 있기 힘든지 쪼그려 앉았다.
“근데 이제 아무 소용 없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시간만 함께 보냈다.
택시가 도착할 즈음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냥 내일 보여드리지 말까?”
차시현이 창밖에 시선을 두고는 물었다.
“나한테도 숨기신 거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은데. 괜한 일 한 거 아닐까?”
“글쎄.”
가족 사이의 일을 섣불리 넘겨짚을 순 없다.
“난 괜찮다고 생각해.”
차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랑 넌 다르잖아. 네가 그런 생각으로 전시회를 준비했다는 걸 아시면 오히려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림으로 성공하겠다며 가족도 내팽개친 차상철과 다르게.
시현이는 가족이 화목해지길 바라며 그림을 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림과 나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거니까.
그런 아버지와 다른 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받지 않을까.
“분명 위로가 될 거야.”
차시현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고민을 이어갔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그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기 전 그 모습과 똑같다.
“내가 도와줄게.”
“어?”
“걱정 말고 모셔와.”
* * *
다음 날.
차재우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과 함께 모처럼 나서는 나들이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는데 아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현이 왜? 놀이공원 가기 싫어? 다른 데 갈까?”
“그.”
차시현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혹시라도 괜히 상처를 건드릴까 무서웠다.
“다른 데 가도 돼. 시현이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그렇게 놀러 가자고 하더니. 왜 울상일꼬?”
어머니와 할머니도 나서서 차시현을 달랬다.
어제 고훈과의 대화를 떠올린 차시현이 용기를 냈다.
“저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차재우 성현주 부부가 시선을 교환하고 웃었다.
“그래. 어디 갈까?”
“여기요.”
차시현이 명함을 꺼냈다.
광화문 광장 근처에 있는 드가 갤러의 대표에게 받은 명함이었다.
“드가 갤러리? 그림 보고 싶었어?”
“시현아, 그림 말고 할미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남편에게 시달린 탓에 그림이라면 질색하는 이복자가 손자를 달랬다.
용기를 냈던 차시현이 금세 시무룩해졌고, 성현주가 중재에 나섰다.
“요새 미술품 보는 것도 좋더라고요. 대화 주제로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
“네. 시현아, 무슨 전시회야?”
“그. 그냥요.”
차시현이 말을 얼버무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해하길 바라서 전시회를 꾸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가보자. 어머니, 시현이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한번 가봐요.”
바쁜 탓에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거늘 오늘만큼은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드가 갤러리는 2층 건물로 아담했다.
오늘 어떤 전시가 있는지 안내도 안 되어 있어, 오는 길에 검색해 보았던 성현주는 주변을 의아히 둘러보았다.
“우리밖에 없나 봐.”
“조용하게 보면 좋지 뭐. 그렇지, 시현아?”
“네…….”
“나는 그냥 차에 있을란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 봐요. 정 싫으시면 그때 나오시고.”
전시회라든지 갤러리라든지.
그림과 관련된 모든 것이 꺼려졌지만, 손자가 조심스레 옷깃을 잡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복자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고 차시현 가족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고훈이 하얀 셔츠와 면바지를 멀끔하게 입고 가족을 맞이했다.
“훈아.”
차재우와 성현주가 고훈을 알아보곤 반겼다.
“오늘 같이 보기로 했어?”
“한국엔 언제 왔어?”
“중요한 전시회가 있어서요. 일일 도슨트로 일하게 됐어요.”
차재우와 성현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전시길래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 고훈이 한국까지 와서 도슨트를 자청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여기서?”
“네.”
“찾아보니까 검색되는 게 없던데. 아직 안 연 거 아니야?”
성현주가 물었다.
“막 오픈했어요. 들어오세요.”
차시현 가족은 의아함을 품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차시현은 입구에 비치된 사탕을 집어 할머니와 부모님께 드렸다.
“이게 뭐야?”
