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30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9)
“대체.”
최규서의 목소리다.
“대체 어디까지 방해할 셈이야.”
장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의가 가득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만약 오늘과 한국관 사태를 두고 방해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장미래는 귀찮다는 듯. 혹은 관심도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역시 숙취가 심한 모양이다.
“피곤하니까 나중에 얘기해.”
“피곤?”
최규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놀라서 상황을 지켜볼 뿐, 기자들만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너 내가 우스워?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아? 이겼으면서 왜 그딴 얼굴이야!”
장미래를 왜 저리 미워하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열등감에서 비롯된 마음 같다.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장미래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럼 뭐 춤이라도 출까?”
최규서가 눈썹을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약이 바짝 올랐다.
“이기고 지는 게 그렇게나 중요해?”
“뭐라고?”
“네 영정은 봉안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거야?”
장미래가 생수를 들이켰다.
“여기 네 영정 좋아하는 분들 꽤 계셨어.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이겼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
최규서가 주먹을 떨었다.
“좋아한다고? 그걸로 뭐가 바뀌어! 표준영정으로 인정받지 못한 영정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존재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기쁜 것이다.
공모전에서 떨어진다고.
상을 받지 못한다고.
다른 작품보다 가격이 낮다고, 팔리지 않는다고 가치가 없는 게 아니다.
“언제 철들래?”
“뭐?”
“대체 언제까지 유치하게 굴 거냐고.”
장미래도 그간 쌓인 감정이 많은지 말에 가시가 있다.
“미술에 이기고 지는 것 따위 없어. 상 한 번 탔다고. 영정 봉안했다고 누가 더 나은 게 아니라고. 멍청아.”
“너!”
최규서가 장미래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공모전 보안직원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놔!”
최규서가 몸부림치자 보안직원들이 거리를 두었다.
“항상 그랬어. 그림 좀 그린다고 사람 건방지게 대하는 태도. 이겼으니 내가 네 아래로 보여? 네까짓 게 뭔데 입을 함부로 놀려! 나 최규서야. 최규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모두가 비위를 맞춰주는 환경에서 성장한 최규서의 자아는 비대하고 뒤틀렸다.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수직적인 관계만 가졌던 최규서로서는 장미래가 걸림돌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네 말대로야.”
장미래가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우습긴 하지.”
“너어어어!”
최규서가 발작을 일으키며 달려들자 보안직원들이 그녀를 데리고 무대를 내려갔다.
* * *
장미래의 영정은 진주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기사에 봉안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주시와 장수군, 최씨 문중은 장미래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전했고 최규서는 보이지 않았다.
행사가 마무리되고 장미래가 말했던 촉석루를 찾았다.
과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앉아서 탁 트인 시야와 선선한 강바람을 마주하자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홀로 남았던 논개의 고독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큰일 했어.”
“정말로요.”
숙취에 시달린 장미래가 그대로 누워버렸다.
“설마 만장일치가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방태호의 말대로다.
최규서는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을 어떻게든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진주시, 장수군 쪽 사람들이 최규서의 영정에 크게 호응한 것도 사실이니 예측하기 힘든 결과였다.
“저도 몰랐어요. 규서가 칼을 갈고 나오긴 했더라고요.”
한국화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규서의 영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결과에 차이가 생겼으나.
최규서의 영정은 옷고름, 저고리, 치마, 가체, 화장법과 같은 고증은 물론 색감과 필치, 묘사력 모두 뛰어났다.
장미래가 최규서를 우습게 여길지언정, 그녀의 그림만은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
“대체 왜 그렇게 언니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백설기의 말에 누워 있던 장미래가 이마에 팔을 얹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돌렸다.
“훈아, 냉면 먹을까?”
“냉면이요?”
뜬금없이 냉면이라니.
냉면보다는 진주성 근처에 100년이 넘은 육횟집이 있다고 해서 그걸 먹어보고 싶었다.
“응. 진주냉면.”
“함흥냉면, 평양냉면은 들어봤는데.”
장미래가 검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냉면은 진주.”
“훈이 입맛에 맞을 거다.”
할아버지도 말씀하시니 다 같이 진주냉면을 먹으러 일어났다.
* * *
[논개 표준영정 장미래 화백으로 확정]
[석류꽃으로 핀 논개를 담아내]
[진주시 감사패 전달해]
[서인호 화백, “논개의 내면을 바라본 영정.”]
논개 신분 논란으로 불타올랐던 여론은 장미래의 영정이 채택되면서 순식간에 불식되었다.
새 논개 표준영정을 본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서인호 화백 등 미술계 원로와 평단 또한 찬사를 내놓았다.
[논개 표준영정 제작 과정으로 바라본 화가의 역할]
3일 진주에서 논개 표준영정 공모가 이뤄졌다. 당선작은 한국 예술인 조합장 장미래(37)의 영정이다.
<사진>
표준영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빨간 치마다.
여러 빨간색을 겹쳐 칠한 치마는 전쟁의 참혹함, 진주 백성이 흘린 피, 논개의 고귀함, 분노 등을 상징한다.
