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9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8)
“그럼 최규서 작가님, 인사 부탁드립니다.”
사회자가 최규서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반갑습니다. 최규서입니다.”
몇몇이 마지못해 박수를 보냈지만, 장내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최규서가 4년 전 협회장인 아버지를 내세워 수많은 비리를 저질렀고, 그 대가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최규서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그녀는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협회가 사라진 뒤 미술계에서 그녀가 발붙일 장소는 없었다.
징역 8년을 선고받아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난관을 헤쳐나갈 방법은 오직 혈연으로 닿아 있는 최씨 문중을 이용해 논개 표준영정을 봉안하는 일이었다.
장미래를 제치고 공모에 성공한다면 세간의 평을 조금이나마 돌릴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표준영정 사업에 계속 참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상황을 설정해 두었다.
“의암 주논개의 영정이 소실된 참담한 상황에서 최근 안타까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규서가 분명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읜 주논개를 아십니까.”
홀로 몇 번을 반복해 연습한 대목이었다.
“그분의 숙부는 고작 네다섯 살 된 아이를 벼 50석에 김부호의 민며느리로 팔려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외가로 피신했지만, 김부호의 고발로 주논개는 구금당했습니다.”
목소리가 절절하여 호소력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접한 충의공 최경회께서 주논개 모녀를 석방해 주셨고 관저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셨으며 후일 성년이 되자 첩으로 들이셨습니다.”
최규서는 사람들과 시선을 교환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했던 충의공마저 전사합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죠.”
양반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잃고, 억울하게 감금되었으며 남편마저 잃은 주논개를 욕보일 수 있냐며 진심으로 물었다.
“그런 그분을 어느 누가 감히 기생으로 폄하할 수 있습니까.”
최규서가 말을 마치자 그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이걸로 됐어.’
처음 인사했을 때와 전혀 다른 장내 분위기에 최규서는 주먹을 쥐었다.
영정 작가를 선정할 때 작가의 명성은 중요한 조건이었다.
논개 영정은 친일파 논란이 있었던지라 더욱 그러했다.
전과가 있는 최규서로서는 가망이 없었고, 그녀는 스스로 만들어낸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주최 측에 먼저 소개해주길 부탁하여 몇 주째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한 문제의 답을 내놓았다.
대립한 두 주장 사이에서 장미래가 방황할 때, 정답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격차를 줄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논개를 진실로 기려야 했다.
논개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처럼, 이례적으로 긴 수감 생활을 하게 된 아버지.
어린 논개가 억울하게 구금당했던 것처럼 본인 또한 부당하게 징역을 살았다.
논개가 남편과 사별했듯 자신도 남편과 이혼했으니 최규서는 본인과 논개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그리 믿었다.
주논개를 훌륭한 양처로 그림으로써 본인 또한 과거를 되찾고자 했다.
그 거짓된 마음이 논개를 기리는 이들에게는 진심으로 비쳤다.
“논개를 기리는 마음이 전해지는 말씀이셨습니다.”
사회자가 나섰다.
“최규서 작가님은 대한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이래 국내에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다. 재료의 다양성이 강요되는 시기에 한국화만의 정체성을 지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오늘 논개 표준영정 공모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최규서를 소개한 사회자가 잠시 간격을 두어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럼 최규서 작가님의 논개 영정을 공개하겠습니다.”
행사장 정면에 최규서의 논개 영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아름답구만.”
하얀 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단아하게 입은 논개의 자태에 참석자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치마를 우아하게 잡아 들고.
단아하게 여민 옷고름.
지체 높은 양반가의 부인이었다.
최씨 문중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기생이라니.
최규서의 영정이야말로 의암 주논개의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짝- 짝- 짝짝짝짝
누군가가 시작한 박수가 물결을 이루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주논개의 고상한 품격이 돋보이는 최규서 작가님의 영정이었습니다.”
사회자가 식을 이어나갔다.
“다음으로 장미래 작가님을 모시겠습니다. 작가님, 인사 부탁드립니다.”
내빈들 사이 드문드문 적의가 담긴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장미래입니다.”
장미래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날이 많이 덥죠?”
숙취에 시달렸으나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촉석루에 가 보니까 강바람이 정말 좋더라고요. 꽃도 예쁘게 피었고. 행사 뒤에 꼭 한 번 들러보시면 좋겠습니다.”
장미래가 짧은 인사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열렬히 박수를 보냈고 몇몇은 어쩔 수 없이 손만 움직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진행자가 장미래를 소개했다.
“장미래 작가님은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시며, 한국 예술가 조합장직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자유와 개성,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으셨고 오늘 논개 표준영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바로 공개합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장미래의 영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행사장이 고요해졌다.
최규서가 보여준 정숙하고 고결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선혈이 흐른 듯한 새빨간 치마.