“할미는 사탕 안 먹어.”
“가지고 가는 거예요.”
전시회에 익숙하지 않은 가족들을 보며 고훈이 미소 지었다.
“이 전시회의 주제는 파랑입니다.”
일행이 차시현의 첫 작품 앞에 섰다.
어두운 밤 호숫가에 자리 잡은 푸른 나무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래, 흑백으로 표현한 숲에서 유독 한 그루 나무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파란색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옷에 사용되어 자애로움과 어머니, 사랑, 보호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했고. 덜 익은 과실 때문에 풋풋함과 젊음을 상징하기도 해요.”
고훈이 <파란 나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외로운 나무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파랗게 칠한 걸 보면 붙어서 자란 다른 나무들과 달리 유독 홀로 선 이 나무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살짝 무서운 느낌도 있다.”
성현주가 의견을 내놓았다.
“맞아요. 초점이 잘 잡히는 파란색은 불안이나 비참함, 우울함을 내기도 하거든요. 이 작품의 작가는 선명한 파란색과 채도가 낮은 파란색을 함께 썼어요.”
고훈이 나무를 가리켰다.
“줄기는 어두운 파란색으로 그려서 불안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었고, 나뭇잎은 밝은 파란색으로 그려서 사랑으로 감싸는 듯한 이미지를 주려고 했어요.”
“하하. 같은 파란색에도 의미가 많이 있구나. 난 그냥 좋아서 입었는데.”
창백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던 차재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셔츠랑 비슷하네. 색이. 시현아, 그치?”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파란색을 사용했던 차시현이 우물쭈물 답했다.
“특히 이 작가는 파란색을 정말 잘 다루거든요. 이쪽에 의미를 두고 보면 좋아요.”
고훈이 화제를 돌리고자 다음 작품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성현주가 감탄했다.
호수 가운데 우뚝 솟은 나무 그림이었다.
첫 작품과 마찬가지로 파란색이었으나, 수면에 비친 나뭇잎은 녹색으로 빛났다.
“혹시 신호등의 초록색 불을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세요?”
“그러게?”
성현주가 손을 모았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옛날에는 초록과 파랑을 같은 뜻으로 사용했대요. 푸르다의 어원이 풀에서 나왔단 설도 있어요. 지금도 파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도 있거든요.”
“그래?”
차재우와 성현주가 되물었다.
“네. 사실 푸른색은 파란색과 초록색을 포함한 색이에요. 무지개를 봐도 파란색과 초록색은 인접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았어요. 그날 빛이 어떻게 비치는가에 따라서 파란색으로 보이기도, 녹색으로 보이기도 했거든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성현주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염료가 잘 발달해서 그런데, 파란색 염료가 없었던 과거에는 그랬어요. 자연에서 파란색은 종종 녹색으로 보이기도 했거든요. 당시 사람들은 녹색과 파란색이 같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어요.”
고훈은 서양 사람들이 11세기까지만 해도 무지개의 색을 3개에서 최대 6개까지로 구분했다고 말하며, 그것에 파랑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역사가 있었던 파란색과 녹색을 함께 그렸어요. 파란색이 녹색에 종속된 색이 아님을 보이기 위함도 있고. 뿌리가 같더라도 다를 수 있음을 표현하면서 한 몸이었단 걸 뜻하기도 하죠.”
“음.”
“또 보는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점을 말하기도 해요.”
별생각 없이 설명을 듣던 차재우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버지 차상철이 죽을 때까지 집착해 그렸던 나무와 자신이 좋아했던 파란색을 눈에 담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나무를 파랗게 칠한 이유는 여럿이지만, 분명한 건 파란 나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아요. 이렇게 아름답게 그렸잖아요.”
고훈이 숲을 이루는 주변 나무들이 흑백으로 표현된 것과 파란 나무를 비교했다.
“그렇지?”
고훈의 시선을 받은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재우와 성현주, 이복자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