논개의 신분 논란으로 치마를 빨갛게 칠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냐는 질문에 장미래는 “빨간색은 여러 상징을 지녔다”고 말하며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화가의 역량과 감상자의 태도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해당 인터뷰를 통해 그녀가 논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같은 빨간색을 두고도 선정적으로 볼 수도, 고귀함을 느낄 수도 있듯이 논개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실제로 논개 표준영정을 본 사람들은 논개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칫 기생, 누군가의 첩, 위인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논개라는 개인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장미래의 표준영정은 의미를 더한다.
이제 신분 논란에서 벗어나 논개라는 인물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대한일보(이인호 기자)
이인호 기자는 장미래가 보여준 새로운 시야를 언급하는 기사를 냈다.
그 기사는 미술 포럼에 퍼져 큰 호응을 얻었다.
└이게 맞지. 기생이고 양반이고가 무슨 소용이야. 아직도 조선 시대 살고 있나?
└솔직히 난 양쪽 다 역겨웠음. 기생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양반가 첩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첩이 자랑임? 그냥 자기 가문에 위인 있었다고 알리고 싶은 것 같았음.
└논개 정말 너무 예쁜데 예쁘다는 말이 안 나오더라.
└나도. 살짝 미소 짓고 있는데 눈빛은 엄청 비장했음.
└장미래도 말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지.
└기사에서도 언급하더만. 기생, 양반가 첩, 위인이 아니라 개인으로 표현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그게 진짜 대단하지 않음? 장미래는 논개를 위인으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여러 관점을 제시해 준 거잖아.
└촉석루에 올라가니까 논개가 얼마나 허망하고 원통했을지 생각나더래.
└근데 최규서는 어찌 됨?
└ㅋㅋㅋㅋㅋ알게 뭐야
└나 진짜 최규서 옹호하는 게 아니라 좀 안타깝더라. 나도 비슷한 경험 있는데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지, 열등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게 진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예전에 훈이랑 앙리가 그랬는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다고 다음 올림픽에서 또 따는 건 아니잖아.
└우사인 볼트는?
└ㄷㅊ
└그건 아는데…….
└앙리도 인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했어. 그 가치를 찾아내고 가꾸는 건 본인 몫이고 거기에 더 나은 건 존재할 수 없다고. 만약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어 질투가 나거나 자괴감이 들면 타인을 보기 때문이래. 자기를 가꾸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맞아. 그래서 요즘 미술계에서 상 같은 거 없애는 추세잖아.
└앙리는 왤케 잘 알아?
└훈이 질투했던 게 분명함
* * *
냉면과 소불고기, 육회비빔밥이 맛있었던 진주를 뒤로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꽤 오래 비워두었지만 관리해 주시는 분 덕에 도착하자마자 편히 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거실 안마의자에 앉으시며 앓는 소리를 내셨다.
“아이고. 할애비는 이제 여행 못 다니겠다.”
벤치프레스 기록 120㎏을 유지하시면서 엄살이 심하시다.
“동해안도 놀러 가기로 했잖아요.”
“다음에. 다음에 가자.”
혼자 간다고 해도 들어주실 것 같다.
정말로 피곤하신지 곧장 코를 골며 주무시길래 오랜만에 작업실을 찾았다.
“흐읍.”
언제 맡아도 정겨운 냄새다.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이 가득한데 주로 해바라기와 할아버지, 정원을 다루었다.
가장 눈에 띄는 색은 역시 노란색이다.
정말 오래 다뤘지만 장미래의 영정을 보고 나니 한발 더 나아가고 싶어졌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울려 확인하니 차시현이다.
“여보세요.”
-이런 걸 보내면 어떡해. 난 못 먹잖아.
서울로 올라오면서 진주에서 먹은 음식을 사진으로 보내줬었다.
“엄청 맛있어. 냉면에 육전 올려서 먹는 게 최고더라.”
-아아아앙.
차시현이 요상한 소리를 냈다.
요새 조금 귀여운 척이 늘었다.
“할아버지 일은 어때?”
-아무리 여쭤도 알려주지 않으셔. 연락처를 모르니까 방법이 없어.
차시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해하길 바라지만, 두 사람 사이가 워낙 안 좋은 모양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만을 위한 전시회를 준비했는데 아무 소용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떡하게?”
-옛날 할아버지 댁 찾아가려고.
“거길 기억해?”
대여섯 살 정도였나.
아주 어렸을 때 찾았던 장소를 10년 이상 지난 지금 제대로 기억할 리 없다.
-응. 난 똑똑하니까.
“…….”
-여보세요?
“아니. 10년도 더 된 일이잖아. 제대로 찾아가는 것도 문제고 거기 살고 계시리란 보장도 없잖아.”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는걸. 아, 내일 같이 갈래? 피자도 먹고.
조금 귀찮지만 혼자 보내기 걱정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끝내 할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가 떠올라 거절하기 힘들다.
“피자는 네가 사.”
-응! 그럼 내일 봐! 집으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