석류꽃 같은 입술은 미묘하게 미소 짓고 있었고, 눈빛은 각오를 다진 장수의 그것이었다.
‘이겼어.’
장미래의 영정을 확인한 최규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기개를 표현했지만 장미래의 영정은 화려한 장미와 같아 기생을 연상시켰다.
최규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린 순간 장미래가 입을 열었다.
“촉석루에 오르니 감히 논개의 어떤 마음이었는지 헤아려보게 되더군요.”
장미래의 영정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이 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마 당시 진주 백성 중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을 거예요.”
장미래는 격정적인 어조도, 화려한 미사여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진주와 남강은 피로 물들었을 겁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논개는 어떠했을까.”
그저 차분히 말할 뿐이었다.
“진주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남강을 물들인 백성들의 피뿐인데, 남강은 무심히도 흘렀습니다. 외롭게 죽어간 이들의 흔적마저 씻어내는 남강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거예요.”
장미래가 영정 앞으로 걸어갔다.
“허망한 가운데 그녀 눈에 석류꽃이 띄었습니다.”
충격에 빠졌던 사람들이 점차 장미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선군도 명군도 남강마저 외면한 진주 백성들의 피를 머금기라도 하듯 빨갛게 피어난 석류꽃 한 송이. 진주에서 벌어진 참극과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꽃.”
장미래가 영정에 시선을 주었다가 사람들을 향했다.
“논개입니다.”
심사위원들과 행사에 참가한 사람 모두 탄식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장렬히 싸우다 죽은 진주 백성을 그 누가 기억할까.
피로 물든 대지에 피어난 빨간 석류꽃만이, 논개만이 기억할 터였다.
“진주의 석류꽃이 되기로 한 논개는 남강에게 묻습니다. 가족과 벗들을 어디로 데려갔냐고. 어머니, 시어머니, 올케, 벗들이 끼던 반지를 모아 열 손가락에 끼고 묻습니다.”
“…….”
“왜장을 끌어안은 채 남강에 뛰어들어 묻습니다.”
장미래는 최규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무심히 흐르면 누가 우리를 기억해 주겠냐고.”
* * *
내 생애 이런 빨간색은 본 적 없다.
치마 주름을 따라 채색된 그것은 남강을 가득 채운 진주 백성의 피처럼 서글프고.
석류꽃처럼 아름답고.
불처럼 강인하다.
논개라는 인물을 표현하기에 빨간색보다 적절한 물감이 또 있을까.
생명, 사랑, 분노, 위험, 피.
저 치마를 표현하고자 대체 얼마나 많은 날을 고민했을지 가늠할 수 없다.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이 애절하고도 절박한, 그러나 경외할 수밖에 없음을 표현할 수 없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누구도 섣불리 감상을 내놓지 못한 가운데 그녀를 기리고 있다.
그래.
이런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영정의 본래 기능일 것이다.
“해냈구나.”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정말 그렇습니다. 숨막힌다는 말밖에는…….”
방태호는 당장에라도 가까이 다가가 살피고 싶은지 상체를 기울이고 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진행자가 앞으로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예술인 조합, 진주시, 장수군, 논개 추모 사업회 등에서 참가하신 심사위원단이 막 심사를 마쳤습니다.”
방태호는 최규서가 이번 일에 뒷공작을 시도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논개 추모 사업회가 최씨 문중이 나서서 행하는 곳이라 심사에서 불리할 거라고 했지만.
믿어야 한다.
저들이 진정 논개를 추모한다면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칠 리 없다.
눈이 멀지 않고서야 저렇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모른 척할 리 없다.
“논개 추모 사업회 회장 최길석 씨께서 발표 맡아주시겠습니다.”
적게 잡아도 일흔은 넘겨 보이는 노인이 단상에 올랐다.
앞서 최씨 문중 회장으로 소개되었는데 괜히 불안해진다.
“최규서 작가의 영정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논개 영정이었습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비록 가세는 기울었지만 양반가의 규수에서 충의공의 부인다운 현명하고 정숙한 자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주논개였지요.”
떨어져 있어 잘 보이진 않지만 최규서가 웃고 있는 것 같다.
취재 나온 사람들이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한편 장미래 작가의 논개는.”
최길석이 말을 한 번 삼켰다.
“먼 과거에서 지금 이곳으로 걸어 나온 듯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방태호와 눈이 마주쳤다.
“시대가 흐르면 생각이 바뀌어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라도 달리 받아들이겠지요. 때문에 어느 한순간의 가치관으로 누군가를 표현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최길석이 심사평이 적힌 종이를 접었다.
“우리 심사위원단은 만장일치로 장미래 작가님의 영정을 선택하였습니다.”
노인이 장미래에게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일흔 넘은 노인이 딸보다도 어린 장미래에게 인사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